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맹장을 돌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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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장을 떼어냈다. 맹장은 도무지 타협할 줄 모르는 기관이다. 탈이 나면 적출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도가 없다. 여타 신체 기관은 항생제 투여나 일부 절제술로 나을 수 있지만 맹장은 막무가내이다. 약지 길이보다 작은데 어찌나 성질이 급한지 화르르 그 자체여서 고집을 부렸다 하면 달래는 일이 절대 불가능하다.
맹장은 박테리아 생산 공장이자 집합소이다. 적당량을 배출하여 소화를 돕고 온갖 박테리아가 난무하는 외부 환경에 신체가 잘 적응하도록 다른 기관과 협력한다. 어떤 이유로든 맹장 근육에 염증이 생기면 약해진 그곳을 뚫고 농축된 박테리아들이 세찬 밀물처럼 쏟아져 나와 온 복부기관을 순식간에 오염시킨다. 몸 안에 강력한 살상무기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셈이다.
맹장염이 되는 이유는 학설상 불분명하다. 나는 스트레스 혹은 과로라고 믿고 싶다. 손가락 끝이 아프면 온 몸이 욱신거리듯, 모든 질병에는 전 세포와 기관이 연루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신체는 자연 그 자체라서 적정 환경 내에서는 좀처럼 탈이 나지 않는다. 무리하면 각 기관이 긴장하고 피곤해져서 대화를 멈춘다. 상호불통이라는 고립감에 시달리다가 정서적 반란과 폭동을 일으키는데 신체에 무작위로 영향을 미친다.
험한 음식을 많이 먹으면 맹장염에 걸린다는 통념이 아닌 것이다. 그 발병률이 젊은 층에 높은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나이가 들수록 노폐물이 쌓여서 맹장염에 걸릴 확률이 높아져야 하는데 오히려 그 반대여서 어떤 환경에도 잘 견디지 않는가 말이다(이제껏 마음에 쌓인 먼지와 때를 생각해보라).
박테리아 생산 공장이 내 몸에서 제거되었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박테리아, 내부에서 자라나는 박테리아를 모니터하는 컨트롤 타워가 사라졌으니 예상치 않은 곳에서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
마음의 박테리아를 생각한다. 아무리 좋고 아름다운 것도 과유불급이다. 사랑도 지나치면 염증을 일으킨다. 잘 조절하면 생명의 꽃이 되지만 과부하에 걸리면 마음을 병들게 한다.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 없다면, 감정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다면, 이미 다량의 박테리아가 침입한 것이다. 마음을 잘 붙들어 매라는 신호로 받아들여 마음이 가는 길을 잘 감시해야 한다. 몸의 열과 독을 씻어내듯이 마음을 정화해주어야 한다.
마음의 맹장을 생각한다. 잘 건사해서 탈이 나지 않게 해야겠다. 정신적인 박테리아가 우글거리는 장소나 모임은 피해야 한다. 전염성이 강한 사람들도 거리를 두어야지. 사는 일에 좀 더 조심스러워야겠다. 고통과 슬픔조차 삶의 염증이 아니라 긍정적인 에너지가 되도록 노력해야지.
그 나이에도 맹장수술을 하느냐, 아직도 젊네, 친구들이 놀렸다. 어머, 내 나이가 어때서요 아직 한창입니다, 하고 웃었다. 아이스크림을 사준다는 사람이 있어서 스테이플도 제거하지 않은 배를 끌어안고 살살 운전해서 타운으로 나갔다. 아이스크림이 꿀처럼 달았다.
아, 나는 맹장을 떼어냈다. 상실감 탓인지 마음의 맹장도 덩달아 약해진 듯하다. 그대여, 강력한 살상무기, 맹렬한 열정덩어리 하나를 잃은 가련한 나에게 제발 친절하게 대해다오.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6년 4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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