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nscendent God , Tangible God and Immanant God-삼위 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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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집아이들이 어린시절엔 사내아이들과 똑같이 어머니에 대한 그림을
자신들의 성장하는 과정에서 수시로 변하는 잣대로만
보게 된다. 그 잣대가 변하다가 자신들이 어머니가 되어 아이를
기르면서 계집아이는 어머니에 대한 그림을 완성하게 된다.
정작 어머니는 가슴을 열고 온갖 고생과 고초를 통해서 어머니는
이런 것이라고 가르쳤어도 그것을 몸으로 이해하는 날은
자신이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의 역할을 하면서 완성이 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또한 믿음이 성장하는 노상에서
창조주 하나님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나름의 그림을 그려가게 된다.
어차피 불완전한 그릇으로 완전한 대상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한계이어서 장님들이 코끼리 만지듯이 부분적일 수 밖에
없지만 성경은 특별한 계시이다.
성경이라는 그릇은 완전한 그릇이고 또 그 그릇에 담긴
삼위의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들이시다.
쉽게 말해서 성경이라는 완전한 그릇에 담겨있는 완전한
하나님이 인간이 관찰하는 관찰이라는 불완전한 안경속으로 들어오면
본인은 잘 본 것 같아도 완전한 것이 사라지는 순간이 된다.
그래서 일찌기 양심있는 학자들이 성경속에서 성경의 주제를
바라보고 성경이라는 잣대만을 써서 발견한 것이
자신들만의 잣대로 성경을 요리하는 형식으로 가공한 것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그것이 바로 루터가
그리고 현대의 기독인들이 말하는
Sola Scriptura 이고 exegesis 라고 하는 성경 연구방식이다.
가로 세로 그리고 높이
에너지 속도 질량
액체 고체 기체로 하나님을 설명하고자 하는 시도를
나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성경연구 방식을 바깥의 눈으로 성경을 들여 본다고 하는 의미로
eisegesis 라고 한다.
언제나 오류가 넘칠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가 없다.
어쩌면 전자보다도 후자 (eisegesis)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맟추었기 때문에 더 가깝게 이해될 수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계시적 가르침은 아닐 수 있다.
성경은 오직 인간의 구속이라는 흐름속에서만
만사를 논하고 전개하는 책이다.
거기에 비록 바람과 물과 고체 또는 기체의 이야기가
나온다 해도 성경은 언제나 구속적 의미에서
시작하고 끝을 맺고 있다.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는
까마득한 곳에서 그분의 모습이라도 보게되면
인간이 죽을 수 있는
두려움에 둘러 싸여있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그 아들이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우리와 같은
형상으로 오셔서 그렇게도 두렵던 하나님의 존재를
바꾸어 놓으시고 또 원래의 아버지도 그런 분이라고
일러 주신다.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이가 곧
아버지라고 소개하신다.
그리고 그 사랑의 완전한 표현이요 완전한 구속의
기능이 (아버지의 사랑과 아들의 죽음) 우리 가슴과 믿음속에
내재 하도록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오신 분이시다.
계시록의 마지막 부분에 오직 어린양이신 아들만
나타나는 것을 보아서 아마도 삼위라는 분이 한분에게서
세가지의 기능이 행사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그런 추측이 구속이라는 큰 그림에서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예수께서 하신 말씀에 우리는 충실하면 좋을 것이다
일찌기 초대교회의 교부들 사이에서 그리고 지금의
신학자들 사이에서 삼위일체는 어느누구도 완성할 수 없는
그림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으로 변하여 우주를 다스리는
왕의 자리에 함께 앉게 되면 어머니가 되면서 어머니를
알게 되는 이땅의 어머니 이야기 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삼위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버지 하나님은 transcendent 하신 분이시고
아들은 tangible 하신 분이시며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tangible 했던 하나님의 유전자를 키워가시는 immanant 하신 분이라는
예수님의 설명을 받아들이면 간단한데...
그것이 기능적으로 그리고 시간적으로 점진하는
성경의 주제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짐진법으로 소개되고
있는 것도 철저하게 성경적인데...
Transcendent God (아버지 하나님)
Tangible God (아들 하나님)
and Immanant God (성령 하나님)
이제 이 세분은 어디에서든지 계시고
언제라도 우리 곁에 계신 분이시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왜 성경에서 주워들은데로 보지 못하고 제나름의
분해와 분석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캐려 하실까?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
그때까지 성경이 말한 만큼만 이해하고
기다리면 좋을 텐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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