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료제가 된 하나님의 말씀 - 우울증, 자궁근종, 고혈압, 치질 치유 체험 간증!!!(최차순 원장의 벧엘 수양원)
페이지 정보
본문
불교 신자인 가정에서 자라고, 교육 받고, 살림 배우다가 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다니므로 해서 핍박이 심했고 그러한 집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결혼을 하기로 결심했지요. 하루 세 번씩 기도를 하던 중 캐나다에서 온 남편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77년도에 캐나다로 건너갔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걸 그저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열성을 가지고, 맡겨진 일에만 열심히 하는 건 줄 알았습니다. 이민 생활 15년 되면서 미국으로 건너와 직업까지 바꾸게 되었습니다. 치과기공을 하면서 열심히 살던 중 예전과 다르게 몸에 이상이 있음을 느꼈습니다. 피곤하고 지치고 짜증이 많이 나면서 교회 일은 점점 부담스럽고 짐 덩어리가 되는 게 모든 일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건강 진단을 받아보니 갑상선, 골다공증, 자궁근종, 헤모글로빈 저하증, 우울증, 고혈압, 치질, 백혈구 적혈구 수치가 낮아지는 증세까지 보였습니다.
약 처방을 받았지만 이 약을 다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42살이라는 나이에 이 약을 다 먹는다는 건 참으로 나에게는 슬픈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약들을 평생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자궁근종으로 하혈이 심해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두 번을 수술해서 애를 낳고 두 번 자궁 외 임신으로 수술한 상태 여서 정말 더 이상 살아갈 힘이 나에게는 없었습니다. 잠을 자려면 통증으로 2-3시간 애를 쓰다 잠이 들고, 잠이 안 오면 별 생각이 다 들고... 그리고 제 일에도 큰 영향을 미쳤지요. 뒷골부터 두통이 오면서 그것이 이마 쪽으로 까지 퍼지는 게, 날이 밝아 눈을 떠도 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증세가 나타나 작업 할 이빨이 보이지가 않아서 일이 안 되는 겁니다.
그러다 어느 날 바람 빠진 풍선이 주저앉듯이 에너지가 소르르 빠져 내려가 주저앉았지요. 그때 간 곳은 보험이 없었기에 한의원 이었지요. 진단 결과, 기가 다 빠져나갔으며, 우울증이 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숨을 돌린 후 저는 깊이 생각을 하기 시작했지요. 죽음이라는 것이 나에게 어쩌면 빠르게 올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믿는 사람으로서 본향이라는 곳을 나는 갈 수 있을까? 구원을 얻기에 내가 합당한 사람일까? …
이러한 생각들이 들면서 성경책을 펴놓고 나를 진단해보기 시작했지만, 확신이 없었습니다. 육체적 뿐만 아니라 영적인 상태를 바라 봐도 정말 희망이 없다는 걸 알았을 때 극심한 실망과 좌절을 느꼈습니다. 교회 다니므로 해서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교회 다닌다고 남편에 대한 모든 것도 내가 참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혔던 지난 세월… 그냥 교회를 포기하고 내 마음대로 세상에 나가 살고 싶어 교회를 1년 동안 나가지 않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가지고 있는 사고방식에 세상과 어울리지도 못했지요. 자녀를 생각해도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막막하고…
앞으로 전진할 수도, 뒤로 물러 설 수도, 하늘로 솟을 수도, 땅으로 꺼질 수도 없는 정말 영적, 육체적, 정신적으로 병든 상태에서 어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내 손으로 인생을 끝내리라는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지요.
그러던 중에 교회에서 최차순 원장님 건강 세미나가 있다는 소식에 하루 시간을 내어 한 번 가보게 되었습니다. 마침 제가 간 시간에 그분의 간증담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나보다 먼저 걸어 나온 비슷한 환경과 인생의 선배이며 신앙의 선배라는 생각이 들어서 상담을 받게 되었습니다. 나의 가슴을 친 한 마디가 있었는데, “자매님은 예수님을 만나야 살 수 있습니다.”라는 거였습니다. 그러고는 남편과 의논을 하고 열흘을 시간 내어 이 기회가 예수님을 알 수 있는 기회라 결심하고는 열흘 환자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2001년 6월 말이었어요. 하루 세 번 강의를 들으며 3일 째 지내면서 나는 너무나 꽉 막혀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이왕에 죽을 거 십자가에 가서 죽으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날 밤을 꼬박 새면서 야곱이 씨름한 씨름을 했습니다. 뒷날 아침강의에서 최원장님은 요한복음 1장을 펴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
저는 그 말씀에서 빛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락 끝, 발가락 끝까지 온 전신에 전류 같은 게 흐르는 걸 느꼈으며 몸을 가눌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30년 동안 의문으로 풀리지 않았던 성경이 쫙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날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진통제, 신경 안정제, 호르몬제 역할을 하면서 나의 망가진 몸과 마음의 수술은 시작되었습니다. 도저히 회생 불가능했던 나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나에게 새 생명을 주셨으며, 재창조 해주시는 창조주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은 나를 놀라게 했으며 그것은 말로 다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 되었습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 하시는 말씀이 이제야 이해가 되었으며 경험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인 것은 알았지만 가슴으로 믿어지지가 않으니까 고통스러웠던 세월을 산 것이었습니다. 매일 매 순간을 하나님의 말씀인 영적 양식을 먹지 않으면 저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으며 그 말씀의 능력으로 부부회복, 자녀회복, 가족회복, 친구회복, 건강회복, 신앙회복 이 모든 것이 정말 우리 예수님 안에서 다 회복된 것입니다.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궁무진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이 너무 감개무량 합니다.
시편 19장 7, 8절은 저의 삶에서 이루어진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내 눈을 밝게 하도다”
이러한 경험 속에서 나의 진통은 사라져 지난 3년 동안 전혀 다시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자궁근종은 사라졌으며,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의 사랑의 극치에 도달할 때 호르몬 분비를 느꼈습니다. 건강 식생활을 하니 고혈압은 내려갔고 치질도 없어졌지요. 눈도 점점 정상으로 돌아왔고 심하게 앓던 우울증 또한 말씀을 보면서 기쁨 중에 살므로 사라지는 것을 느낍니다. 두통은 온데간데없이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내가 태어난 이유와 왜 살아야 하는지 목적을 찾았고 삶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여 나의 남은 인생 얼마간의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주님께 드리기를 지금도 갈망합니다.
- 이전글은혜충만한 최차순 원장님의 벧엘 수양원 암 환자들, 당뇨병 환자들, 여러 환자들 치유 체험 간증을 읽고~~~ 16.04.23
- 다음글님아 이 강을 꼭 건너야 하오 3_네 이웃을 네몸같이 사랑하라는 뜻이 16.04.21
댓글목록
정무흠님의 댓글
정무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제1장 - 치유 사례담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출 15:26)
축복 받은 자
저는 광주에서 왔습니다.
중병을 가지고 온 것은 아니었습니다. 약간의 위장병이 있었지만 심신이 고단해서 어떤 분의 소개로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와 보니 이곳은 초교파의 모임이며 오직 성경만이 가르쳐지고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시는 곳으로 복음의 산실이었습니다.
저는 이곳에 와서 세 가지에 반했습니다.
첫째는 너무 아름다운 자연 환경에 매료되었습니다.
아늑함이 밀려오더군요.
두 번째는 최상의 웰빙 음식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먹는 것을 배제 할 수 없잖아요.
마지막으로 더욱 놀라운 것은 최원장님의 강의 말씀이 너무나 살아 있어서 제가 많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저는 천주교 신자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기는 하였어도 흔히들 말하는 발바닥 신자에 불과했습니다.
매일 아침 저녁 들려오는 신선한 메시지를 듣고 있으면 한 시간이 어느새 흘러가 버렸습니다.
며칠만 쉬었다 가려고 왔으나 몇 주를 있게 되면서 내 마음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마음을 시로 한 번 표현해 보려고 합니다.
축복 받은 자만이 이곳에 올 수 있다
섬진강 굽이돌아
산기슭 돌아 서니
주님의 품으로 감싸 안은 듯
아늑함이 밀려오는 언덕 위 벧엘의 집
온갖 꽃향기 풀 향기가 고단했던 심신을 달래고
사방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 소리는
하나님께서 태초에 주셨던 에덴의 동산이련가
아침을 열면 신선한 공기와 햇살, 물과 바람과 흔들리는 나뭇잎
들려오는 생명의 메시지 그 말씀 속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고
하나님의 숨결이 살아 있다
삶과 죽음의 갈등 속에서
흔들리지 않는 모습으로
잃은 자가 얻은 자를 위해 기도하고
없는 자가 있는 자를 위해 축복하는 곳 벧엘의 동산
난 누구를 위해 아파했던 날들이 몇 번이나 있었던가
매미가 긴 잠에서 허물을 벗고 탈바꿈 하듯
새벽이 캄캄한 밤의 어둠을 걷히듯
가슴 속 저 깊은 곳에 꽉 닫혔던 무거운 벽들이
조금씩 아주 조금씩 허물어지고
아직 거듭난 삶이 아닐지라도
새로 피어난 꽃잎이 아닐지라도
아! 나도 막차를 타고 온 손님이 되어
축복 받은 자만이 올 수 있는 이곳에
초대됨을 감사드린다.
재발성 구내염
저는 경기도 남양주시에 살고 있으며 나이는 60세이고 지역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간증을 할 만한 대단한 병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병은 나에게 너무나 무거운 짐이기에 병을 낫게 하기 위해 병원치료는 물론 한방, 기타 방법을 다 시도하였지만 낫지는 않고 마음과 육신은 시들어 갔습니다. 제가 앓고 있는 병명은 병원에서는 ‘재발성 구내염’(자가 면역증)이라고 합니다. 이 병이 심하면 ‘베쳇트’라는 희귀병으로 바뀔 수 있으며 이 병은 정말 무서운 병으로써 각종 장기에 염증을 일으키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또 입안에 염증이 한곳에서 오래 생겨 있으면 암으로 변하는 고약한 병입니다.
이 병은 처음에 아주 작게 시작하여 그저 식사하기가 약간 불편한 정도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커지고, 염증이 생기는 주기도 빨라져서 크기가 쌀 한 톨 크기에서 나중에 제가 이곳에 올 때는 1원짜리 동전 크기가 되어서 통증의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염증의 발생주기도 처음에는 병원 약으로 2, 3일치의 약으로 치료가 되더니 시간이 지나면서 5일, 일주일, 열흘, 보름, 이제는 한없이 항생제를 먹어도 낫지는 않고 입안에 돌아다니며, 위에 아래에 잇몸에 입천장에 어디든지 상처가 나고 염증이 생기고 또 염증이 생기면 동반되는 무기력증은 정말 나의 육신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었습니다. 통증은 어떻게 진통제의 도움으로 약간이라도 완화 시킬 수 있지만 무기력증은 어떻게 도리가 없었습니다. 몸의 무게가 천근은 되는 것 같고, 그러니 누울 수밖에 없고 그렇게 되면 며칠이고 못 일어나고 염증이 나아지면 무기력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지고, 다시 다가오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몸이 이러니 생활 여러 곳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 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만족스럽지 못하고, 어떤 계획된 일을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나 대인 관계에서 세우는 계획이 지켜지기 어려울 때가 많으니 삶에 짜증이 나고 신경질을 부리게 되고 부정적 생각에 노여움을 잘 타는 사람으로 변하였습니다.
이러한 세월이 어느덧 20년이 흘러 지금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정말 생각조차 하기도 싫은 시간들이었습니다.
입안의 혀가 통증으로 심하게 아프면 차라리 그곳을 도려내고 싶은 생각이 드는 때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염증이 생겨서 낫지 않고 보름이 넘어가니까 이제는 조직검사를 해보라고 권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직검사를 하였습니다. 조직검사 결과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조직을 떼어낸 그곳이 문제였습니다. 두 바늘 꿰맸는데(조직을 떼어낸 곳) 사흘 정도면 나을 것이라고 말했었습니다. 그런데 낫기는커녕 심하게 덧나서 환부가 커지고 통증은 심해지고 병원 약은 이제 효과가 없고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습니다.
수준 높은 현대의학을 자랑하는 의술도 이 작은 염증하나 잡지 못하나 하는 답답한 생각이었습니다. 마음속에 절망과 좌절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고 동시에 심한 피로감이 엄습하였습니다. 정말 쉬고 싶구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런 곳이 어디 있을까 막연하였습니다. 저는 사실 교인으로써 건강기별을 알만큼 알고 어떻게 하면 마음에 쉼을 얻을 수 있는지 방법은 알고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하고 있는 음식물, 식사방법, 금식의 유익, 교육에 대하여 알고 있었지만 실천은 절충식으로 현미식은 하지만 백미도 가끔씩, 채식을 하지만 육식도 마다하지 않는 그러나 더 문제는 맛있는 음식은 많이 먹고 포만감에 빠져 버리는 과식을 하게 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신 사랑에 반응하여 자신을 내려놓는 지혜가 없는 그저 무늬만 성도요 교인이었습니다. 운동부족, 편식, 과식은 나의 건강을 여기까지 오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질병의 원인이 이런 생활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게도 깨닫지 못하고 그저 속으로 세상에 대고 불만을 터트리고 하늘에 불평을 하였습니다. 찾을만한 때에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았더라면 지금 이런 부끄러운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년을 나와 함께한 고통, 저는 이제 막다른 곳에 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막다른 곳에 서 있는 저를 버리지 않으시고, 이곳 벧엘수양원을 선택하도록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사실 이곳을 정하기 전에 집 가까운 어디에서 그냥 막연하게 쉬기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지금 생각해 봅니다. 제 인생에 세 가지 잘 선택한 것이 있는데 하나는 제가 사랑하는 아내이고, 두 번째는 삶의 도중이라도 신앙을 받아들여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게 된 일이고, 세 번째는 막다른 나의 인생길에서 벧엘수양원을 선택한 것입니다.
나의 몸과 마음을 회복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벧엘수양원에 참으로 감사합니다.
막상 이곳으로 결정하여 내려올 때 까지도 회복의 확신보다는 그냥 어떻게 해봐야지 하는 막연한 심정이었는데, 이 마음은 아직 내가 살아 있었다는 증거도 되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속에 살아 있으면 아무것도 되는게 없는데도 나를 버리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수양원 앞에 도착했을 때 나를 맞아주는 돌비가 있었는데 눈을 들어 바라보니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 한 구절에 나의 마음이 조금 풀어졌습니다. 포근함을 느꼈다고나 할까요. 그래도 등록을 마치고 원장님께서 “장로님이세요?” 하고 물으시는데 “장로는 무슨 장로요. 일도 못 하는데요”라고 하고 그냥 얼버무리고 말았습니다. 마음이 아직 풀어지지 않았습니다. 방 배정을 받고 처음부터 과일 식사를 하고 물 많이 마시고 말씀 듣고 잠자고… 2, 3일을 먹고 자고 먹고 자고 그렇게 했습니다. 어찌 그리 잠이 많이 오는지요.
삼일째 부터 움직여야 된다는 신호를 몸 안에서 받게 되어 움직이기 시작 하였고, 그때부터 입안에 통증이 조금씩 없어지고 염증도 작아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실 원장님의 아침,저녁 강의는 내가 어떻게 생활을 잘못하였는지, 알고도 실천을 하지 않았는지를 깨우치는 강의였기에 자신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부끄러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좀 더 깊이 있게 깨닫게 되었고 나를 위하여 죄인을 위하여 죗값을 지불하시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와 사랑을 확실하게 붙잡게 되었습니다. 이제 나의 무거운 짐이 조금씩 가벼워집니다. 사물이 조금씩 다르게 보입니다. 마음이 가벼우니 산책길의 발걸음도 가벼웠습니다. 지나간 삶 속에서 내게 짐이 되었던 가족 간의 문제, 교회와 세상에서의 얽힌 실타래가 풀어졌고, 힘들었던 문제들이 주마등 같이 마음에 지나면서 서서히 해결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쉽게 해결 된다는 것이 너무 놀라웠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무거운 모든 짐을 예수님 발아래 내려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정확하게 열흘이 되었는데 그 지긋지긋 하던 입안의 염증은 자취도 없이 사라고 흉한 흉터에 새살이 돋기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 나는 회복의 능력을 받은 것입니다. 육신의 회복은 물론 영의 눈을 뜨게 해 주셔서 영생의 소망까지도 확신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잠시 후면 오실이가 오시리니 곧 예수님 다시 오심에 대한 재림의 소망을 가슴에 확실하게 안고 저 하늘 도성을 바라보게 됩니다. 병을 고쳐주심에 대한 감사보다 영생의 소망을 확신하게 하신 은혜에 더 감사 하며 이 글을 마칠까 합니다. 예수님의 ‘네가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라는 말씀의 의미는 치유와 회복의 말씀이었습니다.
끝으로 벧엘동산에서 환자들을 위하여 생명의 말씀으로 도우시는 원장님과 봉사하시는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사구체신염
수양원을 떠나 온지도 벌써 한 달이 훌쩍 지나버렸네요.
고마우신 원장님과 수양원 가족 분들께도 모두 안부 전합니다.
사람이 한세상 살아가면서 사람을 만나는 것만큼 소중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인생을 따지고 보면 절반의 만남과 그 나머지 헤어짐이 아닐까요?
어떤 이유로 가게 되었든 수양원에 가게 된 것도, 많은 분들과의 만남도 다 하나님의 뜻인 것 같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 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 하시는 자는 여호와이시니라”는 잠언 말씀을 읽으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체험한 것 같습니다.
저는 50대 후반의 약도 먹을 수 없는 골치 아픈 병-신장이 고장 남으로 인해 잠도 거의 못자는 지경으로 벧엘수양원 프로그램에 참석했었습니다.
원장님이 지도하시는 대로 열심히 생활한 덕에 몸이 많이 좋아진 것 같다고는 느꼈지만, 불면증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기에 충분한 회복은 기대하지 않았었습니다.
다만, 피는 깨끗해졌겠다 싶고, 신장은 더 이상 나빠지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집으로 돌아와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더니 기대도 않았던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잠혈수치도, 콜레스테롤도 모두 정상이라는 것입니다.
정말 주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2011년은 제 생애에 있어 제일 중요한 해인 것 같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이 얼마나 커다란 행운입니까?
지금은 잠도 잘자고 건강하게 살고 있습니다.
좋은 음식과 깨끗한 환경, 주님을 알게 해 주신 원장님의 말씀...
이 모든 것에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
부산에서 권 OO 드림
나에게 와 주신 예수님
어디서부터 얘기를 시작해야 할까요. 전 이곳에 와서 엄청난 인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기적 같은 일을 저의 어설픈 글 솜씨로 어떻게 다 표현해야 할지 난감하기도 하지만 이 기적을 남들과 함께 느끼고 싶은 마음에 펜을 들었습니다.
저는 제주도에서 올라왔고 나이는 28살입니다.
이곳 벧엘수양원에 오기 전에 제 인생은 정말이지 엉망이었습니다. 항상 술에 찌들었고 방탕하게 살았으며 제 몸이 소중한줄 모르고 부모에 대한 공경이라곤 눈꼽만치도 없는 사람이었지요. 지금 생각해도 너무나 끔찍한 삶 이었습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이유는 제겐 마음의 병이 있었습니다. 쭉 이런 생활이 이어져 왔고 어느새 저는 침대에 쓰러져서 꼼짝도 못하게 되는 신세가 되었고 거의 1년 가까이 밖에 나가지 않고 집안에서만 폐쇄적인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제 체중은 130킬로가 되었고 건강에도 적신호가 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습니다. 전 이미 살아야할 의욕을 잃었고 왜 사는지 조차 알지 못한 채 죽지 못해서 사는 것이었으니까요.
이처럼 우울증이 아주 심했고 마음에 상처도 매우 깊었습니다. 앞으로의 삶도 아무런 희망도 없어 보였고 그냥 자고 먹는게 제 일이었습니다. 그런 제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저의 어머니가 성당에 다니시는데 그곳에 계시는 수녀님이 벧엘수양원이라는 곳을 소개해 주셨고, 전 너무나 집에서 나가고 싶은 나머지 어머니께는 살을 빼러 간다고 하고 도망치듯 이곳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벧엘수양원에 와서 혼자만 남게 되니 그 해방감이 너무나 좋았습니다. 전 다시는 집에 들어가기 싫었고, 이곳에서 살을 뺀 후 전 가족과 연락을 끊을 생각이었습니다. 그리고 혼자 살려고 했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살을 빼야하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전 첫날부터 물금식을 하였고, 거기에 만족했습니다. 처음에는 살 빼는 것에만 목숨을 걸었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한 번도 교회에 다녀 본적이 없었고 예수님에 대한 아무런 생각 없이 이곳에 왔기 때문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무척 어색하고 생소했습니다. 하지만 원장님 말씀은 너무나 듣기 좋았기에 거부감 없이 적응 할 수 있었습니다. 3일째 되는 날 저는 신약성경 마태복음, 마가복음을 보면서 예수님 말씀에 흠뻑 빠져서 원장님을 찾아가서 대뜸 교회에 다니고 싶다고 말했고 성경의 말씀대로 살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동안 너무나 방탕하게 산 제 삶이 후회스러웠고 그저 앞으로 남은 인생은 좀 올바르게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그것 말고는 다른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냥 그동안 엉망이었던 제 인생이 너무 힘들고 지쳤다고 할까요. 아무튼 무조건 그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 가장 최우선 할 일은 살을 빼는 것이었기에 금식도 하고 운동을 해야 해서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진 못했고 그 진도가 아주 느렸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대로 살고 싶다는 저의 마음은 점점 더 강해 졌습니다.
2009년 10월 7일에 들어 와서 22일을 이와 같이 지내는 가운데 2009년 10월 29일 바로 제 인생이 180도로 바뀌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오후 전 평소처럼 산책을 하였고 기도를 드린 후 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때 내 오른쪽 가슴으로 무언가 흘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고, 그 사랑은 인간의 언어로는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컸습니다. 그러한 사랑의 감정이 내 오른쪽 가슴으로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 왔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임재였고 난 그분의 권능 앞에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곤 제 안의 모든 죄를 보여주시는데 그 양이 실로 어마어마하였고 하늘을 덮을 듯이 보였습니다. 전 예수님께 울면서 빌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여 주십시오”
저 같은 죄인이 어떻게 아직까지 살아있을 수 있는지 믿을 수가 없었고 전 그저 예수님께 저의 죄를 통회하면서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 때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이 떠올랐으며 저의 죄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이 모든 일은 찰나에 일어났으며 그 동안 무수한 생각이 제 안에 나타났다 사라졌고, 전 울면서 그분께 충성을 다하리라 맹세 했습니다. 신기하게도 그분이 제게 오시고 나자 제 안의 악한 마음과 수많은 상처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짐을 느꼈고 너무나 감사하고 도대체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하는지 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전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었고 다음날 원장님을 찾아 갔습니다. 그리고 어제 있던 일을 빠짐없이 다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기쁘게 해 드릴 수 있을지 물었습니다. 그 날부터 3일 동안은 예수님만 생각나면 하염없이 울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한 가지 의문이 제 심중에 들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께서 저 같이 교회도 안다녀보고, 그분의 율법대로 살기는커녕 거의 반대의 삶을 살았던 저에게, 겨우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한지 한 보름정도 지난 부족한 저에게 그런 이적을 일으켜 주셨을까? 원장님은 대답하시길 제가 예수님께 마음을 열어서 그렇다고 했지만 그때까지 저는 그 뜻을 이해 못했고 예수님을 만난지 일주일 정도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었습니다. 바로 성경말씀대로 살겠다고 결심한 제 순수했던 마음이 제 자신을 버리는 행위였다는 것을 원장님 말씀을 통해서 깨달았습니다. 전 그렇게 제 자신을 버렸고 제 마음을 주님께 드렸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저의 그 마음을 봐주신 것 같았습니다. 저의 어떤 행위가 이러한 경험을 이끌어 왔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기 직전 저의 마음상태가 그러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예수님 믿어야 영생 얻는다 라든지 회개의 경험이 중요하다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 전혀 몰랐고 생각조차도 못해봤습니다.
전 그 일로 예수님이 우리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인자하신 분인지 알았고 그분이 우리와 기쁨과 슬픔을 공유하고 싶어 하신다는걸 마음으로 느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친구 같은 분이십니다. 그리고 저의 기쁨이고 생명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예수님을 너무 사랑하고 그 사랑 앞에서 술이나 우리가 사회에서 즐기는 그 어떠한 쾌락 따위는 하찮았습니다.
난 마치 세상의 모든 진리를 깨달은 것처럼 즐거웠습니다. 세상이 너무나 아름답게 보이고 날 태어나게 해주신 하나님께 너무 고마웠습니다. 내가 이렇게 숨을 쉬고 자연을 보고 물을 마시고 살아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했습니다. 내가 이곳에 이렇게 존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그분 하나님 덕분임을 깨달았습니다.
‘너무나 사랑합니다. 나의 아버지시여!’ 라는 외침이 내 마음속에 메아리쳤습니다. 기도를 드릴때도 매순간 ‘하나님, 예수님 너무나 사랑합니다.’ 라는 고백이 이어졌습니다. 전 더 이상 그분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습니다. 왜나햐면 전 이미 하나님 아버지께 모든 것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태어나서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 그분이 절 어마어마하게 사랑하신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전 평생 그분을 위해 살아도 다 갚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전 기도 할 때 저 잘되게 해주세요, 행복을 주세요. 저 살 빼게 해주세요… 이런 거 기도 안합니다. 당신의 종이 되게 해주세요. 당신의 율법대로 살겠습니다. 그 안에서 살 때에만 전 기뻐하겠습니다. 라고 기도 드립니다. 그리고 너무나 사랑한다고. 그분을 만나고 제 안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제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하다는 것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예수님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엘렌 G 화잇 여사의 시대의 소망을 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책을 읽고 있는 제 모습을 보시며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전 마음속으로 늘 예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숙소안에서 독서만 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전 사소한 일도 열심히 즐겁게 하였고 남들을 도와줄 때는 제 일 보다 더 열심히 하게 되고 그게 전 너무나 기뻤습니다. 전에는 청소가 이렇게 즐거운 일인지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작은 일도 놓치지 않고 열심히 하는걸 좋아하시고 남을 도우는 일을 좋아 하시기에 저 역시 그 일을 즐겼고 그분의 기쁨은 바로 저의 기쁨이 되어 제게 돌아왔습니다. 이미 제 안에는 살 빼는 일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너무 사랑스러웠고 우리 가족 모두가 진심으로 좋아졌습니다. 전 예수님을 만났던 밤에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사랑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만났다고 해도 전 완전무결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솔직히 저는 예수님을 만나고 조금 교만 했었습니다. 남들이 만나지 못했던 예수님을 전 만났고 일종의 엘리트 의식 비슷한 것에 빠져있었죠. 그런 제게 예수님께서 어떤 한분을 제게 룸메이트로 보내 주셨습니다. 그 분도 4년 전에 저와 같은 경험을 하신 분이었고 그 분을 만남으로서, 제가 막 태어난 아기와 같은 상태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죄를 용서받고 깨끗하여 졌지만 모든 유혹에서 승리한 의인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처음 제가 그런 감정에 빠져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너무 창피하고 예수님께 면목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비록 만났다고 하지만 제게 전지전능한 힘이 생긴 것도 아니고 그 전과 똑같은 무력한 인간 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전 제 자신을 반성하고 예수님께 기도 드렸습니다.
그분이 절 보고 얼마나 마음이 아프셨을까. 이 일로 인해 저는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려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생긴 변화와 힘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그 힘의 원천은 오직 예수님을 사랑하는 우리의 마음이 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다 보면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라는 이런 대목이 있지요. 이 말은 사람이 실천 할 수 없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절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그 말씀을 우리의 삶에 실천할 수 있습니다. 전 이미 벧엘수양원에 있는 모든 분을 사랑하고, 그 동안에 재산 싸움으로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던 친척들도 다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마음이 아직 완전하지 않고 미숙하기에 때때로 흔들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분은 절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남을 사랑하는 마음과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은 비례해서 커지게 됩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제 경험이 비추어 말하는 것일 뿐이지만 전 이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가끔 사람들이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보면 사회는 악한 세상 마귀 투성이라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많은 유혹과 쾌락에 타락하지 않도록 이론으로 완전 무장해야한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제 생각과 경험은 다른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무기는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사랑의 마음이야 말로 그 분의 율법을 지키게 만들고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 됩니다. 물론 이론도 중요하고 나 역시 지금 이론을 공부하는 중에 있습니다. 하지만 이론만 있고 그곳에 마음이 없으면 무슨 힘이 있을까요? 설마 우리가 마귀와 싸울 때 말싸움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제가 시대의 소망을 읽으면서 깨달은 것은 ‘그 많은 바리새인들이 이론을 몰라서 마귀에게 휘둘렸던게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기에 마귀에게 당한 것이다.’였습니다.
그에 비해 아무런 이론이 없었어도 창녀나 세리 같은 자들은 얼마나 그 분을 사랑하고 따랐던가요. 사도 베드로나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많은 탄압 속에서도 그처럼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흔히 말을 할 때 어머니는 위대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그것은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그분을 위대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원리라는 생각이듭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무기는 바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라고 저는 확신을 합니다. 그 사랑이 있기에 성경을 공부하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고 어떤 고난도 넘을 수 있는 용기를 그분께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아직은 제 자신이 너무 미숙하고 그 분에 대한 사랑이 이것보다 더 커져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두렵지는 않습니다. 전 예수님이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일만 허락하신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는 당신을 너무나도 사랑합니다. 당신의 사랑 앞에서는 제 생명조차도 바치겠습니다. 반드시 당신의 종이 되고 당신의 율법대로 살겠습니다. 제가 올바른 길로 갈수 있게 인도 하여 주십시오. 사랑하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벧엘수양원에서 만난 예수 - 유방암
올해 45세 된 나는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6학년 형제를 두고 있고 나를 많이 좋아해 주는 남편과 함께 분당에 살고 있다.
98년 38세 봄에, 근종으로 자궁을 들어냈고, 겨울에 유방암 3기 진단을 받고 우측 유방을 들어냈다. 그리고 심장이 있는 가슴을 뚫고 굵은 동맥에 카테터를 박고 힘겨운 항암제 투여를 99년 여름까지 마치고, 병원에서 하라는 대로 조금도 어김없이 성실하게 정해진 날짜에 검사하고, 약도 먹고, 치료에 응해 5년이 지났다. 현대의학에서는 5년이 지나면 완치로 본다고 했다. 완치라는 말을 100% 신뢰하면서 지내던 중 6년째 되던 가을에 몸이 이상함을 느껴 병원에서 여러 가지 검사를 했으나 아무 이상이 없다는 병원 측의 대답이었다. 그래도 내 몸은 이상했다. 갑자기 춥기도 하고, 몸살처럼 쑤셔오기도 하고...
겨울이 시작될 무렵 다시 병원을 찾았고 촬영한 결과 척추로 전이가 된 것이 잡혔고 그것은 한 달이 지나면서 골반까지 까맣게 퍼져 간 것을 두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혈액종양 내과에서 다시 항암제 투여를 3주 간격으로 시작했고, 난 예민해질 대로 예민해져 갔다. 또 다시 온 몸에 털이 다 빠지고 피부에 붉은 반점이 생기더니 진물까지 나오고 손톱, 발톱이 다 빠지며 6년 전 수술 후 항암제를 받을 때와는 다르게 부작용이 심하게 나타났다. 그런대로 넉달째까지는 견뎌낼 수 있었다.
5개월 째 접어들면서 난 걸을 수가 없었고 남편 앞에서 조차도 내 몸을 가려야 할 만큼 내 피부는 흉하게 변해갔다. 또 주위에 환우들이 항암치료로 고통하고 죽어가는 모습을 봐야 했다. 항암제 투여 2-3시간 전에 피검사를 하고 정상수치에 못 미치면 항암제 투여를 미루었다가 몸의 면역력이나 백혈구 수치가 회복되면 다시 항암제를 투여하는 일이 계속 반복 되었다.
병원 영양사가 1일 권장량의 식단을 칼로리에 맞춰 짜주면서 충분한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며 고기나 생선을 1끼에 적어도 한 토막 반 이상을 섭취하게 하는 단백질 우선의 식단과, 우유 및 유제품의 섭취를 강조 했다. 나는 성실하게 실천했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견딜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갔다. 5월에 도살장에 끌려가는 기분으로 항암제 투여를 했다. 그리고 6월 14일 화요일, 또 예약대로 항암제를 맞아야 하는 그때, 난 결단을 내렸다. ‘어차피 인간은 언젠가는 모두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내가 항암제 투여를 성실히 이행하지 않아서 생명이 설령 짧아진다고 해도 다시는 미련 갖지 말자.’
항암제는 기한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죽기 전에 한 가지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미술 공부를 하던 20대에 숲 속에서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다 보면 풀잎 하나도 내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그 무언가 오묘한 생명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성경을 접해 보았지만, 그때는 단맛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그분께로 가서 그 생명의 손길에 나를 맡기고 싶었다.
남편도 자식도 부모도 형제도 친구도 이런 나의 상태로는 어느 것 하나라도 정상적인 관계가 불가능해 졌다. 친정 옆 10분 거리에 ○○○이라는 휴양처가 있었고 가족들은 그리로 가기를 원했지만 아무도 만날 수 없는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오직 절대자의 존재를 깨닫는 데에 온 힘을 다하고 싶었고 그분을 만나면 내 병과 영혼까지도 맡기고 싶었다. 그래서 죽더라도 새털처럼 가볍게 미련 없이 이 세상으로부터 자유하고 싶었다. 솔직히 가족을 만나는 것조차도 힘들고 부담이 되어왔다. 내가 선택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2005년 6월 24일 벧엘에 도착해서 원장님을 처음 뵈었을 때 헐렁한 면 티의 편한 차림의 평범한 아낙의 모습.... 내 절망적인 병 때문이었을까? 눈물만 흘리는 나에게 “눈물은 그분께 감사함으로 인한 것이어야지 병 때문에 서러워서 우는 것은 치료에 도움이 안 됩니다. 그분을 받아들이고 편히 쉬십시오.” 알듯 모를 듯한 그 말씀.... 차가운 듯한 인상.. 어떤 분일까 궁금하여 주신 책(성서의학) 맨 뒤에 “필자가 만난 예수”란 간증편을 보았고, 거기에는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전 인생을 주님께 바쳤다”고 쓰여 있었다. 그때는 “음.. 그랬구나” 하고 한낱 글자로 내게 다가 왔을 뿐이었다. 그 후로 그것은 진실임을 가슴으로 알게 되었다. 원장님에 대한 신뢰를 통해서 난 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시작했다. 매일 아침과 저녁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내 피부를 뚫고 뼈 속에 스며들어 영혼에 파고들어 왔다. 그리고 원장님만 보면 눈을 마주 할 수가 없었고 뒷모습만 훔쳐보다가 내 쪽으로 고개가 돌려지면 난 고개를 떨구거나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고 메시지를 전하는 시간이면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리기를 일주일이 지날 무렵에 그 이유를 요한복음 3장에서 알게 되었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세상 속에서 많은 것을 갖춘 니고데모는 학벌도 재산도 자랑할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사렛 청년 예수 앞에 서면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했다. 그랬다! 그것이었다! 성령이 사람 속에서 그분의 품성으로 빛을 발하시니 나의 죄성 때문에 눈이 부셔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니고데모가 예수 앞에서 느꼈던 그 부끄러움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했던 나를 발견한 것이다. 원인을 알고 나니 답답하던 마음이 시원해지기 시작했고 내가 몰랐던 내 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전에는 죄를 회개하라는 말에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남을 해친 적도 없고 부당하게 이득을 취한 적도 없고 나름대로 정당한 방법으로 노력한 대가로 의식주 해결하며 선하게 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 죄였다.
하루는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걷기 운동을 하던 도중에 그분의 사랑을 몰랐던 내 죄를 발견하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손발이 떨려오고, 신경이 마비되어 오는 듯한 느낌에 뒷목에서 등으로 식은 땀이 뽀송뽀송 나면서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그분은 십자가에서 채찍 때문에, 박힌 대못 때문에 숨이 끊긴 것이 아니고 나의 죄 때문에 가슴이 아파 심장이 터져서 숨이 끊기신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지금껏 내가 잘나서 세상에서 존재한 줄 알았던 나의 무지함...
이 얼마나 무지막지한 내 배 째란 식으로 강철판을 깔고 살아왔는지...내게로 향하신 그분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 죄였다. 그 사랑을 조금이라도 깨닫게 되니 나의 존재가 너무나 귀하고 당신의 값진 피로 사신 내 존재가 의미 없이 한 줌 흙으로만 돌아가 가치 없이 끝나게 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왔다. 그리고 수양원에 60, 70대의 늙고 힘없는 분들을 보면서 아직 힘이 있는 40대에 창조의 하나님, 내 몸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게 해 주심에 감사했다. 나는 내 병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해 본 기억이 없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 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 6:63)는 이 성경의 말씀을 믿었다. 영혼과 마음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를 만드신 분이라면... 내가 그분 앞에서 그분의 뜻대로 관계를 회복할 길만 있다면 내가 병을 위해 울부짖지 않아도 될 것을 알았다. 오직 그분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내 오관을 통해서 느껴보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 매일 기도했고,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은 꿀맛보다 더 했다.
수양원의 뒷밭에서 내 손으로 직접 뿌린 씨앗에서 열무며 상추의 파란 싹이 나는 것을 보면서의 신기함과, 내 온 몸이 점차 회복되고 피부가 말끔해져 가고 통증도 없어져 가는 날들 속에서, 절대자의 사랑을 오관으로 느끼게 된 것이다. 나뭇잎 사이로 스치는 바람 속에서, 흐르는 햇빛 속에서, 향긋한 풀 냄새, 땅 냄새, 벌레 소리, 새 소리, 맑은 공기, 절대자의 따뜻한 사랑에 푹 젖어 호흡하는 나를 발견한 것이다. 전에는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위엄 있게 품위 있게 나를 내려다보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숨쉬는 순간 순간이 하나님의 자비이고 사랑 속에 거한 것임을 알게 된 것이다. 끊임없이 치료하시고 지금도 내 병 때문에 가장 근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다. 병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한 적도 있었으나 그것은 그분을 이해하지 못한 나의 무지함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당신이 창조한 원래의 건강한 모습으로 회복되기를 나 자신보다도 더 간절히 원하고 계시다는 것, 단지 그분의 자비와 은혜가 너무나 크고 끝이 없어서 거듭나지 아니한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세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살아온 생활을 리턴 해서 창조주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셨던 목적에 맞게 믿음 가운데 순종하는 생활로의 전환이 필요했다.
하나님은 전체이셨다. 현대의학은 그 전체 가운데 작은 부분집합이었다. 병원 의사도 최선을 다하지만, 인간의 노력과 과학은 하나님의 전체 집합 속에서 발견된 너무 작은 부분집합이었다. 나를 지으신 그분께로 가서 도움을 겸손히 요청했더니 너무 쉽게, 기쁘게, 통증 없이 회복시켜 주셨다. 지금은 몸도 마음도 날듯이 가볍고 기쁘다. 새까맣게 죽어가던 손톱, 발톱도 다 살아났고 피부에 진물이 다 없어지고 어린 아이 피부처럼 내 영혼과 함께 살아나고 있다. 나는 더 이상 내 혈관에 암으로 인해 주사바늘을 꽂지 않아도 될 확실한 이유를 발견했다.
내 생명의 근원이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갈 것인지, 그 어려운 해답을 얻었다. 죽음의 공포에서 진리의 자유 속으로 훌쩍 날아버린 내 영혼...여기까지 오게 한 암 병에 대해 감사했던 나날들...
하나님!
인간의 언어로 “감사합니다”라는 표현밖에 할 수 없는 이 안타까움을 아시지요?
하나님의 섭리 - 자궁 근종
“언니, 여기는 천국이야, 언니도 와라. 여기 오면 언니 금방 나을 수 있어.”
6월 어느 날 이른 아침, 하동에 있는 어느 수양원으로 간다는 전화를 남긴 채 자신의 집을 떠난 현자가 며칠 후 전화를 하였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밝았고 들떠 있었으며 매우 행복했습니다. 이렇게 밝은 목소리를 들은 것이 너무 오랜만이었지만 저는 픽 웃으며 “난 매일 천국에 살아” 라고 대답했습니다. “언니, 잘난 척하지 말고 여기 와라, 정말 좋다니까.. 어떤 병도 나을 수 있어.” 저는 이렇게 벧엘수양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7년 전 유방암 수술을 받은 후 뼈로 전이되어 계속 항암치료를 받던 그녀의 몸은 당시 온몸에서 진물이 흘렀고 머리카락뿐 아니라 손톱 발톱이 다 빠져 매우 절망적이었습니다. 그러던 그녀가 다 나았다며, 그 후에도 몇 번이나 꼭 한 번 오라며 간곡하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마침 3박 4일의 윤독회도 끝났고 매주 한 번 지도 교수님과 하던 스터디도 한 주 간 방학을 하였기 때문에 학우들과 하던 스터디에 양해를 구하고 1주일만 다녀오기로 하였습니다. 1주일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으리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그 동안만이라도 서울의 더위와 오염된 공기를 떠나 있으면 마음이라도 휴식을 얻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저는 벧엘수양원으로 향하였습니다.
8월 3일 오후 4시가 지나서야 하동에 도착하였습니다. 택시를 탔더니 기사분이 백미러로 저를 보며 물었습니다. “건강해 보이는데 어디가 안 좋나요? ” “한두 군데가 아니라서 말씀드리기가 복잡하네요..” “그래요, 그래도 그곳에 가면 다 나을 수 있을 거예요. 내가 아는 택시기사 한 사람도 거기서 당뇨병을 고쳤거든요. 그 대신 원장님이 하시는 말씀을 잘 믿어야 합니다. 그곳엔 별스런 병도 다 낫는다고 합디다.” 그분의 말에 피식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저는 알지 못하는 사람 말 잘 안 믿어요, 어떻게 무턱대고 믿나요? ” 기사분과 대화를 나누는 사이 벧엘수양원이라는 노란색 팻말이 눈에 들어오고 차는 곧 논 사이로 난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기 시작하였습니다. 과연 어떤 곳이기에 현자도 기사분도 이렇게 확신에 차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지난 4월 중순에 유방암 수술을 받았습니다. 누구나 그러하듯 저도 생각지 못한 암 선고를 받고 잠깐이지만 눈앞이 아득하였습니다.
작년 11월 중순 빗길에서 미끄러져 다리골절을 수술한 지 5개월 만에 또 수술이라니... 머릿속이 복잡하였습니다. 당시는 박사과정 마지막 학기였고 다리골절 때문에 3개월 반을 쉰 아르바이트(초. 중생들 그룹지도)를 다시 시작한 지 한 달 반 밖에 되지 않았으며 제가 관여하고 있던 출판사에서 6월에 출간될 책의 원고를 정리하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의사선생님께 두 달 후에 수술하면 안 되냐고 여쭤보았습니다. 의사선생님은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암이 뭔 줄 알아요? 그렇게 기다릴 수 있는 게 아니예요. 다행히 초기라 나흘만 입원하면 되니까 빨리 준비하세요.”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나흘만 입원하면 된다는 말에 다음 날 입원을 하여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수술 후 나흘은 열흘로 바뀌었습니다. 퇴원 후 잠시도 쉬지 않고 저는 예전과 똑같이 생활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나 피곤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반 달 만에 아르바이트를 접었습니다. 당장 생활비가 걱정이었지만 1년 정도는 쉬어도 되지 않겠는가,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하자며 일을 정리하고나니 집에 일찍 올 수 있어 좋았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아르바이트를 핑계로 참석하지 않았던 콜로키움, 스터디 등이 저를 유혹하였고 계속 제출해야 하는 페이퍼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힘들었고 여전히 피곤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계속 미루어졌던 몸의 한 부분이 또 저를 괴롭혔습니다. 바로 자궁을 꽉 채우고 있는 근종들이었습니다.
저는 99년도에 자궁근종과 내막염 수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근종이 또 자라서 자궁 속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작년 여름 방학에 수술을 잡았으나 당시 서울대 병원이 장기간 파업을 하는 바람에 수술이 미루어졌습니다. 파업으로 제게 주어진 시간이 자꾸 줄어들자 저는 수술을 포기하고 한방치료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지도 교수님께서 소개해 주신 그 한의사는 근종을 없앨 수는 없으나 크기를 줄일 수는 있다고 장담하였습니다. 5개월 동안을 다니면서 여섯 재의 한약을 먹고 두 달 간은 매일 침을 맞았고 집에 와서는 뜸을 떴습니다. 1시간 10분이나 걸리는 그곳엘 다니면서 저는 매우 지쳤습니다. 혹이 처음에는 줄어드는 듯했으나 별다른 변화가 없었습니다. 혹이 크고 많아서 내 손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기 때문에 그 고생을 하면서도 줄어들지 않는 혹을 만지며 겨울 방학에는 수술을 해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11월에 다리 골절 수술을 하는 바람에 그것은 올 여름 방학으로 미루어졌고 4월에 유방암 수술을 하는 바람에 또 10월로 미루었습니다. 잠자리에 누워서 배를 만지면 전해지는 혹의 딱딱함.
오늘은 이 자리, 내일은 저 자리.. 여기 저기 자리를 옮기며 내 자궁 속에서 머무는 그 혹은 생리 때가 되면 더욱 커지고 무거워 배가 처지는 것 같았습니다. 계속 수술이 늦춰지면서 혹시 수술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수술 외에 이 혹이 해결 될 길은 없었습니다. 한약도 먹을 만큼 먹었고, 침도 맞을 만큼 맞았으며 뜸도 열심히 떴건만 혹은 여전하였고, 하나님께 기도도 드려봤지만 혹은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다리에 박은 철심 빼는 수술도 해야 하는데 자궁 수술을 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가지 수술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하나님, 당신의 능력으로 저를 치유하여 주십시오, 당신은 치유의 하나님 아니십니까? ’
그때 들은 벧엘수양원 소식. 하지만 확신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현대의학도 한의학도 속수무책인데 병원도 아닌 그곳에서 무슨 치료가 될거냐는 생각이었습니다. 잠시 환경 좋은 곳에서 편히 쉬었다 오는 것만으로 만족하자는 생각. 벧엘 동산을 들어오는 길에서 한 저의 얄팍한 생각이었습니다. 벧엘이 위치한 곳은 참으로 풍경이 아름다웠습니다. 어머니 품 같은 지리산 한 자락, 널찍한 정원과 각종 나무, 마주 보이는 나지막하고 시원한 산, 가만히 귀 기울이면 들리는 각종 새소리, 벌레 소리...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곳에 있는 사람들의 확신이었습니다. 특히 제게 오라고 전화했던 현자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환자가 아니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이던 그녀. 그녀가 결혼한 이후 이처럼 행복하고 편안한 얼굴을 대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벧엘엔 암 환자들, 특히 전이된 분들이 많았는데, 그분들은 이곳에서 따뜻한 햇살, 맑은 공기, 깨끗한 물, 충분한 휴식, 적당한 운동, 절제된 생활, 자연식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치유 받게 되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과연, 과연 그럴 수 있을까? 그래 한 번 믿어 보자 이들이 증거하지 않는가? ’ 저는 택시 기사분의 말대로 원장님이 강의마다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보기로 하였습니다.
다음 날부터 과일식에 들어갔습니다. 집에서 엉터리로 과일식을 하면서 체중만 줄었기 때문에 다시 과일식을 한다는 게 두려웠지만 과일식을 통해 피가 맑아지고 몸속의 노폐물이 다 빠져 나가면서 혹의 경우 물렁물렁 해지다가 없어진다는 원장님 말씀을 따라 보기로 했습니다.
원장님께서는 보름 정도 과일식을 하라고 하셨지만 1주일만 계획하고 온 제게는 무리였습니다. 그러자 원장님께서는 “맛만 보고 가겠네, 한 달은 있어야지”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사흘 정도 고민을 하였습니다. 당장 해야 할 일도 미루고 왔는데, 어쩌나! 그러나 다시 오기도 힘드니 보름만 있어 보자하며 당장 그 다음 주에 해야 할 일과 만나야 할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였습니다.
과일식을 시작하고 나흘 째, 원장님께서 어떤 변화가 없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때까지 별 다른 변화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6일 째 되는날 어린 아이 머리통처럼 배 가운데에서 딱딱하게 느껴지던 혹의 양 옆이 물컹물컹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 놀라 배를 만지고 또 만져 보았습니다. 혹의 가운데 부분은 여전히 딱딱하였지만 양 옆은 분명히 물렁했습니다. 너무나 기뻐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현자에게 말했습니다. 그녀 또한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언니에 대한 기도가 1순위였는데 하나님께서 들어 주셨네” 드디어 1주일간의 과일식이 끝나고 식사에 들어갔습니다.
혹은 갈수록 물컹물컹 해졌습니다. 바로 누우면 아랫배가 불룩하게 튀어나왔던 혹이 이제는 거의 만져지지 않았습니다. 아랫배를 꼭 누르면 겨우 만져질 정도로 작아졌습니다. 갑자기, 순식간에 없어지진 않았지만 서서히 지속적으로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혹의 형체가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지면서 그동안 소원하였던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한 때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였지만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입고 교회를 떠난 지 17년. 그동안 신앙생활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상처가 덧날까봐 쉽게 접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올해 암 수술 후 묵상하듯 기도하며 지냈었는데 그러한 기도도 들어주신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믿음이 부족한 저를 벧엘로 인도하여 주셨고 원장님 말씀을 통하여, 성경을 통하여, 엘렌 지 화잇 여사의 글을 통해 당신을 보여주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는 그때부터 저를 벧엘수양원으로 인도하실 것을 계획하셨습니다.
작년부터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궁근종 수술이 계속 미뤄졌던 것은 당신의 치유의 은사를 통해 저를 당신 앞으로 부르시는 오묘한 계획 이었습니다. 앞으로는 지금까지 살았던 바쁘고 정신없는 생활, 즉 불치의 생활에서 벗어나 그분의 법칙 속에서 바르게 살아 다시는 병들지 않도록 절제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하기 위해 말씀을 상고하고,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을 증거 하는데 게으르지 않는 생활을 하렵니다. 이것이 저를 벧엘까지 이끌어 주시고 치료하여 주셨으며 앞날까지 예비하여 주실 주님의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방암에서 폐와 임파선까지 전이
안녕하세요?
저는 서울에서 온 동양화를 그리는 사람입니다. 저는 5년 전 왼쪽 유방암 수술을 받고 다시 4년 4개월 만에 폐와 임파선까지 전이가 된 상태에서 지난 8월까지 항암치료를 20회 받고 급기야 이곳 벧엘수양원에 내려왔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제겐 정말 호랑이처럼, 아니 고양이 앞에 쥐인 듯 항상 두렵고 피할 수 없는 무서운 홀 시어머님이 계셨습니다. 어쩌면 아마추어 연예인처럼 활동하며 속세에 빠져 다니시는 어머님의 뒷바라지와 욕구를 채워드리기에 늘 지치고 힘이 겨웠습니다. 5남매 중 오로지 큰아들만이 자식이고 남편인양 믿고 사시는 어머니에겐 며느리가 아닌 사랑을 빼앗긴 질투의 대상인 “저 여자”인 제가 자리하고 있어 늘 피할 수 없는 애증의 가슴앓이를 하는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9남매의 둘째이신 어머님 형제분들의 모든 대소사는 항상 우리 네 식구에 한 달에 쌀 한 가마를 소비할 정도로 우리 집을 경유하며 이루어 졌고 늘 여왕처럼 군림하며 대접 받음을 즐겨 하셨으며 분별없는 낭비로 한 달 용돈 100만원도 부족하셨으니... 그야말로 나의 삶은 깊은 수렁 속에 빠져 허우적대며 한 발을 빼면 다시 한 발이 더 깊이 빠져 들어가는 듯 힘들고 헤어나기 벅찬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수만리 힘들게 비행하고 며칠 만에 돌아온 남편에게 번번이 하소연 할 수도 없어 제 가슴엔 늘 암울함만이 쌓여갔고 마치 늪 속을 방황하는 듯 했습니다.
그러던 중, 5년 전(2000년) 여름, 어머님은 아침에 수영을 다녀와서 나비처럼 예쁘게 모시한복을 차려 입고 은행에 돈 찾으러 외출하시다가 동네 어귀 길에서 혈압으로 인한 심장마비로 쓰러져 78세 일기로 돌아가셨고 그날 가지고 계셨던 백 속엔 <은행에 돈 찾으러 가는 날 7월 18일, 통장 비밀번호 ○○○○> 라고 적힌 메모쪽지와 함께 도장 그리고 1,600만원이 든 통장이 함께 남아있었습니다.
그렇게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그로부터 한 달 후 저는 왼쪽 유방암 2기라는 충격적인 선고를 받고 절제수술을 받았으며 그 이후 지난 4년 4개월의 투병기간이, 어머님이 안 계셨기에 그래도 제겐 크게 숨쉴 수 있었고 마음 편하고 즐겁게 혼신을 다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행복한 시간들이었습니다. 남편은 그동안 눈치 속에 못다 한 사랑과 성의를 다 베풀어 주었고 저는 하나님께서 주신 저의 달란트를 소신껏 펼칠 수 있는 정상 궤도에 이르렀으며 참으로 보람을 느끼고 열심히 바쁘게 “무주 구천동 33경전”이란 제 2회 개인전도 성황리에 끝냈으며 문화센터에서 한국화 지도와 화실운영에 정말로 기쁘고 보람되게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해(2004) 12월24일 종합검진에서 폐에 5mm 그리고 가슴 임파선에 모래알을 뿌려 놓은 듯 암이 재발되었다는 진단을 받고 또 다시 커다란 슬픔과 참담함을 느껴야 했습니다. 제가 25년 전 천주교에서 영세를 받고 이른바 신앙생활을 한다고는 했지만 소위 발바닥신자라는 말처럼 주일에 미사 다녀오면 한 일주일을 그냥 나의 생활에만 여념 없이 바쁘게 주님을 잊고 살았으며, 성경말씀 한 번 읽지 않는 게으르고 부끄러운 삶의 연속이었으니, 이 슬픈 절망 앞에서 주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리는 마음마저 염치없고 죄스러울 뿐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병원에서 최선의 치료 항암제(탁솔)를 1주일에 한 번씩 맞고 UFT라는 신약을 병행하여 매일 먹는 치료가 진행되었습니다. 점차로 느껴지는 약물의 부작용으로 독소가 얼굴에 여드름마냥 돋아나고 발바닥엔 감각이 마비되고 마치 모래 자갈이 잔뜩 붙어 있는 듯 이물감으로 걸음 걷기마저 불편하였으며, 머리카락과 하물며 속눈썹까지 모조리 빠졌으며 정말 암세포보다 정상세포가 더 죽어가는 상태에서 병원에 의사가 필히 하루에 소고기 600g씩 꼭 먹으라는 지시에 바보처럼 착실히 따르다 보니 몸무게가 8개월 동안 무려 10kg이나 늘어나 숨이 차고 정말 내가 봐도 보기 싫은 뚱뚱보 모습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중, 이 곳을 다녀간 교우 ○○○씨가 대동맥에 암이 전이되어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이곳에서 23일간 수양을 하고 CT를 찍은 결과 암이 2/3가 줄었으며 건강을 되찾았다는 이야기를 동생 수녀님으로부터 전해 들으면서 저는 순간 ‘그래 맞아, 완치가 보장되지 않는 이 힘든 항암치료를 더 이상 계속할 필요가 없지... 나도 그곳엘 내려가야겠다’는 확신이 생기면서, 이튿날 항암주사를 20번째 끝내고 퇴원하여 새벽 5시에 남편과 함께 내려왔습니다.
드디어 벧엘수양원에 도착하여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 커다란 돌에 새겨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태복음 11장 28절의 말씀이 눈물이 나도록 가슴에 뜨거운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저를 포근히 감싸 안아주었습니다. 제 마음은 너무도 평안하고 마치 친정엄마 품에 돌아 온 느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하루에 두 차례씩 전해주시는 최 원장님의 복음 말씀은 정말이지 구구절절이 고단백 영양제와 치료제가 되었습니다.
맑은 공기와 좋은 물, 온갖 풀벌레 소리의 오케스트라 연주가 울려 퍼지고, 푸르고 싱그러운 아름다운 자연의 동산에 마치 포근한 새의 둥지처럼 자리하고 있는 이곳 벧엘수양원에서 온갖 잡다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멀리하고 잊은 채 건강식과 오로지 하나님의 빛나는 보석 같은 귀한 복음 말씀만을 나의 가슴에 오롯이 한 아름 꽃으로 받아 안으며,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거듭 새로 태어나기 위해 간구하며 애쓰고 있는 이 미흡한 저에게 “주님! 자비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림은 하나님께서 저를 가엾이 굽어보심일까요? 저는 지금 마음과 몸이 최상의 컨디션 상태입니다. 불편했던 몸의 상태가 거의 호전되었으며 특히 한 달 동안 체중이 6kg이나 조절되었으니 지금은 날아갈 것 같이 몸이 가볍고, 더욱이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어 너무도 행복합니다. 제 몸에 재발된 고약한 암은 지금 이미 다 나은 것 같습니다.
이곳 벧엘수양원 최 원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여기 계신 여러분도 다 함께 주님 은총 안에서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5년 후에 온 편지)
뜨거운 태양과 7월의 푸르름이 어우러져 결실을 위해 성숙해 가는 하절기에 원장님 안녕하세요!
벧엘수양원 가족 함께 안녕하신지요?
돌아보니 세월의 흐름을 실감하며 5년 전 꼭 이맘 때 수양원에서의 두 달의 생활은 저에게 새로운 생명의 삶에 끈을 잡고 다시 태어난 계기가 되었기에 참으로 감회가 깊습니다.
저는 주변 사람들에게 늘 말하지요. 아마 그때 제가 항암치료를 계속 하고 수양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라고요... 정말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또한 벧엘수양원은 제가 다시 태어난 제2의 고향이라고 늘 말하지요.
지금 수양원에 계시는 여러분, 탁월한 선택을 하셨어요. 힘내세요!
하나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고 그리고 수양원에서의 건강 채식 식단과 맑은 공기, 좋은 물, 운동,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치유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할 것입니다.
건강하세요, 감사합니다.
2009년 7월 이 ○○
깊어지는 육신의 병과 마음의 병 - 당뇨병
충남 예산 삽교읍은 바다처럼 넓은 평야 위에 떠 있는 작은 소읍입니다. 이곳에 삽교 고등학교가 궁전처럼 서 있습니다. 교직 20여년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만, 인간성을 말살하는 듯한 혹독한 진학지도에 종사하느라고, 50년도 더 근무한 듯 아득합니다. 아침 7시부터 시작하는 수업은 밤까지 이어지는 과외지도 그룹지도 심야지도까지 이어집니다. 학교 지도가 끝나면 대개 새벽 1시가 되어갑니다. 나는 항상 진학반 담임이었고 3학년 주임이었고 연구 부장이었습니다. 나는 항상 이 진학지도의 큰 계획 속에 총 책임자가 되어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잠을 안 재우고 학습시간을 창조해 주나 늘 고심해야 했습니다. “시간을 아끼는 자가 성공한다. 내일부터는 취침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 1일 학습 계획을 세워 아침 6시 50분까지 제출하라” 이런 진학 지도를 하려면 나 자신은 학생들보다 더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학교 앞이 바로 내 집인데 집에 들어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진학 지도에 피로가 겹칠수록 담배와 커피만 더 찾게 되었습니다. 담배는 하루에 세 갑 이상을 피우게 되고, 커피는 하루에 10잔, 20잔 끝없이 마셔댔습니다. 이럴수록 식사량은 자꾸 줄어듭니다.
이러던 어느 날, 수업 도중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서울 대학병원으로 후송되어 급성 심근경색의 진단을 받고 심장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몸이 너무 허약해진 상태에서 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회복하지 못하고 가사상태로 식물인간이 되어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가 20일 만에 기적적으로 소생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저의 몸에는 당뇨라는 병이 죄 값으로 천형처럼 몸 깊숙이 박혀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퇴원할 때 체중은 35kg, 걸음도 못 걷는 나에게 의사는 “당이 상당히 진행되었으니 식생활에 조심 하십시오” 라고 당부하면서 여러 가지 주의 사항들을 적어주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때 살아난 것이 너무 좋아서 당 같은 것은 병이라고 생각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몸을 보하기 위하여 한약도 달여먹고 개고기, 소고기를 끓여 먹으며 건강회복에 열심이었습니다. 병원에서 주는 당약을 계속 먹으면서 체력은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 갈수록 당뇨병은 점점 더 악화되어 고갈증이 엄습했으며, 먹어도 먹어도 배부를 줄 모르는 고창증이 찾아왔을 뿐만 아니라 치아가 다 빠져 내려앉았습니다. 앉으나 서나 물만 마셔대니 물메기라는 별명과 눈만 뜨면 잠 잘 때까지 계속 무엇이든 먹어야 되므로 식충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물메기든, 식충이든 이런 문제보다도 자꾸 줄어드는 체중 때문에 초췌할 대로 초췌해진 나의 모습이 문제였습니다.
남자 키 165cm 40kg도 안 되는 초췌한 모습에서 오는 자멸감이 마음을 괴롭혔습니다. 사람을 피하게 되고 숨고 싶은 마음의 괴로움을 세상에는 알아줄 이 없었습니다.
이런 사람의 짊어진 운명은 아마도 그 영혼마저 가랑잎처럼 마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여! 이 메마른 생명을 버리지 마옵소서 이 죄인의 갈 길을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동안 감리교회에 입교하여 있었던바 보잘 것 없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동원하여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사람이 죽게 되면 최후에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이 나의 입장이 될 줄은 진정 몰랐습니다.
2004년 7월 1일, 민 장로의 간절한 청을 물리칠 수 없어, 그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장로님과 함께 떠나 하동 벧엘수양원에 오게 되었습니다. 민 장로님이 마음속에 큰 상처를 입고(국회의원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함) 괴로워하고 있으니 같이 동행하며 위로해 주어야지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성천리 산속으로, 산속으로..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묻고 물으며 찾아왔습니다.
벧엘수양원!
양지 바른 산록에 자리 잡은 이곳은 한마디로 말하여 신선이 사는 곳 같았습니다. 무엇에 홀린 듯한 느낌이었지만 최 원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모든 미진한 마음이 다 풀리었습니다. 그분의 모습에서 와 닿는 중압감이 나를 천근처럼 짓눌렀습니다. “오늘부터 과일식을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