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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증맞은 신발에 감도는 환상(幻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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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서 거라지로 열리는 문을 열자 신발장 위에 호젓이 놓인 신발 한 켤레, 전체적으로 흰색인데 신발 바닥 가까이 옆에 빨간색 고무를 덧붙인 앙증맞고 도톰한 운동화, 2살 어린이의 신발이 다부지고 튼튼하게 보인다.


손자가 활짝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반갑게 나에게 덮쳐 안기려는 기세, 어쩌면 신발만으로 그 손자의 모든 표정을 나는 끌어낸다. 영리하고, 좋고 나쁨을 명백하게 밝히는 직선적 성격의 어린 왕자! 더구나 관심이 없으면 눈도 맞추지 않는 손자의 결연함에 손자가 매정하다.


특히 내 안식구가 그 꼬마의 환심을 사려고 부지런히 몸부림치나 어떤 때는 손자의 속마음을 잘못 짚어 맥이 풀린다. 우리는 그저 손자를 위한답시고 요란하다. 그러면서 우리는 미련할 정도로 다시 사랑의 성을 쌓지만 그것이 힘없이 내려앉을 때는 야속할 뿐이다.


손자를 키우는 재미가 자식을 키울 때보다 훨씬 좋다고 하는 말을 주위에서 들은 적이 있다. 과연 그렇다. 더구나 내 나이 70 가까워 얻은 첫 손자니, 남들이 가져보지 못한 손자처럼 애지중지할 수밖에 없다. 우리 내외가 살 맛 나고 행복을 퍼올리도록 하는 마스코트가 손자다.


어린이집에 매주 3차례 다녀, 저보다 큰 어린이 틈에서 지내다 보니 한 주일이 다르게 말을 더 잘한다. 주 한 번 우리 집에서 만나면 무슨 할 말이 많은지 우리는 알아듣지 못하는 영어를 하여 우리 자신이 듣기 어려우니 제 아비가 통역한다.


우리 집 뒷마당 저편 내려앉은 평지에 유실수, 채소류가 퍼져 있는 사이를 손자가 지나서 알토마토 덩굴에 이르면 알토마토를 재촉한다. 안식구가 그것을 까서 입에 넣어주기 바쁘게 서두른다. 그러니 밥을 먹지 않고 멀리한다. 이것이 우리 안식구가 겪는 시집살이 같은 거다.


내 손자만 그럴 리야 없을 테지만 호기심이 많아 눈 닿는 데마다 손대고 바쁘게 움직이니 안식구가 한눈팔 겨를이 없다. 기우는 우리 인생에 사랑과 활력의 불꽃을 짚이는 손자 때문에 안식구는 우울증을 떨쳐낸다. 손자가 우울증 치료원()이다.


나가기 좋아하는 손자는 대개 밖에서 뛰기도 하고 두리번거리다 물 호수를 보면 밭에 물을 뿌려준다. 그러다가 손자가 '할머니, 할머니, 할머니 가든, 굿 가든(good garden)' 하고 말하면, 뒷마당에 나무나 채소밭 쪽으로 발길을 옮기거나 탠저린 따먹겠다는 의향이다. 귀엽고 영리함이 묻어나는 정경이다.


얼마 전에 이사하는 집에서 주고 간 다 큰 흰 토끼 한 마리를 들여 놓았다. 어린이가 동물을 좋아하니까 손자에게 보여줄 토끼 때문에 우리 내외가 들떴다. 역시 손자가 보더니 다짜고짜 토끼 집을 열어 끌어안고 좋아서 얼굴을 비비며 어찌할 줄 모른다. 이번에는 제대로 손자의 마음을 짚었다.


그러나 요새 토끼도 손자에게 한물갔다. 토끼에 대한 손자의 애정이 식어가니 우리 내외는 고민이다. 하루는 며느리 말이 손자가 바이올린에 관심을 보이더라고 하여 어떨지 몰라 우선 헌 바이올린을 샀다. 어린이용을 준비해야 하는데 우리가 그걸 몰랐다. 바이올린 자체가 대체로 작으니까. 앞으로 몇 년이 지나야 바이올린 구실을 할 테지.


뒷마당에 가거나 토끼가 눈에 보이면 손자의 모습이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아른거린다. 그러다가 내 눈이 허공에 머물면, '이게 늙는다는 건가?' 한다. 다시 손자가 벗어 놓은 신발을 이리저리 보고, 손자의 이런저런 몸짓, 표정을 떠올리며 나는 미소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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