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과 물(시와 시인의 말)
페이지 정보
본문
돌과물
강위덕
돌과 물이 빚어내는
눈먼 문명이 휘몰아친다
속으로 생을 앓는 비명이
이명처럼 안에서 새어나오고
서로로 못 맞추어 제살을 깎는다
농도 깊게 밀착될 수 없어
뿌연 물보라 부셔져 내리고
힘을 뺄수록 높이 솟는 맹목의 파도는
귓가에서 부서진다
잿빛 구름 겉이고 파란하늘 고개드니
솟아오르는 빛살무늬
어제의 상처마저도 솎아 내고
퀭한 바윗돌 찌푸리는 이끼에
꿔다놓은 웃음으로 말끔히 헹궈낸다
해설
돌과 물은 문명을 모릅니다. 이리저리 흩어져 돌아다니는 돌, 그렌캐뇬처럼 얽히고 꼬여 아름다운 자태를 자랑하는 절벽과 계곡의 바위도 통틀어 돌이라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관찰하려는 돌은 감각의 실제가 아니라 원초의 갈망이 빚은 관념의 돌입니다. 이 돌은 서로 흩어져 있고 떨어져 있어 외롭게 보입니다. 사람의 세계에도 서로 떨어져 있으면 외로운 신세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은 불가피 한 간격, 시공으로 이루어진 <사이>를 갖고 있습니다. 우리 상식으로 보자면 인생은 시냇물에서 서로 부딪치면서 물살과 싸우는 돌들과 같은 신세입니다. 이 시에서 표출한 상생의 정신은 돌들의 세계를 규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나와 자연, 나와 타자 사이에서 필요한 균형과 조화를 찾는 노력에서입니다. 보편적으로 아이들은 순수합니다. 그러나 자라나면서 배우고 찢겨지고 고뇌의 깊이가 따라 조금씩 순수성을 잃게 됩니다. 순수하다(innocent)는 말과 무지하다(ignorant)라는 말은 분리될 수 없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습니다. 돌들은 영원히 순수함을 간직할 수 있는 것은 <앎>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세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왜 저기(there)에 있지 않고 여기(here)에 있는가하는 의문은 사람은 역시 무지의 한 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류학의 맥락에서 보면 나의 발견이 이루어진 역사는 그리 오래지 않습니다. 16세기 르네상스에 들어서면서 자기를 발견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예술가들은 그림의 주제가 자기 위주의 자화상등 편지 자서전 따위로 자신의 주관 속에서 자기 자신을 펼쳐놓는 예술을 했습니다. 실로 <네 자신을 알라> 라고 유명한 말을 남긴 소크라테스 이후 1000여 성상이 지난 다음에야 사람들을 조금씩 자신에 대하여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돌과 물이 빚어내는
눈먼 문명이 휘몰아친다
속으로 생을 앓는 비명이
이명처럼 안에서 새어나오고
서로로 못 맞추어 제살을 깎는다
보들레르가 마하기를 고뇌는 저주이면서 왕관이라고 하였습니다. 앎의 능력과 순수 사이에서 힘들게 찢겨지고 닳아야 비로소 사람다워 집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은 어두움을 즐겨 그립니다. 시인들도 어두운 시를 좋아 합니다. 음악인들도 어두운 음악을 좋아합니다. 깊은 바다처럼 침침한 분위기는 지적이고 순수함을 자아내게 됩니다. 허술함을 표상하여 개미의 바느질이라고 합니다만 수천 년을 두고 닳고 닳은 앎의 결과는 깊이에 의해서만 진정성이 얻어집니다. 블랙! 그것은 모험의 시작입니다. 앞선 감각으로 살아가는 시인은 모험!
美, 知, 個性, 미는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완성되는 깊고 그윽한 분위기입니다. 지는 안정된 감성으로 미와 개성을 조화시킨 낭만입니다. 개성은 숨겨진 자신을 재발견하고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예술가들이 좋아하는 검정색 블랙 그것은 종합예술의 시작입니다.
- 이전글{소설} 재미성도 체험단편 / 도망자 / 시아버지가 돌아가시다니!(6-6) 11.12.28
- 다음글{수필} 바람이 있으매 / 이연희 11.12.24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