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부인의 행복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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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아들
8/24/2016
아침 식사를하며 전국 노래자랑의 MC 로 활약하는 89세의 송해선생 을 보며
나는 부러운 마음이들었다.
나는 요새 무릅이 아파서 걷는것이 불편한데 잘걷고 일하는
송선생이 노년에 자신있게 사회 활동하는 것이 존경스럽고 부러웠다.
부인이 하는 말
“ 저사람 불쌍해!
느닷없이 내뱃는 부인의 말에 "아니왜?"
아들 하나 뿐이 었는데 젊은 나이때 죽었대” 쯪 쯪….
나는 마음속으로 그까진 아들이 머 대사라구......
부인의 오랜 이민 사십년 친구 중에 마흔 세살의 외아들, 아직 장가도 안간 아들이 심장마비로 죽었다.
어린 애기때부터 한동리에서 알던사이라 내자식이나 다름 없다며 슬픔을 같이했었다
장례식후에 두주일이나 반찬을 만들어 매일 날라다 주었다
같이 슬퍼하던 일이 불과 석달전이다.
우리에게도 마흔살 아들이 있다 죽은 친구 아들에 친구였다.
아들이 고삼때 고등학교를 졸업하게됬을 때다.
학교에 조퇴를하거나 결석을 한다는 것이다
학교 인장도 없는 졸업장을 받았다.
결국 군대에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고 일년은 국내에서 일년은 한국에서 복무하고 명예제대를 했다
제대후 일년만에 이락전쟁이 터졌다
다시 불려 전쟁터에 가게됬다. 전쟁의 포화속에 외아들을 보냈으니
어미의 마음은 얼마나 초조했으랴!
나는 가끔 다리한쪽을 잃은 아들이 목발을 집고 집에 들어서는 꿈을 꿨다.
아들이 죽지않기를 열심히기도했다
전쟁이 빨리 끝나길 기다리며 아침 저녘 매일 “ 콧물 눈물범벅기도”를 했다
다행이 일년 복무를 끝내고 두다리가 멀정해서 돌아왔다.
못마친 대학을 다시 진학 했다. 물리치료사가 된다던 아들의 꿈
졸업자명단 “ 물리치료사” 난에서 찿을수 없었던 아들의 이름
결국 찿은 것이 “체육과”에서 이름을 찿았다
나의 첯 물음이 “이런 전공으로 무얼해 먹고사냐?”
또 직장을 찿는다며 집에서 놀기를 일년
운좋게 지금에 며눌이의 구제로, 결혼을 하고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됬다.
힘들게 구한 직장 그런데 바로 다음해에 직장 상사와의 불만으로 사표를내고
불과 한달만에 다시 새 직장을 옮기며 스트레스를 무척 받았다
속이 상한끝에 부부싸움으로 번지면서 며눌이가 애둘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두손이 닭도록 빌어서 겨우 돌아온 식구들
결혼하면 그것으로 아들 땜에 속썩는 일이 끝인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였다.
부인이 내손을 잡으며 “우린 자식이 있어 행복하지? “
“속썩이는 아들이 죽은 자식보단 났지?”
그래! 그렇킨 하네!.
아들이 살아 있으니 행복하지!
죽은 아들 불알 만지기보단, 속썩이는 산 아들이 낫고 말고!
아침 밥상은 화기 애애한 밥상이였다.
기도문: 아들을 살아있게 해주셔서 감사함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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