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종(心鐘) / 하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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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을 친다. 내가 울린 종소리에 내 자신이 놀란다. 연꽃이 펼쳐진 당좌(撞座)를 향해 당목(撞木)을 뒤로 당기자마자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당목이 제 발로 달려가 안기는 느낌이라니. 종신(鐘身)에서 울려나오는 소리가 아련하고 슬프다. 연꽃잎이 터지고 으깨지는 소리인가. 음관을 통해 위로 솟구쳤다가 아래로 쏟아지는 소리가 종 아래 음확(音廓)을 맴돌아 나오는 여음과 맞부딪치면서 신비한 화음을 연출한다. 맥놀이 현상이다. 서로 다른 진동과 파장이 얽힌 듯 풀리고, 끊어질 듯 이어지고, 멀어졌다 가깝게 다가오고, 작아졌다 다시 커진다. 흐느끼는 듯 간절한 애소가 내 심장을 두드린다.
단 한 번의 자극에 온 몸의 진동으로 화답하는 종. 그 청동빛 울림통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붙박이가 되었다. 인간이 율동과 파동으로 빚어진 존재임을, 인간의 유연한 사고가 우주와 천체를 넘나들 수 있음을,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만물이 풍요롭게 빛나보이던 때가 있었거니. 온갖 그리움이 되살아난다. 종소리가 이렇게 위로가 될 줄 몰랐다.
소리가 대기와 대지로 스민다. 종을 떠난 소리를 종이 다시 불러들여 감싸 안는다. 태양과 달을 가로질러온 소리. 지구에서 수억 광년 떨어져있는 이름 모를 천체에 닿았다가 다시 찾아온 소리. 목동자리의 가장 큰 별 아르크투루스(Arcturus)의 표면에 닿았다가 되돌아온 소리. 사람이든 사물이든 떠났다가 다시 돌아오면 인연(因緣)이다.
종신에 몸을 기댄다. 쇠의 몸에서 나는 섬세한 소리와 진동이 오묘하다. 그 강도와 진폭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것이 없다. 그 현란함, 그 다양함, 그 무수함에 압도당한다. 음파가 내 몸 세포세포마다 스민다. 천 번은 흔들려야 세상 이치를 안다는데, 나는 지금까지 사는 동안 몇 번이나 흔들렸을까. 셀 수 없이 흔들렸다고 생각했는데 그 격과 품이 달랐구나. 종은 우주를 흔들고도 중심을 잃지 않는데 나는 흔들릴 때마다 뿌리 없는 나무처럼 쓰러지곤 했다. 성숙과 변화를 위한 동기로, 영적인 흔들림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진동이 잦아든다. 영원 같은 찰나가 흐른다. 마침내 정지. 드러난 고요. 완전한 적막. 종신에 기댄 몸은 기억 속의 여음과 여진으로 여전히 떨리고 있다. 만남의 여운이란 진정 이렇게 다감한 것이로구나. 헤어짐의 갈증이란 이렇게 깊은 것이로구나.
두 팔을 활짝 펴서 종신을 껴안는다. 두 손바닥과 오른쪽 뺨과 가슴과 아랫배와 허벅지에 닿은 종의 몸이 따스하다. 물기 머금은 저녁 햇살 때문이 아니다. 종은 인격을 지닌 것만 같다. 숨을 쉬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면 득도의 경지에 이르는가. 수백 년 세월동안 세상을 지켜본 범종이 내게 묻는다. 너는 어느 누구에겐가 생명 같은 희망을 주어본 적이 있느냐. 소리 없는 눈물로 위로를 해준 적이 있느냐.
종을 다시 친다. 종신에 더욱 바짝 몸을 밀착시킨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우주의 진동과 지구의 속도를 감지한다. 마음이 텅 빈다. 몸에서 반란이 일어난다. 밑바닥에 깊이 가라앉아있던 온갖 감정이 회오리바람이 되었다가 조용히 가라앉는다. 규칙적이고 율동적인 생체 리듬이 불규칙하고 다양한 종의 리듬을 만나 대치하고 상응한다. 서로를 밀어내고 받아들이는 갈등과 몸부림이 격렬하다. 맥놀이 속에 섬광 같은 음성이 들린다. 청년시절, 나를 먼 땅으로 떠나보내면서 한숨처럼 말씀하시던 어머니의 목소리. ‘아가야, 어른이 된다는 것은 아파도 아프다고, 슬퍼도 슬프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란다.’ 나는 비로소 어른이 되었다.
어느 순간 종의 진동과 심장의 박동이 똑같이 맞부딪친다. 세런디피티(serendipity),심오와 경탄의 순간. 내가 우주와 함께 흐른다는 느낌을 고스란히, 절실하게, 인지하는 순간. 우주를 향하여 마음 문이 열리고 있다. 몸이 대기 속에 스미고 있다. 몸과 정신과 영혼은 원래 하나가 아니었을까. 만남, 그렇다, 산다는 것은 만남이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생명과 죽음이 만난다. 세상의 모든 만남에는 의미가 있다. 무엇이 두려운가. 나누는 일. 주는 일. 받는 일. 모두 아름답다. 진정한 인연의 속성에는 두려움이 없다.
종소리도 물러가고 전율도 가라앉는다. 또 다시 찾아온 적요. 숨을 조심스레 안으로 모은다. 나의 들숨과 날숨이 이 고요를 방해할까 두렵다. 고요는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는 것이거늘. 내면의 소리를 잠재우면, 외부의 모든 소리가 일어선다. 외부의 소리를 차단하면 내면의 소리가 꽃처럼 피어난다. 어디서든 어떤 상태이든 침묵하고 잠잠하면 고요가 드러난다. 경내를 서성이는 사람들의 목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지 않았는가. 대기를 스치는 바람소리, 나뭇잎 떠는 소리마저 어디론가 사라졌다. 고요만이 나를 감싼다.
향기 나는 여왕의 절, 분황사(芬皇寺)에서 종을 만났다. 심종(心鐘)을 얻었다. 그 후, 내 안에서 수시로 종이 울린다. 그 소리와 진동이 심장을 울리고 마음을 흔든다. 마음속에서 맥놀이 현상이 일어난다. 그 뒤에 찾아오는 고요 속에서 나를 만난다. 내 혈관과 신경 속에, 내 삶 속에, 용해되어있는 만남과 만남들. 현재의 나는 인연의 결정체가 아니더냐. 아침이슬 같은 정갈한 정관(靜觀) 속에 종이 울린다.
내 안에 종이 하나 있다.
<수필과 비평> 2016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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