뜬 구름 (시와 시인의 말 ) > 글동네

사이트 내 전체검색

글동네

뜬 구름 (시와 시인의 말 )

페이지 정보

글씨크기

본문

뜬 구름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백 파

 

슬픔 자락에 구름이 걸린다

바람은 신경을 타고 가슴에 스미는데

나는 무겁게 하늘을 이고

황막한 사막을 걷는다

 

다양한 모습으로 집요하게 따라붙는

풀리지 않는 삶의 끈 움켜쥐지만

결국 내 슬픔은 한 뼘 뜬 구름이다

 

 

해설

슬픔도 서러운데 슬픔의 치맛자락이 허망한 구름에 걸립니다.

슬픔과 허망함이 짝꿍이 되어 허공을 잘게 부서트려 깃털에 담으니

허공의 이 끝과 저 끝이 바람을 불러들입니다.

모양도 없고 냄새도 없고 목적도 없던 바람은 할일을 만난 듯

활공이다 저공이다 획획 빌딩 사이를 고공 질주합니다.

마치 헐리다 만 옛 성터처럼 슬픈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풀리지 않는 삶의 끈을  움켜쥔 슬픔의 사연들을 싣고

마치 독수리가 사막의 하늘을 나는 것 같습니다.

두발로 허공을 움켜쥔 독수리가

칼날처럼 솟구친 기암위에 앉아 호홉을 멈추었습니다.

나는 다시 독수리의 날갯짓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독수리는 날개를 저으며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날개의 그늘이 나를 덮었습니다.

그 이튿날은 페이슨 에서 그 독수리를 다시 만났습니다.

꽁꽁 언 나무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겨울마다 한 겹씩 어는 하늘이 몇 겹씩 얼어붙어 있는지 헤아리고 있습니다.

내가 그 새를 보듯 그 새도 나를 보고 있습니다.

슬픈 한 겹, 구름 한 겹, 하늘을 이고 사막을 걸어온 나를 헤아리고 있습니다.

그 다음 세 번째 날은 다시 사막으로 돌아 와

모래 바다와  저녁 겸상을 했습니다.

밥상에는 사막의 사연들이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지금 까지는 잘 알아듣지 못한 입으로

밥 먹고 귀로 듣지 못한 사연만으로 먹었는데

지난 10년을 사막의 메뉴로만 입맛을 맞추니

이제는 입에 맞는 반찬들이 밥상에 올라왔습니다.

사막은 외골수로 같은 말만 되풀이 하느라 다른 말은 다 잊어버린 듯합니다.

밥상 위에서도, 이빨 사이에서도 사박사박 그 말만 되풀이 합니다.

나는 모래 알 굴러가는 소리 사이로 그 속만 파먹었습니다.

사막의 아픈 발자국이 우둘 우둘 씹혔습니다.

젓가락을 버리고 내 손으로 사막을 만졌습니다.

모래알 피부는 여인의 피부처럼 부드러웠습니다.

부드러운 슬픔, 부드러운 것은 약함의 상징입니다.

사람들은 약한 것에 약합니다.

약한 것은 약하기 때문에 울기도 잘합니다.

어린애기가 새로 태어나기 전에는 심장에 계란만한 구멍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 그 구멍이 닫치면서 엥하고 소리를 냅니다.

이 심장이 메워지는 소리를 사람들은 울면서 태어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울음보다 더 슬픈 이야기를 할 때는

심장이 메어 말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 시()의 결론은 <결국 내 슬픔은 한 뼘 뜬 구름>이라고 말합니다.

슬픔은 뜬 구름과 함께 날려 보내야 합니다.

짝을 잃었다던가. 사업에 실패 했다던가 할 때

사람들은 심장이 메어지는 슬픔을 맞보지만

이러한 슬픔은 구름과 함께 날려 보내야 합니다.

가장 밑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은 더 내려 갈 때가 없기 때문에

성공의 발판이라고 말합니다.

재벌가의 성공사례에서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업에 실패하여 가족을 볼 면목이 없어 자살을 하기 위해 물속으로 걸어갔습니다.

물은 점점 깊어집니다.

물의 깊이가 코의 언저리를 막 넘어 서려 할 때

<사람 살려>하는 아우성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소리를 듣자 자살하려던 자는 그 사람을 구해 주었습니다.

구제를 받은 사람이 자기 집으로 그를 초청하였습니다.

그 사람을 생산 공장을 조그맣게 하고 있었습니다.

생산품을 보자 자살 하려던 사람의 눈이 번쩍 띄었습니다.

이 생산품을 세계의 시장에 고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습니다.

그 사람은 동업자가 되어 굴지의 재벌가로 성장하였습니다.

몇 십 년 후 재벌가가 된 두 사람은 찻잔을 나누며 이야기 잔치가 벌어졌습니다.

<여보게 자네, 그때 말이야. 나는 그때 자살 하려는 자네를 보았지. 그때 나는 생각했지. 죽으려는 자는 살려봤자 결국 죽음을 선택하지. 그래서 내가 살려달라고 고함을 쳤지. 결국 자네는 자살을 포기하고 나를 건져주더군. 남의 생명을 건져 준 자가 어찌 자기 생명도 구제하지 않겠는가! 뿐만 아니라 자네는 나의 발명품을 세계무대에 올려놓았네.>

친구가 말을 받았습니다.

<허허 여태껏 나는 자네를 살린 자로서 자부를 느끼며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 보니 자네가 나를 살린 것이로군어쩠던 자네의 발명품은 세계 어느 누구도 따를 짜가 없는 걸작들이였어 진짜로 자네는 나를 살린 구세주인 게야>

동시에 튀어나온 말

<고맙네!>

소위 합음어(合音語)라 하던가?

교향곡 음악회에 가서 노래를 듣노라면 무엇이 중대하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100여명의 교향악단 단원들이 첫 음을 어떻게 날카롭게 시작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지휘자의 영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확한 시작,

아귀(articulation)의 교차,

그다음은 곡의 해석(dynamic)입니다.

바로 두 재벌가의 화합된 몇 십 년 동안의 하모니와 종지부 <고맙네!>가 나의 귀에는 교향곡 음절처럼 아름답게 들여왔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Copyright © KASDA Korean American Seventh-day Adventists All Right Reserved admin@kasd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