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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원 이광수 선생이 대신 써 준 연애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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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장 존경하는 김 혜련씨.

정직하게 말하면 나는 이번에 와서 비로소 당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지난 봄 서울서

드린 편지는 취소합니다. 그때에는 내가 당신도 몰라뵈었고 또 나 자신도 몰랐습니

. 그리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제 와서 그 편지 전문을

취소해 버립니다.

혜련 아가씨. 나는 다만 당신과 나만을 새로 발견한 것이 아니라 인생과 자연을 새로

발견하였습니다. 이것을 신천신지라고 하는 것일까요. 당신은 내 눈에서 한 껍질을

벗겨 주셨습니다. 그래서 내 눈으로 하여금 새 빛을 감응하는 새 힘을 얻게 하였습니

. 당신은 내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사자이셨습니다.

혜련 아가씨. 나는 사람이 어떻게 아름답고 사랑할만한 존재인 것을 당신을 통하여

느꼈습니다. 의지와 감정과 의지력이 어떻게 조화하면 아름다운 인격이 일어나는가

를 깨달았고 당신과 같은 표본이 인류에 남아난 것을 세계의 큰 영광이라고 믿습니

.

혜련 아가씨. 도무지 붓이 내말을 듣지 아니합니다. 내 속이 그대로 써지지를 아니합

니다. 나는 지금에야 비로서 말과 글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과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미묘하고도 신비한가를 깨달았습니다.

혜련 아가씨. 내가 당신에게 대한 사랑은 인제는 벌써 연애가 아니라, 신앙이 되었습

니다. 하느님의 완전하신 작품(그것은 당신이십니다.)에 대한 수희갈망입니다. 숭배

자로, 찬미자로 당신의 앞에 꿇어앉은 자입니다. 당신은 내게 있어서는 인생의 전체

입니다. 무엇이라고 더 소중하게, 더 찬미해서 할 말씀을 시인도 문사도 아닌 나는 모

릅니다.

정직하게 고백합니다. 당신 앞에 선 것은 하느님의 앞에 선 것과 같아서 추호도 속을

기일 수는 없습니다. 다만 떨려서, 가슴이 울렁거려서 생각하는 바의 십분지 일도 표

현을 못할 뿐이지 티끌만한 거짓도 꾸밈도 과장도 없음을 거듭 거듭 맹서하옵니다.

정직하게 말씀하면 나는 처음에는 당신을 아름다운 한 여성으로 한 번 만져 볼까 하

는 생각이었습니다. 한참 동안 단물을 빨아먹고는 쫓아버리자 하는 그러한 심사였습

니다. 심히 죄송한 말씀이나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수풀 속의 산보에서 당신에게 열

렬한 꾸지람을 들을 때에 나는 비로소 당신의 속에 사랑할 만한 것 외에 두려워하고

존경할 무엇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럴 때에 나는 굳세게 저를 책망하였습니다.

제 인생에 대한 태도가 참되지 못하고 정성되지 못한 것을 아프게 뉘우치고, 그리고

나서는 당신을 귀여운 여성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할 벗으로 숭배한다는 생

각이 움돋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도, 그러면서도 내게는 항상 우월감이 있섰습니다.

그것은 다만 남성으로의 우월감뿐이 아니라 어리석게도 저를 과대 평가하고 당신을

과소 평가하는 데서 나온 그런 건방진 우월감이었습니다.

그러나 때는 마침내 왔습니다ㅡ 이 건방진 우월감이 여지없이 부서질 때가 마침내 오

고야 말았습니다. 나는 육체적 완력으로 당신보다 우월하겠습니다. 낫살로도 그하겠

습니다. 책 페이지나 외국말 마디나 더 배운 것으로도 우월하겠습니다. 사실상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건방지게 하는 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아아, 하느님,

사합니다ㅡ 나는 마침내 바닷가에 거니는 당신, 바닷가에서 해뜨는 것을 바라보고 기

도하는 당신ㅡ 모든 기회의 당신에게 당신의 속에는 빛나는 소울이 있음을 발견하였

습니다. 이것은 내가 인생에 나온 지 이십 육 년에 처음 발견한 빛입니다. 이 빛을 볼

때에 나는 마치 햇볕에 선 눈사람과 같이 녹아 버려서 그 부피 크던 몸뚱이가 더러운

흙 한 줌이 되어버림을 깨달았습니다.

우러러 사모하는 혜련 아가씨. 이 발견이 내 일생에 어떻게 큰 사건입니까. 다만 내

일생의 방향 전환이란 말만 가지고 될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몸이 난 지는 이십 육

년이나 되었지마는 이 혼이 난 것은 바닷가에 선 당신의 앞에서입니다.

이제 와서는 당신을 감히 내 품에 넣겠다는 생각은 영영 없습니다. 그것은 크게 외람

된 생각입니다. 도리어 이 몸이 당신의 품속에 들고 싶다는 원뿐입니다. 감히 당신을

내 아내로 삼겠다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당신을 모시겠다는 생각뿐입니다. 신령한 길

을 가르쳐 주신 스승으로, 은인으로 당신을 모시겠다는 생각뿐입니다.

혜련 아가씨. 지금 생각하면 나는 인생을 한 동물로 보았었습니다. 다윈의 말과 같이

생존을 경쟁하는 이기적 투쟁이 곧 인생으로 보았었습니다. 남을 사랑한다든가 남을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린다든가 하는 것은 한 허위가 아니면 아름다운 말에 불과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세례를 받은 예수교인인 내가, 주일 학교의 선생 노릇까지 하는

내가, 방학이면 전도 여행까지 하던 내가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실로 놀라운 모순입

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나는 천사이신 당신의 앞에 경건하게 자백하지 아

니할 수 없습니다. 나는 위선자였습니다. 나는 양의 껍질을 쓴 이리였습니다. 이리만

도 못한 개였습니다. 회 칠한 무덤이었습니다. 속에는 이기적인 모든 더러운 것을 품

고서 겉으로는 가장 예수교인인 체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제ㅡ 그것은 큰 은혜입니다ㅡ 당신을 통하여 내게 비치인 하늘빛으로 말미

암아 내 가면은 벗겨졌습니다. 나는 참회의 제단 앞에 섰습니다. 내 참회를 받아 주시

고 내 머리에 손을 얹어 나를 축복해 주실 제사장은 다른 아무런 이도 아니요 오직 당

신입니다.'

 

춘원 이광수 선생의 '애욕의 피안'에서 옮긴 것이다. 이 소설의 여주인공 혜련을 사귀

려고 무던히 애쓰는 임준상(대학생이며 혜련과 같은 교회 교인임)이 김 장로와 그 딸

혜련 일행의 원산 해수욕장까지 따라와서 구애하나 별 성과가 없어 안달한다. 준상의

심정을 그린 이 편지는 작가 춘원이 대신 써 준 연애편지인 셈이다. 춘원의 아름다운

수식으로 문체가 화려하다.

 

아버지 김 장로가 60을 바라보는 나이에, 중환으로 자기 부인이 죽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자기 딸과 한 반에 있는, 함께 보살피는, 한 식구 같은 고아인 여학생 문임에게 처녀 장가 가고 싶어서 딸에게 중신하도록 하는 마당이. 아버지조차 저 모양이라 세상 남자를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비관한다. 이처럼 혜련은 인생 허무를 뼈저리게 느낀다. 이런 마당에 준상의 연애 감정이 혜련에게 먹히지 못한다. 누구의 사랑도 혜련에게는 미치지 못하고 존재 의미를 잃고 혜련은 자살한.

 

작가가 그린 작품마다 독자의 마음이 유별나게 꽂히는 장면이 있다면, 관광 명소라 도 관광객에 따라서 시선이 꽂히는 곳이 다를 수도 있듯이, 아마 이 작품의 명장은 이 편지다.

 

그런데 이 편지를 쓴 작품상 인물이 실제 세상에서라면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랑을 수스럽게 저렇게 주절댈 수 있을까도 싶을 만큼 작가가 필력을 과시한 것이 아닌가 다. 왜냐하면, 실제 상황에서는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이 상대방만 스쳐도 벙어리 냉가슴인데 홍수처럼 말을 퍼부으니 말이다. 아니면, 작가가 작중 인물인 임준상을 대신해서 그의 연정을 풀어놓은 마당이라 그런 것인지. 또는 이 작품에서 준상의 사랑은 결국 작업에 임하는 사랑 공세가 입에 발린 사랑인지 의심하게 한다. 

 

다시 작품에 돌아가면, 임준상이 잘못 선택한 사랑에 겨눈 화살이라 비록 성공한 연애편지는 아닐망정 읽을 맛이 난다. 혜련처럼 유별난 처지의 여성이니까 그렇지, 웬만한 여성이라면 이 편지에 넘겨 박히지 않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 노련한 편지 씨를 뒤늦게 접하니 세이 너무 지난 아쉬움이 있다고 하면 난봉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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