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와 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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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와 미라
유지인
화병의 물속에서도 장미는 입술이 하얗게 말라간다
조바심의 물을 스프레이 해준다
물방울이 장미의 숨을 적시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사이
장미는 물속에 둔 몸을 벗어나 공중을 배회하다
무거운 향기로 내려앉는다 장미라는 이름은
가시 속에도 살고 있지만 매번 가시보다 먼저 시드는
꽃잎 그 어디쯤에 있다 매혹은 이파리 끝까지 밀려나 있고
꽃을 놓지 못하는 대궁만 아직 시퍼렇게 견디고 있다
저 견딤에 물 갈아 줄 수 없음은
전시실의 미라가 된 이집트 왕녀 때문이다
왕궁의 호위병처럼 둘러 선 조명등 아래
온몸을 훑고 지나는 관람객들의 눈길 속에서
숨어 잠들지 못한 그녀의 눈 밑 그늘이 짙었다
미라에게 죽음의 무게란 농담처럼 가벼운 법
진흙의 분장과 바람의 대사를 읊조리지 못하는
그녀의 죽어지는 연기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포르말린의 치마를 벗어던지고 어딘가로 달려가려던
기억의 한 컷이 미라의 표정 속에 또렷했다
화병 속에서 장미의 웃음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인데
시든 꽃잎은 물방울 속에서도 빠져나오지 못하고
치사량의 장미 꽃잎을 먹은 젊은 연인들처럼
황금빛 덧칠한 욕망은 미라를 붙들고
불 꺼진 어둠 속에서도 끈질기게 번쩍였다
계간 <시안> 2013년 여름호 발표
웹진 <시인광장> 2013년 9월 재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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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유지인님의 댓글의 댓글
유지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명지원 장로님! 안녕하세요?
다녀가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이리 문향을 남기셨네요
감사합니다
예전 제 등단 시를 심사했던 문정희 선생님은 시의 기능은
교훈보다는 감동, 감동을 넘어서 심미적審美的이어야 한다는 말을 했지요
성경의 교훈적인 면에 익숙해진 제겐 장벽이었지요
바람이 장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건
힘을 빼는 거라고 지금도 창작의 바람속에서 매순간 절감하네요
"모델이 앞에 앉으면 배경은 변모된다.모델이 앉기 전엔 배경의 벽은
그 자체의 아이덴티티(정체성)을 갖고 있어서 앞으로 튀어나온다
그러나 모델이 자리를 잡으면 배경은 뒤로 물러나고 모델의 보완물로서만 존재한다."
로버트 헨리의 <예술의 정신>에 나오는 위 귀절을 좋아합니다.
시인의 눈은 사물의 배경이 되었을 때 심미성을 지닌 시를 쓸수 있음을
잊고 모델을 가린 돌출된 배경처럼 무언가 큰소리로 말하고 싶어하는
창작습관이 튀어나오지 않는지 늘 반성하고 조심하게 됩니다.
장로님 시의 "아직 끝나지 않은 문장" 이라는 말 참 좋아요.
겸손함과 열정이 느껴지네요. 이런 마음속에 좋은 시는 깃들여 오지요
예술의 치명적인 매력은 끝이 보이지 않음에 대한 도전이 아닐까요?
전 여전히 사물의 곁을 기웃거리며 풋내기처럼 서성거리는 걸요
과한 칭찬으로 부끄럽게 하지 않는 공감의 댓글에
감사함과 아직도 시에 대한 청년의 열정을 지닌 것 같아
제 호주머니속 소장된 글을 나누고 싶어 올렸습니다.
늘 강건하시고 좋은 시 많이 쓰세요
유지인님의 댓글의 댓글
유지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정무흠 안녕하세요? 한선생님!
사람과 글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 했더니 역시 미주재림문협 회장님이셨군요
저에 대한 관심과 제의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근데 어쩌죠? 저는 현재 한국재림문협에 소속되어 있답니다.
선생님 댓글을 보니 예전 생각이 나네요
제가 처음 한국재림문협에 딱 한 번 참석하고 여러 사정이 생겨 계속 참석을 못했는데
현재에도 회장직을 맡고 계신 목사님께서 거의 2년 넘게 카톡으로
잊을만하면 기억하게 만드는 음악의 후렴구처럼 안부를 물어오셨지요. ㅎㅎ
시에 앞서 사람에 대한 목사님 마음의 정성으로
지금은 열성적인 활동은 못하지만 함께하려 노력한답니다.
미주재림문협도 선생님의 열정과 헌신으로 좋은 시인과 작가들로 북적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치지 않도록 힘 주시고 건강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