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배 (시와 시인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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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 배
강위덕
다 해진 일기장을 접어 만든 종이배가
콜로라도의 강을 타고 굽이칩니다.
인간세계가 싫어 등을 돌린 지 오래된 영혼처럼
한 맺힌 숨결을 끌어안고
굽이굽이 계곡 따라 굽이칩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 몸살 앓은 하늘들,
한국전쟁에서 폭격 맞은 구름을 몰고
그랜캐뇬의 금간 바위틈에 얽힌 사연들처럼
생의 슬픔을 끌어안고 굽이칩니다.
생각이 무거운 문장들 컴컴하게 굽이칩니다
폐허된 교회의 종각처럼 적막도 굽이칩니다
먹장어둠 똘똘 묻힌 붓처럼
차고 날카로운 비바람과 살을 섞으며 굽이칩니다
해설
이 시는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를 자유로이 드나들고 있습니다.
벽을 뚫고 들어가거나 새를 병에 담았다가 꺼내는
마술 같은 현상이 이 시의 세계에 확실히 존재하고 있습니다.
콜로라도의 강을 건너보지 못한 화자가
계곡들의 가슴 속을 마음대로 넘나들고,
수천 년 전의 틈바구니와 강의 거센 물결을 여행하는 것이
마치 인생의 역경을 넘나드는 것처럼 구비 구비 몸소참여합니다.
일기장을 접어 만든 종이배는
그 아름다운 자연이나 사물에 그치지 않고
추측난무의 세계에 대한 선명성을 구축하며
마치 스스로가 그 세계를 여행하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이는 화자와 작가 두 사람의 눈이 아닌 한 사람,
즉 화자로서의 작가가 시 속에서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푸른 하늘을 따내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집의 사괘를 맞춰나갑니다
아름다운 모국어처럼
아담한 기억의 구도를 잡고
내 그리움의 주소가 될 詩, 마치 시옷(ㅅ)字 지붕 속에서
별의 천정과 하늘의 겨드랑이 사이에 부적처럼 끼어둔
다락방의 아늑한 곳을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그랜케뇬의 틈난 바위에서
2차 대전 혹은 한국전쟁을 유추해낸
종이배가 말하듯 종이가
낡은 만치 산전 수절 몸소 격은 시인의 사고(思考)에 대하여
깁슨(Gibson)은 아퍼던스(affordance)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이 논리는 보편적으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상식적인 생각을 뒤엎고 있습니다.
인식에 있어서 지각과 언어가 교차하는 장소는 아포리아(aporia)로 우리 앞에 있습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깁슨(J.J. Gibson 1904-1979)은
세계에 대한 의식은 그것이 언어화되기 이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지각세계는
언어화되기 이전에 미리 분절화 되어있으며
언어는 그것을 옮겨 쓴다는 학설을 내세운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인지 이론에서는
인간은 환경에서 자극을 받아
그것을 뇌에서 처리하여 의미 있는 정보를 얻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깁슨(Gibson)은 역으로 정보는 인간을 둘러싸는 환경 안에 실재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혁신적 이론은 생태학적인 인식론이라고 불리고 있으며
키워드는 깁슨이 만들어낸 어퍼던스(affordance)공학이며
환경 안에 실재하는 지각 자에 대하여 가치 있는 정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환경정보(affordance)를 탐닉하는 심정으로
이 시와 더불어 헬리콥터를 타고
공중에서 종이배의 방향을 추적하며
그 자체로서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계곡의 사연들이 낡은 일기장의 종이배를 접수한 것에 불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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