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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중용의 길을 따뜻한 가슴으로 걷다 - 동촌 박해종 목사 추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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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묵히 중용의 길을 따뜻한 가슴으로 걷다 - 동촌 박해종 목사 추모집***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립보서 4:6


                  발간사 - 김일목 - 신학과장 (삼육대학교 교목실장)



평생 후학들을 키우는 일에 정열을 불사르신 동촌 박해종 목사님은 2013년 12월 29일 오후 10시 사랑하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 안에서 잠드셨습니다. 1주기에 가족들만 모여 추모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면서 2주기 추모일에는 삼육대학교 신학과와 신학대학원이 주관하여 목사님의 삶을 돌아보고 추억하는 모임으로 진행하자는 의견을 모았습니다.


사실 박해종 목사님은 평소에 이름을 남기거나 지나온 흔적의 삶을 남기는 일을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회고집이나 기념논문집, 혹은 설교집을 남기지 않고 떠나셔서 그를 사랑하는 가족들과 후학들에게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미망인 조규순 사모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후학들과 그를 사랑하는 자녀들과 손자녀들을 위해 목사님을 추억하는 회고집을 만드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의견을 모으게 되었습니다.


이에 신학과에서는 교수회의를 통해 박해종 목사님의 2주기 추모예배를 앞두고 목사님을 추억하는 회고집을 제작하기로 뜻을 모았습니다. 함께 일했던 동료교수, 후학들,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과 가족들이 기억하고 추억하는 목사님의 삶의 면모들이 여기에 닮겨져 있습니다. 읽다보면 가슴 찡한 감동으로 때론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도 하고, 때론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되기도 할 것입니다. 모쪼록 이 회고집을 통해 우리 모두가 남은 세월을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거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바쁜 가운데 원고를 써주신 여러 분들과 편집에 수고하신 김성익 교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목차

약력 및 연구업적


                  추모사 - 김상래  (삼육대학교 총장)

존경하는 박해종 목사님이 떠나신지 벌써 두 해가 되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살아남은 자들이 현재의 삶에 몰두하여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삶 속에서 우리는 소중한 사람들과 맺은 아름다운 추억들마저 너무 쉽게 잊어버립니다.


언젠가 어느 추도식에서 유족이 인사하면서 "사람은 두 번 죽는다고 합니다. 한 번은 숨을 거둘 때, 또 한 번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 때,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잊혀지기 전에 주님이 오셨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공감이 되는 말입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질 때 사싱상 온전히 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사람 박해종 목사님을 잊지 않기 위해 그분과의 아름답고 소담스러운 추억을 ㅗ되새기는 회고집을 발간하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전문적이고 학술적인 전기는 아니지만 하나님 안에 뿌리를 두고 한국 재림교단과 우리 삼육대학교를 위해 헌신하며 살아온 한 사람의 삶을 가족, 동료, 제자들의 추억을 통해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였는 지, 어ㄸ너 모습을 보였는지, 그리고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였는지 그 다양한 면모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회고집은 결국 우리에게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재는 선배들의 헌신의 토대 위에 서있음을 일깨워주면서 동시에 우리는 후배들에게 어떤 토대가 되어야 할지를 교훈해 줍니다. 이런 가슴 따뜻한 일을 계획해 주신 신학과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편집에 전념해 주신 김성익 목사님께 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추모시 - 남대극 (삼육대학교 전 총장)

살아있는 교훈과 귀감

고 박해종 교수의 2주기에 즈음하여


느지막이 복음 받고

신앙에 들었으나

굳은 뜻 휘지 않고

진리 사랑 진실하며

옥고도 개의치 않던

오상고절 그 믿음,


제자 사랑 특심하여

자주 몰래 돕던 임,

그 사랑에 감격한 이

임 본받아 그리 살리.

스승의 짙은 사랑에

반향하는 제자들.


어느 해 엄동에

객지 동숙하던 날,

내 고린내 나는 양말

손수 빨래하신 임.

이 아우 어쩔 줄 몰라

쩔쩔매고 있었지.


어진 사모 깊이 사랑하고

선한 빙모 높이 공경하며,

귀한 아들 끝까지 믿어주고

어여쁜 딸 끝까지 믿어주던,

우러러 따르려 해도

멀리 앞서 가신 임.


행정의 중책 맡아

고군분투 하시던 때,

야속한 이 만나거나

억울한 일 당해도

"인간사 다 그렇지 뭐."

초연하던 그 모습.


임 가신 지 어연 2년

잊힐 듯 하오 마는

때때로 새록새록

임의 얼굴 떠오름은

남기신 교훈과 귀감

살아있는 탓이리.


편집의 변 - 김성익 신학과 교수 (삼육대학교 총장)


한 사람을 평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곁을 떠나가신 존경하는 목사님의 삶을 회고하는 일은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는 의미 있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 합니다. 본 회고록은 고인의 사상과 업적에 대한 학술적인 평가에 중점을 두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에게 어떤 추억을 남기셨는지, 현재를 살아가는 제자들과 신학과 동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셨는지를 엿보게 해주는 삶의 진솔한 이야기들을 모았습니다.


가족들이 돌아보는 그분의 삶의 여정은 잔잔한 감동을 던져줄 것입니다. 사모님의 고인과 함께 한 삶에 대한 스케치는 그를 가까이 지켜본 가족들이 느끼는 따뜻한 박해종 목사님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한 새로운 감흥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특별히 사모님께서 정리한 소회에서는 비무장턴투원에 다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사실도 밝혀주고 있습니다. 또한 동료들과 제자들의 회고는 후세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남아야 할 것인가 묵상하게 할 것입니다. 특별히 가족들의 사진첩과 도서관에 보관되 있는 졸업앨범에서 선별하여 회고록에 담은 목사님의 생전모습은 우리 모두에게 잔잔한 그리움을 더해 줄 것입니다. 


본 회고록에는 가족과 동료, 제자들의 회고와 더불어 목사님의 유고 원고 논문과 시조 원고를 찾아 실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은퇴 후 이사하는 과정에서 목사님의 설교노트가 분실되어 그분의 설교를 담아내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유고 원고들은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원본 형식과 어투를 그대로 옮겼습니다.


많은 분들이 박목사님에 대해 겉으로 드러나는 이미지와 다르게 가까이 하면 가슴 따뜻한 면모를 체험할 수 있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가족들은 더욱 그러했습니다. 다소 보수적으로 보이는 그분의 이미지는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원칙과 진리대로 살여는 몸짓이었음을 알게 해줍니다. 그런 목사님의 삶의 태도를 떠올리게 하는 단어가 중용입니다.


목사님의 기고 글 중에 성서적 중용을 정의 하기를 창조주 하나님을 인식하며 "사소한 것에 요동치 않고 양심의 소리에 행동하는 참된 용기"라 했습니다. 본인의 정의대로 목사님은 묵묵히 중용의 길을 따뜻한 가슴으로 걸어가셨습니다. 그래서 이 회고록의 제목을 [묵묵히 중용의 길을 따뜻한 가슴으로 걷다]로 정해보았습니다.


혹시 오랜 시간이 지나 목사님에 대한 인상이 흐려지신 분이 있다면 회고담들을 읽다보면 새록새록 그래 그런분이었지 하는 공감의 탄성을 발할 것입니다. 편집을 하는 저도 그런 감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이 회고록을 읽다보면 누구나 잔잔한 감동을 느끼는 시간을 맛볼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좋은 어른, 스승, 동료가 계셨음을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목사님의 2주기 추모예배를 앞두고 기꺼이 회고록에 참여한 필진들과 원고정리와 자료수집에 수고한 신학대학원의 손지용군에게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멋지게 편집해주신 전종남 장로님과 훌륭한 표지를 제작해준 전종범 교수님에게도 감사를 표합니다. 


(***은혜로운 글들과 추억을 불러오는 많은 사진들이 있는 유익하고 흥미진진한 추모집! 일독을 권합니다!***)


조용히 떠나간 당신의 자취를 그리며

짧은 삶의 스케치


조규순 - 내 마음에 남아 있는 삶의 편린들

            ....돌아보면 감사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박목사님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주님을 섬기는 동역자로 함께 살아온 세월은

             넘치는 주님의 은혜라고만 고백할 수 있을 뿐이다....


박형종 - 고난을 넘어 영원한 순례자로


      ...형님의 담배와의 싸움은 참으로 처절하였습니다.

           침례받기 며칠 전까지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형님께서 제게 말씀하시기를 "동생, 내가 이 작은 담배꽁초의 종이 되다니,

        그저 죽고 싶은 심정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금요일이 되었습니다. 내일이 바로 침례 받을 날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승리하지 못했습니다.

         금요일 밤, 형님은 사랑채의 외딴 방으로 홀로 들어갔습니다. 그의 마지막 결전을 위하여

        얍복 나루에 홀로 남아 날이 샐 때까지 기도의 씨름을 하셨습니다.


        저는 울부짖는 형님의 절규를 간헐적으로 듣다 잠이 들었습니다.

         날이 새도록 기도하신 형님께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셨을까?

        아직도 날이 밝기 전에 저는 앞마당에 나가서 사랑채를 바라보았습니다.

 

        이윽고 조용히 문을 열고 형님이 나오셔서 제게로 접근하십니다.

        그의 얼굴은 초췌하나 평온 그대로입니다.

        저를 향하여 발하신 첫 번째 말씀은 "동생, 담배 생각이 없어졌어!"였습니다.


        저는 직감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셨다. 담배 중독을 이기고 승리하게 하셨다!"

        아! 존경하는 제 형님께서 이렇게 거듭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과 몸을 아울러 온전히 바쳐 그 날 오후 1954년 7월 20일

        경상북도 경산에서 침례를 받고 남은 백성의 대열에 즐거운 마음으로 가담하셨습니다.


박인제 -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님이 병상에서 보여주신 그 환한 미소는 직접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제 가슴 깊이까지 전달되는 저에 대한 사랑이고 용서이며,

             저의 앞날에 대한 믿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기다려주시고 믿어주신 아버지가 정말 고맙습니다.


박자현 - 그리운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다...

          오늘 나도 무한한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을 알려주신 아버지가 계셨음을...

          주님 오시는 그 날 꼭 아버지를 만나 그 따뜻한 눈빛을 마주하고 싶다....


이국헌 - 1년 반의 짧은 총장 임기로 개교 90주년의 초석을 놓다.

박병도 - 에덴 요양원 투병 회고

김상래 - 입관예배 설교

김성익 - 발인예배 설교

박민열 - 하관예배 설교


그리운 당신을 추억합니다.

제자들과 동료들의 회고


권오달 - 넓은 마음으로 나를 세워주신 어른

김기곤 - 자상하신 은사를 추억하며

             박해종 목사님은 내 대학시절 은사다.

            중,고등학교라면 몰라도 대학에서 은사라 부를 수 있는 교수는 흔치 않지만,

            박해종 목사님은 내가 은사로 부르고 싶은 분이다.....

            박해종 목사님은 약간 무뚝뚝한 인상을 풍기시지만 실제로는 인정이 많은 분이셨다.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도 어려운 학생들이 많았는지 모른다..... 

          박해종 목사님은 그런 학생들을 잘도 찾아내셨다.

           그리고는 조용히 불러내어 식비를 쥐어주시곤 하셨다.

           나도 몇 번 은혜를 입었다....


           박목사님은 저녁에 일찍 주무시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분으로 유명했다.

           소문에 의하면 아홉시 뉴스 전에 주무신다는 것이었다.

           한번은 급한 일이 생겨서 실례를 무릅쓰고 9시쯤 찾아뵌 일이 있었다.

           주무시다가 나오셨는지 잠옷을 입으시고 놀란 표정으로 나오셨다.

           "이 밤 중에 웬일이야?"

           "아직 초저녁입니다."하려다가 나는 참았다.

           목사님의 표정이 하도 엄숙하고 진지해서 농담이 나오지 않았다.

           "저 분이 한 밤중이라면 한 밤중인게지."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그분의 장례식에서 나는

           내 인생에서 중요한 스승을 떠나보내는 허전한 마음으로 앉아있었다.

           나는 포천 재림묘지까지 그분을 전송하였다.

           단지 후임 총장이 전임  총장을 배웅하는 것이 아니라 제자가 스승을 전송하는 마음으로

           상아남아 한국교회를 굳게 세우기로 기도하였다. (전 총장 김기곤)


김병모 - 삼육동의 영적 야경생

김성익 - 환한 미소가 그립습니다.

김은배 - 향긋한 차 한잔을 오릴고 싶습니다

김일목 - 충실한 삶의 모본을 올리고 싶은 분

김재호 - 참 좋으신 선생님을 추억하며

남대극 - 겸손한 선배, 기도하는 지도자

     소탈하고, 새까만 후배의 양말까지 빨아줄만큼 겸손하시던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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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무흠님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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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자현 - 그리운 나의 아버지!


아버지! 불러 보아도 그리운 아버지가 주님 안에서 잠드신지 벌써 2년이 되어간다. 가끔 아버지의 존재가 견딜 수 없을 만큼 그리워진다. 더 이상 이 세상이라는 같은 공간에 계시지 않는다는 현실이 새삼스럽게 냉정하게 다가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나의 삶 어딘가에 누군가를 의지하고 싶은 절실한 필요을 느끼게 하는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떤 것도 바라지 않으며 아무 것도 요구하는 것 없이, 그저 사랑하고, 그래서 언제나 생각 속에 있기에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자식들을 위해 하나님께 쉬지 않고 중보기도 할 수 있는 존재가 이 세상에 부모 말고 또 있을까?


내가 조금 나이 들고 나서는, 아마도 초등학교 4,5학년 때 부터일 것이다. 주변에서 아버지를 바라보는 시각이 내가 실제 경험하고 느끼는 것과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위의 많은 분들이 느끼는 아버지는 엄하고, 곧고, 말씀이 적고, 그래서 어렵고 접근하기 힘든 분이셨다.


여러 번 신학과 학생들이 "아빠 안 무서워?" 하고 묻곤 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과묵하고 근엄하신 면모 뒤에 숨기어진 아버지의 인간미를 경험하고 많이 따르고 존경했던 신학생들도 여럿 있었지만 말이다. 나의 아버지이셨기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추억들이 더러는 생생하게, 더러는 어렴풋이 떠오르지만 몇 가지만 기억해보려 한다.



재치 있는 분 그리고 모본이 되신 분


우리 집은 일찍 일어나는 것이 일상이었고, 일 년 365일 한결같이 이어졌다. 아프지 않는 한 늦잠이란 있을 수 없었다. 아주 어려서, 아마도 네다섯 살 되었을 때인가 보다. 아버지가 아침마다 깨우러 오시면 나는 이불 속에 숨기도 하고, 오빠와 함께 이불로 아버지를 덮고 못나오게 하려고 애쓴 적이 왕왕 있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마치 구멍을 못 찾아 애를 쓰는 듯 힘든 시늉을 하며, 우리와 한바탕 씨름을 벌이는 식으로, 깨우는 일도 놀이처럼 재미있게 만들어 주셨다. 그분은 사소한 일도 재치 있게 만들어서 우리를 즐겁게 해주었다.


좀 더 성장하여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아버지가 영어로 책을 읽으시는 소리를 들으며 잠이 깨곤 했다. 매일 마루를 왔다 갔다 하며 소리 내어 영어책을 읽으셨는데,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영문 예언의 신을 낭독하신 것이었다. 그런 모습이 영어를 처음으로 배우기 시작했던 나에게는 상당히 강한 동기부여로 작용했던 것 같다.
방학이나 주말이 되면 늦잠 좀 자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 했었다. 그러나 내가 부모가 되어보니 정말 본받을 일을 하셨다고 인정된다.


다정하신 분


우리 집에는 늘 개나 고양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아버지는 짐승들을 한결같이 보살피셨다. 먹이를 챙기는 것, 겨울이 오기 전에 개집을 보수하고 따뜻한 담요을 넣어주는 것, 밥을 따뜻하게 데워서 갖다 주는 것 등의 일을 아버지가 도맡아서 하며 세밀히 챙기셨다. 때로 우리들은 개나 고양이에 대해 깊은 애착을 갖게 되었다가 이들 중 하나가 죽을 때에 경험하게 되는 "죽음" "상실"에 대한 슬픔을 만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아버지는 어린 아이의 수준에서 이해하고 존중해 주셨다. 죽은 개나 고양이를 안고 울다가 포대기에 잘 싸서, 눈물범벅의 편지와 몇 개의 동물과자를 넣고 나면 함께 뒷산에 올라가 땅을 파고 고이 묻어 주셨다. 훌쩍거리며 기도하는 우리와 하나가 되어 간절하고 슬픈 마음으로 기도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앞에 생생하게 보이는 듯하다.


자상하신 분


아버지는 혼자 식사하시는 것을 참 싫어하신 것 같다. 언제나 우리를 불러 앞에 앉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식사를 하셨다. 어쩌면 대화하는 시간을 일부러 만들려고 그러셨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잠시 덕송리에 살면서 도시락을 싸서 학교에 가야 할 때가 있었다. 아버지는 점심시간에 곰보빵을 하나씩 준비해놓고 그것을 미끼로(?) 굳이 대학 연구실로 점심을 먹으러오라 하셨다.


친구들과 점심도 같이 먹고 어울리고 싶은 마음이 여러 번 들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지 못해서, 또 한편으론 곰보빵이 좋아서 사무실로 갔더랬다. 물론 점심을 먹은 후에 학교까지 자전거로 태워주시는 것을 대단히 즐거워하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지금은 이 역시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사진처럼 선명하게 내 마음속에 남아있다.


책을 사랑하신 분


아버지는 책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항상 우리 집에 가장 많이 있었던 것이 책이었는데도 시간이 있으면 헌책방에 다니며 아주 오래된, 절판된 책들을 사서 읽고 하는 것이 취미 중 하나였다. 미국에 계실 때도 마찬가지였고, 한국에 잠시 다니러 나가실 때도 어김없이 헌책방을 찾아 보물 찾듯 희귀한 책들을 사곤 하셨다.


아브라함 링컨을 좋아했고, 이순신 장군을 정말 존경하셨다. 손자들과 같이 예배드릴 때마다 빠지지 않고 예화로 언급되었던 인물이 이순신 장군이었으니 말이다. 아이들은 너무 많이 들어서 그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빙긋이 미소지으며 듣고 또 듣곤 했었다. 이순신 장군의 나라 사랑과 특히 그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늘 강조하였다.


서정적인 분


가을이면 아버지는 아름답게 물들어 떨어진 나뭇잎들을 정성스레 모아 말리곤 하셨다. 두꺼운 책갈피에 끼워 잘 마르고 나면 각양각색의 단풍잎들을 "사랑하는 딸에게..."로 시작되는 너무나 익숙한 어투로 시작하는 편지와 함께 보내 주시곤 했다. 아름다운 계절이 왔음을 또 한 계절이 지나가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랑의 표현이었으리라.


눈물의 기도를 드리신 분


이런 모든 것들 중 가장 강하게 내 맘속에 자리 잡은 모습은 무릎을 꿇고 정말 진지하고 진실되게 눈물로 기도하시는 모습이었다. 오빠가 임파암 진단을 받고, 치료를 시작하고, 항암 치료의 부작용을 경험하며 어렵게 버텨내야 했던 길고 지루한 시간동안 여러 번 이른 새벽에 아버지의 눈물로 아뢰는 기도소리를 들으며 잠이 깼던 적이 있다. 그 엄숙하고 적막함에 잠이 깼어도 자는 척하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었다. 하나님께 매달리는 기도가 무엇인지, 그렇지만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보는 순간이었다.


이런 아버지의 기도는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 계속되었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며 감당키 어려운 고비를 지날 때마다 아버지께 기도를 부탁드렸고, 아버지는 늘상 기도로 우리를 하나님 곁에 묶어두셨다. 때로는 나의 형편과 직면한 문제에 대해 말씀드릴 때 나와 함께 불안해하지도, 동조하지도, 상대를 나쁘다 하지도 않으시고, 그저 묵묵히 경청하신 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함을 상기시키시며 기도하마 약속하셨다. 뭔가 당장 시원한 답이 없다 하여도 나의 감정과 동조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는 그런 차분하고 흔들리지 않는 초연함이 서운하게 느껴지기도 했었으나, 지금 생각하면 아버지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오로지 하나님만 의지하고 자녀들의 문제들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맡기신 것이다.


감사가 넘치시는 분


2012년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시기 전 앤드류스 대학교 근처에서 약 6년 동안 길 건너 마주보며 살 수 있었던 것은 정말 큰 축복이었다. 부모님은 손자녀들이 성장하는 과정을 흐뭇해하며 지며보는 것을 기뻐하셨다. 만날 때마다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께서 너무 과분하게 축복하셨다고 말씀하며, 당신의 손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성장하여 하나님 은혜가운데 유용하게 쓰임받는 도구로 자라나기를 끊임없이 기도하셨다.


육체적으로 나약해지고, 기억력이 점점 쇠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 불편함을 한 번도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지금까지 상상도 못했던 오랜 세월동안 인도하시고 돌보아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얼굴 가득 품고 계셨다. 육체적 힘이 부족해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하게 됐을 때, 또 두뇌회전이 전 같지 않다고 뭔가 부탁해야 할 때, 항상 미안해하며 어렵사리 부탁하시는 모습에서 상반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의 연약함을 보면서 형용할 수 없는 슬픔과 아픔을 느끼기도 했지만, 동시에 겸허히 모든 것을 내려놓는 모습에서 거의 거룩하다 표현하고 싶은 존경심마저 솟아오르기도 했었다.


마지막 이삼년 동안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감사합니다" 였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과 함께 아버지는 그렇게 눈을 감으셨다.


은혜로 사셨던 분


미처 듣지 못한 아버지의 이 세상에서의 인생역경은 아마도 하늘나라에서 더 자세히 들어야 할까보다. 당신 스스로의 삶에 대해 그렇게 많이 말씀하시는 분도 아니셨지만, 그래도 즐겨 말씀하셨던 것이 있다면 6.25 전쟁 시 포로시절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야기의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그런 어려움 가운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지를 말씀하기 위한 서두였을 뿐이었다. 이민군의 포로가 되어 끌려갈 때, 눈에 띄지 않게 밤에만 행군을 해야 했다. 발은 얼고 배는 한없이 고팠다. 동상에 걸려 발가락이 썩어 들어가는 동료들을 보면서 행군이 멎을 때마다 한 시간이고 한 시간 반이고 발이 녹고 혈액순환이 될 때까지 동동거리고 마사지를 하셨다 한다. 그 때 유일한 소원은 따뜻한 방에서 따뜻한 흰밥 한 공기와 소고기국 한 그릇 뜨시게 먹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러면 더 이상 여한이 없겠다고. 그런데 "보라 얼마나 많은 축복을 주셨나?"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은혜에 끝없이 감사해 하셨다.


아버지는 당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교회에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도 늘 감사하셨고, 우리를 교육시킬 수 있는 것을 당신의 노동의 대가라기보다는, 교회의 "장학금"이라고 늘 말씀하시며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함을 늘 강조하셨다.


그리운 아버지


아버지는 내게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는 것을 가르쳐 주셨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죽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셨다. 가끔 미칠듯이 그리움이 밀려오고, 답답함이 엄습해 올 때 "아버지 기도해주세요"하며 매달리고 싶을 때가 있다. 삶의 한 모퉁이에서 나도 모르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어찌할 수 없을 때도 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지막까지 한결같았던 기도대로 우리 모두, 우리 아이들 모두 하나님 잘 믿고 의지하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살다가 하나님 앞에서 재결합하는 날이 속히 올 것을 믿고 바라며, 오늘 나도 무한한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을 알려주신 아버지가 계셨음을....주님 오시는 그 날 꼭 아버지를 만나 그 따뜻한 눈빛을 마주하고 싶다.



박자현(삼육대학교 전 총장 박해종 목사님의 딸. 소아과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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