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가지 리스트 / 하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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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상 앞에 앉는다. 1월이 가기 전에 새해 계획을 세우자, 작정한 참이다. 일 년이라는 귀한 선물을 받았으니 최소한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는 걸까.
일 년 계획을 세우지 않은 지 꽤 오래 되었다. 삶의 방향과 가치에 뚜렷한 변화를 가져다주는 구체성이 없기 때문이리라. 두어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유아무야가 되어버린다. 대부분 내면의 성숙이나 취미를 위한 것들이어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 동기부터 취약하다. 그 내용도 어찌나 초라한지 서너 줄 쓰다가 확 지워버리곤 한다. 새해라는 개념에 붙들린 시간광대라는 무력감도 한 몫 한다.
친구가 자기 발전과 행복을 위한 세 가지 리스트 작성법을 가르쳐주었다. 소유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 위시 리스트(Wish List). 하고 싶은 것들의 목록, 버킷 리스트(Bucket List), 실천해야 할 것들의 목록, 투 두 리스트(To Do List).
잠시나마 두 눈이 밝게 열리고 마음이 환해지는 기쁨을 맛보았다. 머릿속에서 뒤죽박죽 얽혀있던 희망사항들이 리스트에 따라 정리가 되면서 그 일을 확실히 이룰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마치 이 분류법을 몰라서 지금까지 새해 계획을 세우지 못했던 것처럼 느껴졌다. 좋은 리스트를 만들면 실천하는 일도 버겁지 않으리라, 용기마저 났다.
펜을 들고 써내려가는 동안 알게 되었다. 갖고 싶은 것을 차지하려면, 하고 싶은 것을 이룰 수 있으려면, 실천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위시 리스트나 버킷 리스트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긴 시간의 실천과 인내를 요구하는 투 두 리스트를 성실하게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서로 동떨어져 보이는 세 가지 리스트는 유기적인 함수관계로 밀착되어 있다.
목록 작성을 멈추었다. 나는 계획을 세우고 성취하는 데서 즐거움을 얻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지금 이거 하자, 앉은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즉흥적으로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별이 쏟아지는 맑은 날 밤에 뒤뜰에 나가 보름달을 쳐다보다가 인공적인 불빛에 방해받지 않는 달과 별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불빛 없는 코비나 힐스 공원묘지로 달려간다. 한적한 주말 아침에 밥을 먹다가 창문에 쏟아지는 햇빛을 보고 마음이 동하여 우리 샌디에이고 실버 스트랜드 비치에 가서 고운 모래밭 걷자, 하고 나선다. 그러다보니 중요한 일들을 많이 놓치고 그르치며 살았다. 어쩌겠는가. 그냥 생긴 대로, 지금까지 살아온 대로 살자.
아니다. 올해는 조금쯤 계획성 있게 살고 싶다. 몇 가지만이라도 목표를 달성하여 세 가지 리스트를 얻은 보람을 얻고 싶다. 12월 달력을 떼면서 조금이나마 풍요로워진 정신세계를 갖춘 나 자신을 만날 수 있으면 한다.
멈추었던 목록 작성을 다시 시작했다. 신앙과 문학의 성숙을 위한 리스트가 유난히 길다. 나의 삶을 지탱해주는 양대 기둥이다. 이왕이면 올 한해가 아니라 일생 성취하고 싶은 일들을 리스트로 만들어야겠다. 세 가지 리스트를 끊임없이 추가하고 받은 복들을 헤아리노라면 매사에 감사하게 살 수 있으리라.
이렇게 저렇게 꿈꾸는 시간이 그지없이 달콤하다.
미주중앙일보, 이 아침에, 2016년 2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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