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드시죽어야 반드시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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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이 출애급한지 (유월절 이후) 만 오십일이 되는 오순절날 모세는
시내산으로 불려 가서 율법을 받고 내려오던 중에 금 송아지 사건으로
레위인 (율법의 동역자들)을 동원하여 살륙한 숫자가 삼천명 가량이다.
출애급기 32장 28절의 이야기다.
유월절 양이신 예수가 돌아가신 후에 똑같이 오순절이 되는 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의 불을 받았던 복음의 동역자들이
새 술에 취한듯이 복음을 전하다가 회개한 이방인들에게 침례를
베푼 숫자가 다시 삼천이라고 전한다.사도행전 2장 40절의 이야기다.
율법으로 죽이신 숫자를 복음으로 살리시는 기막힌 과정이다.
로마서 5장의 중요한 요지중에 하나는
율법을 지키지 못한 한 행동으로
육신의 조상인 아담이 죽었고 그 죽음속에 우리가 다 죽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복음이 온 후에는 그 죽음을 대신 죽어서 첫열매가 되신
둘째 아담에 속하여 그렇게 죽은자들이 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복음은 비유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아담때문에 죽어 있는 자들이 어떤 율법의 행위로 다시
살아 난 것처럼 행동하는
그것을 황토장한 무덤 또는 회칠한 무덤이라 했다.
바리새인을 헐뜯어려는 의도라기 보다 죽은자의
현실을 설명하시려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의 장례를 치르고 오겠다는 제자에게
죽은 자들로 죽은자를 장사하게 하라는 말씀도
하시는 것이다.
흙에서 나온자를 죽이지 못하면 하늘의 것으로 덮어 씌울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 할수가 없다.
율법은 그 육체를 죽이는 칼이요 도륙의 기능이다.
그것을 고린도 후서 3장에는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율법 조문" 이라고 시작하면서
당신의 사랑하는 종 우리모두가 존경하여 마지 않는 지도자
모세를 감히 율법을 통해서 죽음의 직분을 맡은자라 소개하고 있다.
그런 기능이 나타난 사건이 금송아지 사건이다.
율법의 기능은 죽이는 기능이라고 고후3장은 몇번이고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그 기능이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그 기능아래 있지 않다"
고 하는 갈라디아서의 해법같이 고후 3장에는 더 나은 영광이라고 소개한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먼저 나온 술이 맛이 있지만 나중에 나온 술
예수가 퍼다 주라고 하는 그 술이 더 맛있는 술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모세의 기능은 육신을 죽이는 직분이고 율법을 이용한 직분의 영광이다.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고
계속해서 진행된 내용에는 그 율법의 기능을 수건으로 가린 기능이라고
하기도 하고 장차 없어질 영광이라고도 했다.
그 시기가 예수 그리스도 즉 복음이 등장하는 시기이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고후 3장의 이 결론속에서 우리는 율법의 영광에서 다시 복음의 영광으로
옮겨갔다는 말을 이해해야 하고
더 나은 영광을 전에 있던 영광에 담지 말라고 하는 의미에서
"새 술은 새 부대" 에 라는 말씀이 있는 것이다.
육신의 연약함과 죄성을 담아 두려고 한 것이 율법이요
영의 완전함을 우리 마음에 담아두려고 하는 보혜사가 성령이시다.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이루시려 한 역사는 우리 육신의 허물어 짐이다.
그 허물어 짐에서 다시 세우실 분이 유월절의 모세가 아니고
십자가의 유월절 어린양이신 것이다.
살리던지 죽이던지 당신이 우리가 할 일이 아니다.
영으로 살리기 위해서 육신을 죽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역사를 믿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성경이나 예신은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찾아서
"심봤다!" 소리치는 것이 아니라
쓰여져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운 과정을
이해하면서 십자가 앞에서 "심봤다" 하며 고개 숙이는 쪽이 더 나은 영광에
속하는 쪽이 아닐까.
더 나은 영광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씁하신다.
죄를 죄라고 지적하는 매매되지 않는 사람이 되기전에
네 눈에 들보를 먼저 빼라 (육신의 연약함에서 영으로 옮겨 가는 일)고
말씀하신다. 그리되면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대접하게 될 것이다.
심심하면 우리는 율법속에 복음이 있다고 생때를 쓰게 된다.
율법은 죽이는 것이요 영 (복음)은 살리는 것이라는 사도의
말씀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렇게 될 수가 없지 않은가.
또 하나 율법은 폐했다고 하는 의미로 성경은 말하지 않는다.
다만 구속의 과정속에서 당연히 있어야 할 과정임을 말하고 있을 뿐.
다만 이 질문에 대답은 각자가 각자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속하고 싶어신가?
처음 영광인가 아니면
나중의 더 나은 영광인가
율법의 상대는 내 자신이고
복음의 상대는 언제나 내 이웃이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성경은 죄도 복음도 다 누룩이라고 소개한다.
율법에 육신을 버물러 놓으면 그 죄가 부풀어 진다.
로마서 7장의 중요한 요지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율법으로 죽은 자를
다시 어린양의 피에 적셔놓으면 의로운 행동이
부풀리듯이 늘어나게 되는 까닭이다.
늘 율법에 속한 자신은 교만에 가깝도록 당당하던 사도 바울이
복음 안에서 날마다 날마다 죽어면서도 나는
"죄인중의 괴수" 라고 깨닫는 이유를 한번 곰곰히
생각해 볼 일이다.
처음 영광에 들어 가는 것보다
나중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더 어렵고 불가능하다.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를 가주고
속옷을 달라하면 겉옷도 주고
왼쪽뺨을 맞으면 오런쪽도 돌려서 세워주는 일
아무나 못한다.
해지는 시간부터 해지는 시간까지는 할 수 있지만...
그냥 그 은혜가 감사하고 감사하고 감사하다는
노래만 부르고 살아도 행복한 세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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