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닥불 (시와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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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
강위덕
낙서로도 몇 마리의 물고기를 허탕 치게 하는 제주는 없으나 모닥불 앞에서 몇 십 년을 허공으로 오른 다음에야 담장 옆 모닥불을 피울 줄 배웠네 쓰자마자 지워지는 저만 아는 낙서 경전, 지우고 또 지우는 마음이 모닥불에 타오르고 있지만 생선 몇 마리가 갈릴리 호수에 얼비쳐 흐른다 잠 못 이루는 통증처럼 사이버에 입력된 닭 우는 소리가 참을 수 없이 비릿한 풍경을 붙잡고, 미륵처럼 오롯하게 한걸음의 말도 내 놓지 않고 잔혹한 말들의 세월을 견디게 한다 겨울의 구둘 방에 매주를 매달고 긴긴 겨울을 날밤으로 세워 봄을 일으키듯 새벽을 깨우는 시퀀스*의 닭소리가 마음속에 들어와 모닥불을 짚인다 아직도 땅거미가 새벽을 견디고 법조문처럼 시선에 꽂힌 베드로와 예수가 밀폐된 갈릴리 호수 속으로 하역되고 있다 모닥불을 분비하여 새벽으로 가는 어둑어둑한 침묵위에 천국의 방언 사랑, 사랑, 사랑.
세 번 저주했던 모닥불 앞
세 번 사랑했던 모닥불 앞
그곳에서 일생을 담은 모닥불이 마른하늘을 환수한다 주님과 함께 물고기를 굽고 있는 동안 세계를 더듬는 밑줄이 길을 내고 있다 그 길은 분명 물구나무의 길인 것을,
시퀀스(sequence)=같은 멜로디를 세 번 연거푸 하므로서 노래속에 특정가락을 강조하는 작곡 기술 중 하나이다.
해설
나라가 망할 때 충신을 알아보고
가정이 기울 때 어진 아내를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예수가 사형을 당할 즈음
정면에 맞서 예수의 무죄를 증언했어야 할 베드로는
멀찌감치 서서 모닥불을 쪼이고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에게 급박한 일이 벌어집니다.
젊은 계집아이로부터
이 사람도 예수당이라는 신고를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당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하여
예수를 저주까지 하면서 부인합니다.
그때 닭우는 소리가 3차례에 걸쳐 들렸고
끌려가는 예수님의 눈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칩니다.
그후 50일 ,
갈릴리 해변가에서 베드로와 예수님은
다시 운명의 만남을 가지게 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활후의 만남도 모닥불 앞입니다.
첫 번째 모닥불도, 두 번째 모닥불도
스승을 등진 배반의 현장입니다.
어쩌면 갈릴리 바다에 고기를 잡으로 온 행위는
예수 믿기 전의 베드로의 직업입니다.
사람은 위기에 처할 때 옛날로 돌아가는 습성이 있습니다.
아편을 찔렀던 자가 갑자기 닥친 위기를 만날 때는 아편하로 간다고 합니다.
술고래가 개가 천성하였어도
갑자기 아내가 죽거나 아들이 죽는등
가정에 위기가 생기면 술집을 찾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와 반대로
유년 주일 학교에서 예수공부를 하던 어린 아이가
교회를 등지고 살다가 죽을병에 걸리거나 위기가 닥치면
유년때 다니던 교회를 찾는다고 합니다.
이런 심리적 현상에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프로테론(보다 앞)과 휴스테론(보다 후)을 언급하면서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의 자기를 찾는 행위를
반복, 혹은 자기 피투성의 반복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행위는
현재 자기가 처한 역사적 상황을 직시하는 순간으로 생기는 것이라 했습니다.
이런 심리적 요소가 불길처럼 소용돌이 치고 있는
갈릴리 바다에 예수가 유령처럼 나타납니다.
이러한 순간에 대하여 메를로-퐁티는
현재의 온도는 객관적인 시간의 규정이나
과거가 된 시간의 규정보다 빨리 적응한다고 했습니다.(지각의 현상학).
베드로에게 나타난 예수의 의도는
아마 이런 심리적 현상을 응하기 위함인지도 모릅니다.
실수 많은 베드로에게 천국열쇠를 맡기고 하늘로 승천한 것은
예수의 큰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믿음과 신뢰는 베드로의 진로에 턴닝 포인트를 제공합니다.
더 이상 배반할 예수도 없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예수의 복음 전도를 위해 일하다가
물구나무 십자가에 달려 순교를 맞게 됩니다.
제자를 끝까지 믿어주는 훌륭한 스승의 따뜻한 모닥불이
결국 스승을 위하여 죽음까지도 불사하는
믿음을 갖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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