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길을 간다(시와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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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을 간다
강위덕
나무와 나무 사이
막힌 듯 다시 트이는 산길을 간다
숲의 범위와 깊이를 가늠하며
아무도 없는 태도로 무심하게 침묵하는
단 몇 줄, 행간 사이
어둠이 밝음에 낙서를 하며 다가서는데
다 털어버린 가벼운 차림으로
돌아서 온 길 하얗게 지우며 산길을 간다
해설
글쓰기만큼 글쓰기를 돕는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글 쓰는 도구들과 친해지면 친해질수록
더 깊고 아름다운 심연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곳에서 멋지게 다이빙도 하고
수영도하고
성깔 있는 잠수도 할 수 있습니다.
언어가 살아 있는 생명체라는 것을 느끼게 되면
언어에 대한 불신들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대신 무한 한 애정이 샘솟듯 합니다.
시 안에 살아있는 언어에 대한 사랑과 경이의 마음이 가득하다면
어떤 불행한 일을 당하여도
그 불행과 더부러 잘 사귀며 지낼수 있습니다.
지난 해 6월 저의 아내와 나는
오랜만에 고사리를 뜯기 위해 두 시간 운전하여
페이슨의 골짜기를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곳은 애리조나는 사막인대도
뉴욕의 산림지대처럼 수풀이 우거져 있습니다.
애리조나에 이런 곳이 있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하늘을 찌릅니다.
해발 7000피트나 되는 높은 지대인데도
드믄 드믄 동내가 있고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소나무 숲뿐입니다.
눈은 참 신기합니다.
소나무 숲 속에는 무수한 코드가 숨어 있는 듯 했습니다.
소나무 숲 속에는
누구와 걷느냐에 따라
소나무는 한 권의 책이 되기도 하고
음악이 되기도 하고 그림이 되기도 합니다.
소나무 사이로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는
신의 말씀 같기도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이 세계는 창조보다는 발견에서 더 많은 귀중한 것을 얻어내는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프로이트입니다.
저 꼼꼼한 임상기록들을 들추어 보면,
내속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과거의 한 자락을 숨겨둔 체 가만히 앉아만 있는 앉은뱅이 말입니다.
현재라는 시간의 의미는 산길을 걸어가던지,
독서를 하던지 간에 현재라는 말 그대로
순간일 수밖에 없습니다.
시를 포함하여 어떤 장르의 작품이던지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이야기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과거와의 소통 없이 미래를 이야기하는 하는 작품들은
독자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합니다.
과거 혹은 미래는 그 자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야기하는 동안
숲의 범위도,
깊이도,
이미 과거가 되어 버린 침묵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 몇 줄 행간사이>에서
앞의 이야기와 뒤의 이야기에는 극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둠이 밝음에 낙서를 하며 닥아 서는데
다 털어버린 가벼운 차림으로
돌아서 온길 하얗게 지우며 산길을 간다
후반부의 이 장면은 개척정신입니다.
이러한 정신은
과거를 지우고 미래를 바라보는
현재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산길을 걷는 것은 일상과 연결된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일상에서 벗어나는 의식의 소산은
현재를 벗어나려는 욕구에서 낯설음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비 일상의 경험으로 전위되는 독특한 심리적 기제를 재현하는 것은
일상과 비 일상을 치환하려는
시적 자아의 심리기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시는 벌써 이런 질문의 낌새를 눈치체고
극히 간단한 사실을 언급하므로서
이 시의 종지부를 향해 달리고 있습니다.
자꾸만 작아지는 양철대문에 갇힌 세계에서 벗어나려는 욕망과 갈망이
<지운다>라는 표현으로
미래를 지향하고 과거의 영향력으로부터 해쳐나가는,
그리고 공교롭게도 시적 자아가
과거에 사로잡히는 순간으로부터 전위라는 마침표를 찍고 있는 것입니다.
시에서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이든
물리적 존재에서 운반되어야 합니다.
물리적 존재 즉 객관적 상관물을 처음 언급한 사람은 토마스 엘리엇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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