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주워 들었소? 삼위 일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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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 주워 들었소?
건강에 관한 글을 하나 올렸더니
여전히 호기심이 많은 어떤 장노님이 대뜸
여전히 호기심이 많은 어떤 장노님이 대뜸
내게 던진 말이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질문이었고
며칠을 그 질문 하나로 내 생각이 분주했다.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질문이었고
며칠을 그 질문 하나로 내 생각이 분주했다.
그렇다.
어린시절엔 어머니에게서 주워 듣고 학교에 가서는 선생님에게서 주워 듣는다.
대학에 가서는 교수님과 도서실에서
주워 듣는다.
요즘엔 신문보다 훨씬 빨리 실시간으로 주워듣는
매스콤 시대가 도래했고
온갖 궁금한 질문들에 대한
요즘엔 신문보다 훨씬 빨리 실시간으로 주워듣는
매스콤 시대가 도래했고
온갖 궁금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다양하게 주워들을 수 있다.
그렇게 일반적으로 주워듣는 경로를 거치지 않고
실험실에서 현미경으로 주워 듣거나 실험쥐를 통해서 주워듣는
특별한 의학적 정보도 있다.
그리고 사과가 익어서 떨어지는 과수원에서
뉴턴이 주워 들었던 순전히 관찰에서 오는 정보도 있다.
그리고 사과가 익어서 떨어지는 과수원에서
뉴턴이 주워 들었던 순전히 관찰에서 오는 정보도 있다.
문제는 그렇게 주워 들은 것들이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든지 일어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과학적 진리라고 여긴다.
하나님에게 직접 주워듣고
백성에게 그 말을 전하는 자들을
우린 선지자라고 한다.
그 선지자들의 주 임무는
앞으로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내용이지만...
아버지에게 들은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우린 그를 아들이라고 믿는다.
누구에게든지 일어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과학적 진리라고 여긴다.
하나님에게 직접 주워듣고
백성에게 그 말을 전하는 자들을
우린 선지자라고 한다.
그 선지자들의 주 임무는
앞으로 메시야가 올 것이라는
내용이지만...
아버지에게 들은 말씀대로
행하는 자가 있었는데
우린 그를 아들이라고 믿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그래서 그가 말한 바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의미도
자신이 하려고 한 일을 다 이룬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하라고 한
그것을 다 이루었다는 말일 것이다.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그 아들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사명을 받아
순교자의 운명에서 제명되는 복을 누린
제자가 하나 있는데
그가 요한이다.
그래서 그가 말한 바
"다 이루었다" 라고 하는 의미도
자신이 하려고 한 일을 다 이룬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하라고 한
그것을 다 이루었다는 말일 것이다.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고...
그 아들에게서 주워들은 이야기를
전하는 사명을 받아
순교자의 운명에서 제명되는 복을 누린
제자가 하나 있는데
그가 요한이다.
그분이 말씀한대로 기록한
복음중의 복음이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의 가장 두드러진 가치중에
하나가
아들이 아버지를 그리고
아들이 성령 하나님을 직접 소개하는
내용들이다.
아버지를 그분은 이렇게 소개한다.
"오직 하나님에게서 온 자만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그리고 성령이 오실것과 성령이 할 기능을 아래와 같이 친히 알려준다.
"아버지께서 가지신 것은 다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성령이 나의 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 말을 다시 설명하자면 아버지의 것이 아들의 것이고 아들의 것을 가지고 성령이 다시 가르쳐 줄
것이라는 의미이다. 아버지의 것이 아니면 행하지 않고 성령은 아들의 것이 아니면
알게하거나 가르치지도 않을 것이란 말이다.
아버지의 것과 아들의 것과 다시 성령이 말하는 그것이 모두 일체가 되어 있는데
그 일체가 우리의 구원의 역사이다.
형용을 볼 수도 없는 아버지 그리고 들을 수 도 없는 아버지를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으로 소개하기 위하여 오신 아들 예수를
다시 우리의 우리의 마음속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하는 성령의 역사가 삼위의 역사이다.
하나이면서 셋의 기능인가 아니면
셋이면서 하나의 기능인가를 우리는 헷갈려 하지만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하나님이 셋이면서 셋의 기능이 한가지 목적으로
수행 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궁극에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신"
아버지의 사랑이 아들에게서 표현이 되고 그 표현된 사랑이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 마음에 믿는것으로 존재하게 될 때
거기 영생이라는 열매가 맺게 된다는 말이다.
성경은 궁극에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과학적으로, 생물학적으로 또는 창조적으로
바라보게 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의 존재를 오로지 구속적으로만 바라보도록
끌어 가는 것이 성경이다. 그 이상의 궁금한 것들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롭게 주실 것이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
우리가 아들에게서 주워들은 아버지에 대한 설명과
성령에 대한 설명과 그리고 성경에 대한 설명에 충실한다면
구속이란 우리의 것으로 아주 가깝게 닥아 온다.
삼위 일체설 어디서 주워 들었소?
예수한테서?
그렇다면 틀림이 없을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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