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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예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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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여태껏 이중섭을 알지 못했을까? 진즉 그를 만났더라면, 비록 매체를 통한 간접 체험이기는 하지만 그의 그림을 함부로 대하거나 건성으로 보아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삶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꼈을 텐데, 참으로 아쉽다. 이제라도 그의 예술세계를 공부할 동기를 얻었으니 천만다행이다.


엄광용님이 쓴 <이중섭, 고독한 예술혼>을 읽는 동안 손에서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칭찬이나 비난으로 그의 빛을 과장하거나 가리지 않아서 좋았다. 단순담담하고 중립적인 문체가 이중섭의 찬란한 예술혼을 고스란히 느끼게 해주었다. 독자가 감동으로 한숨을 쉴 수 있는 여백을 마련해 준 점도 고마웠다.


하기야 어느 누가 이중섭 평전을 쓴다 해도 대동소이하리라. 이중섭은 그냥 이중섭이니까. 수식할 필요 없이, 덧붙이거나 뺄 필요 없이,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만 해도 절절하고 불꽃같은 에피소드를 수없이 생산했던 인물이니까.


이리도 따뜻한 사람이었구나 싶으니 그의 그림 어느 것이든 볼수록 정겹다. 이중섭의 예술은 가족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에너지 삼아 빚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일본인 아내 이덕남, 그리고 두 아들. 그들은 그림 속에서 손가락이든 발가락이든 끈이든,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가족만이 나눌 수 있는 교감과 소통이 시각적으로 선명하다. 발가벗은 살과 살이 서로 닿아서 동글동글 한 덩어리로 뭉쳐있는 우주. 사내아이들의 엉덩이 선이 그지없이 매끄럽다. 사랑은 이렇게 둥글고 이렇게 부드러운 것이다. 굵고 거친 선과 격심한 감정이 그대로 살아있는 원색마저 그의 외로움과 고통을 대변하건만 참 따뜻하다.


천재는 절로 출현하는 것이 아님을 다시 확인했다. 이중섭의 예술을 알아보고 그의 곤궁한 말년을 피붙이처럼 보살핀 동료 예술인들이 있었다. 이중섭의 맑고 천진한 인간미가 경쟁과 질투의 감정을 녹이고 아낌없는 사랑을 베풀게 한 근원이 되었으리라. 같은 장르의 예술가들이 서로를 아껴주고 배려하는 마음이 감동적이다.


사랑이라는 표제를 달고 있는 두 점의 은박지 그림에 경탄했다. 마주보고 앉은 자세로 자신의 팔과 다리를 상대방의 어깨와 다리 위에 얹어서 얼굴과 얼굴, 가슴과 가슴, 입술과 입술이 맞닿아 엉켜있는 그림. 선들이 어찌나 섬세하고 표정이 얼마나 생생한지 전율이 난다.


그가 지은 시, ‘소의 말을 가만히 음미한다. 그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소는 얼마나 행복한가. 이중섭과 소는 숨결과 성정이 서로 닮았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이라는 시구에는 비운의 조국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는 고뇌가 절절하게 녹아있다. 지난한 생활고로 인하여 두 아들과 아내를 일본으로 떠나보내고 기러기 아빠의 삶을 살다가 홀로 병든 삶을 마감한 이중섭. 얼마나 쓸쓸했으면 사람이 들어간 모든 그림에 자기 자신을 그려 넣었을까.


며칠 동안 몸살과 맘살을 했다. 치열한 예술, 진실한 예술가에 대한 존경과 연민이었다. 좋은 작품에는 작가자신이 먼저 감동할 만한 요소들이 담긴다. 이중섭과 소의 관계처럼 한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탐구가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다.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6년 6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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