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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보라속으로 떠나간 스님:섣달 그믐날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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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그믐날밤 : 부제 - <눈보라속으로 떠나간 스님>

 


이튿날이 음력 정월 초하룻날인 설날이라

멀리 나갔던 사람들이 다들 고향으로 찾아드는 섣달 그믐날 밤이었다.

집집마다 내일있을 차례를 지내기 위해 음식을 만든다, 그동안 객지에

나갔던 사람들과 만나 회포를 푼다하여 분주하였다.

그런 정겨운 자리에서 잠깐 바람을 쏘이러 나왔다가,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어릴 때부터 멱을 감던 추억이 어린

까치소가 있는 강으로 향하게 되었다.

푸르고 맑은 물이 오랜 세월을 쉴 새없이 부딪혀 깊은 소가 만들어지도록

하는데 일등 공신을 한 범바위가 어둑신해지는 강을 눈만 끔벅이며 엎드려 쉬는

진짜 호랑이처럼 말없이 굽어보고 있었고, 겨울이라 물은 그다지 많지 않았으나

여전히 투명한 물을 거느린 까치소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이지러져 손톱만해진 그믐달이 아주 조금씩만 비추다가

추운지 먹구름 사이로 금방 숨곤 하였고,

겨울 삭풍은 북쪽으로부터 매섭게 다가와 몸을 한껏 움추려 들게 하였다.
주위가 조용하고 무엇보다 맑은 공기 탓에 제법 멀리 떨어진 이웃 마을에서

나는 개 짖는 소리가 아련하지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처음에는 홍수가 나서 황톳물에 떠 내려와 새로 자리잡은 작은 바위인 줄 알았다.

어두워서 잘못 보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 눈을 비비고 쳐다 보았다.

그러나 틀림없이 웬 작은 바위가 강 기슭에 자리잡고 있었다.

수년동안 보아오고 수영을 처음으로 터득하여 잊을 수 없게 된

눈에 익은 강주변은 산 쪽으로 붙박힌 덩치 큰 범바위 이외에는

따로 작은 바위는 없었던 탓에 다소 의아하였다.

그러나 별 생각없이 겨울이라 물이 마른 강 가장자리로 느릿느릿 다가갔다.

그런데그 작은 바위가 슬며시 일어서는 것이었다.

 

 

스님이었다.
바랑메고 목탁 갖추고 이 추위에 시리지도 않는지 흰 고무신을 신은 스님이었다.

게다가 바위인 줄 알았던 그 스님은,

"나무아미 타불"

하며 의젓하게 염불까지 외는 것이었다.

뜻하지 않은 의외의 상황에 다소 당황했다.

"스님, 저는 기독교인입니다만..."
스님의 일방적인 염불외임이 못마땅하다는 태도로

그러나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은 채 스님에게 대뜸 일격(?)을 가했다.
"부처를 믿으시던,예수를 믿으시던 다 같이 죄많은 중생이지요..."

라며 스님은 함부로 범할 수 없는 근엄한 표정으로, 그러나 조용한 어조로 말을 받았다.

그 말에 적절하게 댓거리할 말을 생각해 봤으나 얼른 떠오르지 않아 잠시 스님을

멍하니 마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부대끼며 살아가면서

탐내는 세상의 온갖 헛된 것들을 이미 한참 초월하고도 남은 듯한 무심한

두 눈동자가 그믐달 미미한 달빛 아래이건만 고고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스님, 혹시 저 까치소에 빠지려고 했던 건 아닙니까?"
스님의 범접할 수 없는 태도를 허물어뜨려, 캄캄한 섣달 그믐날 늦어 가는 밤에 

쓸쓸한 강변에서 수상하게 앉아있는 이유를 물으려고 엉겁결에 생각한 말이 그 말이었다.
"허허허-"

호탕하게 웃더니,

 " 아마 그럴 작정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며 금방 웃는 얼굴이 정색하는가 싶더니 뜻밖의 말을 하였다.

"여기는 제가 살던 옛동네입니다.

실은 아까부터 저는 처사님께서 누구신지 알아채고 있었습니다.

어릴때 저랑 같은 학교에서 삼년을 같이 배웠는데 모르시겠습니까?

저의 세속 이름은 기호입니다. 정기호....."

 

 

'봄나들이'라는

그 쉽고도 짧은 동요 하나를 끝까지 못 불러 화가 난 담임선생에게 

회초리로 손바닥을 맞던,

좀 모자라던 정기호....
원래 남의 집 행랑살이를 하던 정기호의 부친은 한쪽 다리가 없어

목발을 짚고 다니며 돈이 없어 끼지도 못하는 노름방이나 기웃거리며 마냥 놀고 있었고,

그나마 품을 팔아 식구들을 먹여 살리던 귀가 어두워 말을 못하는 어머니가

그만 일찍 죽어 생활이 어려워지자 학교도 그만두고 어딘가에 가서 빌어 먹는다는

소문이 바람따라 들려오던 정기호....

그 사람이었다.

 

 

아마도 사람구실을 못하고 종내에는 어딘가에서 굶주려 죽었을 지도 몰랐을,

내 기억에서 하얗게 지워져 다시 까맣게 잊어 버렸던 정기호....
긴 세월과 함께 수십년 먹어온 절 밥이,

아니 그가 전심전력으로 받들어 모셔온 부처님이

그를 이렇듯 훌륭한 사람(스님)으로 만들어 놓을 줄이야....

너무나도 반가운 마음에 덥썩 손을 잡아 끌면서 대뜸 반말로

추운 강가에서 떨지 말고 집으로 가자고 하였으나 그는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처사님께서 그렇게 반가워 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처사님의 온 가족들이 오랜만에 함께 모여 있을

오붓한 자리에 저같이 비천한 땡추가 어찌 감히 끼어들어 폐를 끼치겠습니까?"

라며 단호하면서도 정중히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런 그의 말에 다음 할 말을 찾지 못해 가만히 서 있었다.

세상의 온갖 때가 덕지덕지 묻은 나로서는 모르긴 해도

이미 어떤 도통의 경지에 이르른 듯 보이는 그를 강권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일었다.

북쪽 먼 곳에서 만들어졌을 바람이 다시 매섭게 강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나 먼 옛날 어린시절의 친구와 같이 맞는 겨울바람은 더 이상 춥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왠지 울먹울먹한 느낌이 마음을 아프게 하고있었다.

한참동안 침묵이 계속되다가,
"그럼 저는 이만......"

하며 합장을 하는 그에게 엉거주춤 맞절을 하였다.

이어 그는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민가는 물론 절이나

암자같은 곳도 없는 형제봉 높은 마루턱을 향해 깜깜한

어둠속으로 흔적없이 사라져 갔다.

 

 

그가 사라진 산골짜기 반대편에는 어릴때부터 열심으로 다녔던

교회(부활절이나 성탄절 같은 때 달걀이나 과자를 얻어먹으려고 어쩌면

스님이 된 기호도 일년에 한두번은 나왔던) 종탑위의 십자가가 희미하게 서서 

떠나가는 기호를 걱정스러운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떠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초저녁부터 심상치 않던 하늘이

사태같은 눈송이를 내리 퍼붓기 시작했다.

그가 신은 얇은 흰 고무신이 갑자기 버럭 걱정되었다.

아마도 금방 발이 얼어들어 오리라....

집으로 가서 기르는 개를 앞세우면 강추위와 눈보라가 한데 뒤섞인

이 한겨울밤 산속에서 얼어 죽을 지도 모를 그를 쉽사리 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일순 강하게 일었지만....,

그만 두었다.

 

 

어차피 그는 이런 어둠과 추위와 배고픔과 쓸쓸함 같은 온갖 고초에 익숙해져 있음에,

아니 더 나아가 오히려 그러한 어렵고 고통스러운 모든 것들을 참고 즐기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는 이미 바람이, 홀홀히 재도 넘고 들판도 쉽사리 달리는 무심한 바람이 되어 있음에랴....

 

 

그리고,
 '나리 나리 개나리-'

로 시작되는,
초등학교 1학년들이 쉽게 부르는, 
하지만 그에게는 좀 어려웠던 노래를,
도통한 그는 아마 흔하게 쓰는 말로
식은 죽 먹기로 쉽게 꿸 수 있으리라는 엉뚱한 생각이 동시에 들자,
칠흑같은 어둠 속으로 휑하니 멀어져 간
그에 대한 염려도 봄눈 녹듯 사라지고 있었다. 
(섣달 그믐날 밤의 꿈결같았던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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