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개의 지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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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3천 미터 산정의 마운틴 볼디에서 트레킹을 했다. 자갈이 많고 경사가 심하여 자존심이 센 산. 작열하는 태양과 칠흑 같은 안개구름, 날카로운 눈비가 예고 없이 찾아오고 사라지는 곳.
산행은 산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일. 산의 속살을 들여다보는 일. 산에 오르려면 반듯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산행의 유익을 자아성숙이니 내면의 강화니 인식지평의 확장 등의 단어에 한정시키는 것은 산에 대한 결례이다. 마음 문을 열기만 하면 놀라운 선물이 무궁하게 쏟아져 내린다.
두 개의 지팡이에 의지하여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처음에는 지팡이 사용법을 몰라 난감했다. 균형을 잡아주기는커녕 무겁고 거추장스럽기만 했다. 작심하고 아기가 걸음마를 배우듯 지팡이와 함께 네 다리로 걷는 법을 배웠다. 지팡이는 어느새 덧붙여진 두 다리와 두 발처럼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가파른 길에서는 두 지팡이를 동시에 움직여 플러스 알파의 힘을 얻었다.
한 걸음씩 미리 나가서 앞길을 예비하는 지팡이. 미끄러운 길에서는 아이젠, 경사진 길에서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내가 지팡이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지팡이가 나를 이끌어주는 느낌이었다. 지팡이를 앞으로 내딛으면서 지금까지 내 생애에 지팡이가 되어준 사람들을 생각하였다.
네 개의 다리와 발로 걷노라니 평안한 기쁨이 차올랐다. 그랬다. 네 발로 짐승처럼 기었던 유아기 때 나는 가장 행복하고 순수했을 것이다. 그 이후로 지금까지 네 발로 걸은 적이 거의 없다. 두 발로 직립하면 두 손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다는 논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하, 자유로워진 두 팔과 두 손으로 할 일이 있다. 쓰러진 이웃을 일으켜 세워주고 따뜻하게 다독여주는 일.
깊은 골짜기에 홀로 서있는 집 한 채를 만났다. 별장이 아니라 상주하는 집임을 채마밭이 말해준다. 뒤뜰과 맞닿아 있는 산등성이에는 크고 거친 바위들이 언제든지 굴러 떨어질 듯 위태하게 걸려있다. 집주인은 그 무엇이 두려워서 이곳에 보금자리를 틀었을까? 인간들이 짐승들이나 산사태보다 더 무서운 것일까? 이들 가족이 세상에서 당했을 상처를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따뜻한 피를 가진 사람들이 아닌가.
혼자 힘으로 살 수 없다. 얼굴도 모르는 이가 수확한 곡식과 채소를 먹고,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만든 옷을 입고 산다. 캄캄한 사막길을 달릴 때 스쳐지나가거나 뒤따라오는 자동차가 비추는 불빛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 위로가 되었던가. 곁에 사람들이 있어서 때로 몸살을 하기도 하지만 그들이 있기에 삶이 외롭거나 두렵지 않다.
뒤돌아보면 정말이지 내 힘으로 살지 않았다. 삶의 고비마다 누군가가 다가와 지팡이가 되어주었다. 신비로운 도움을 받은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산에서 내려오니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형용하기 어려운 기쁨이 차오른다. 산이 준 에너지일 것이다. 아픈 두 다리 옆에 놓인 지팡이 두 개를 바라본다. 말없고 생명 없는 것도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킨다. 하물며 생명이 있는 사람이 생명이 있는 누군가에게 넉넉히 지팡이가 되어줄 수 없겠는가.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6년 5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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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李寧熙님의 댓글
李寧熙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지팡이의 기능은 힘을 실어주는 것과
길잡이의 도구이기도 하다
인생 행로에서 필요한 두 개의 무형의 지팡이,
그것은
논리적인 사고를 가진 좌뇌의 지팡이와
감정 직관을 관장하는 우뇌 지팡이
이 둘의 지팡이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그 역할은 물리적인 지팡이에 비해 엄청 크다고 할수 있다
어느 한 쪽의 지팡이가 길거나 약하면 균형을 잡기 어려워
불편하고 무용지물이 될수도 있을 것이다
논리적이고 이성적 사고와 감성적이며 창의성의
두 지팡이를 균형있게 사용한다면
험한 인생길은 더욱 원만하고 행복한 여정이 되리라 믿는다
하정아 선생님의 논리적이고 말랑말랑한 두 지팡이가
독자들의 감동을 자아내는 훌륭한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장도경님의 댓글
장도경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론의 싻난 지팡이처럼
하정아님의 지팡이가
지나온 날들에 만났던 사람들의 모습으로 싻이 핀다.
글의 힘은 그런 것임을 다시 한번 이 글을 통해서
배우게 된다.
글의 길이가 조금더 길었더라면 지팡이 끝에는 필시
예수의 얼굴이 싻으로 필 요량인데...
뜬금없이 이 영희 선배님은 좌뇌와 우뇌로
지팡이를 갈랐다.
하정아님의 지팡이와 이영희님의 지팡이가
나의 오른쪽과 왼쪽을 내려치는데
그 순간
나의 지팡이에도 지난날의 온갖 얼굴들이
싻이 되어 핀다.
지팡이 없이는 갈 수 없는 이 세상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그 지팡이
없었다면 만날 수도 없는 예수를지
지팡이를 보고 생각하며...
하정아님의 댓글
하정아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2016년 6월 교회지남 권두 수필
두 개의 지팡이
하정아
사람의 팔과 손이 다리와 발이 될 수 있다.
두 개의 지팡이만 있으면.
허리를 굽히거나 손바닥을 땅바닥에 댈 필요가 없다.
해발 3천 미터 산정의 볼디산 중턱, 그린하우스까지 트레킹을 했다.
자갈이 많고 경사가 심하여 자존심이 센 산.
작열하는 태양과 회오리치는 폭풍,
정수리를 칠 것 같은 천둥번개와 칠흑 같은 안개구름,
날 세운 눈비가 예측할 수 없이 찾아오고 사라지는 곳.
두 개의 지팡이에 의지하여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연장된 두 다리와 두 발은 내 몸의 일부처럼 유연했다.
좁고 가파른 길에서는 두 지팡이를 동시에 옮겨
일(1)과 일(1)을 보태면 이(2)와 플러스알파가 되는 힘을 얻었다.
한 걸음씩 미리 나가서 앞길을 예비하는 지팡이.
미끄러운 길에서는 아이젠, 경사진 길에서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지팡이를 앞으로 내딛으면서 예수님을 생각하였다.
아프고 피 흘릴 때 나를 업고 걸어주신 주님.
오늘은 나의 두 다리가 되어주셨다.
짐승처럼 네 발로 걷거나 기면서 살지 않게 해주신 예수님.
두 발로 직립하게 하심으로 두 팔을 자유롭게 해주신 예수님.
아하, 이 두 팔과 두 손으로 할 일이 있었구나.
넘어진 내 이웃을 따뜻하게 일으켜 세워주고 다독여 주는 일.
오늘 나는 네 개의 다리로 걸었다.
예수님과 함께 걸었다.
예수님은 두 개의 지팡이가 되어 나와 동행해 주셨다.
나는 “지팡이를 의지하는 자”(삼하 3:29)였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시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