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를 경험하다 / 하정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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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오후, 코비나 힐스 공원묘지(Covina Hills Memorial Park)에 흐르는 햇볕이 밝고 따뜻하다. 시부모님 함자가 들어있는 동판 옆 잔디 위에 무릎을 꺾는데 마음이 제 먼저 철퍼덕 주저앉는다. 힘들었구나. 그러자. 오늘은 이렇게 살살 가만히 살자. 내가 왜 여기에 왔을까. 집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나도 모르게 이곳에서 멈추었네. 쓸쓸한 마음 달래러 왔나. 아니다. 부모님 묘에 대고 외롭다 토로할 수 없다. 인생무상을 느껴서도 아니다. 돌아가신 부모님 앞에서 나 살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은 좀 그렇다. 지친 몸과 맘이 쉼을 얻기 위한 것도 아니다. 자동차가 데려왔다고 해두자. 아니다, 그냥 여기에 오고 싶었다고 말하자. 이곳에 오면 마음이 비워지는 경험을 한다고, 솔직하게 말하자.
그새 새로운 주인들이 들어와 곳곳에 동판 석판 문패를 달았다. 사람이 땅속에 눕는 행위가 새삼 귀하게 여겨진다. 나도 언젠가는 이들의 이웃이 될 것이다. 이렇게 누워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가족이 새삼 고맙다.
산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관계망을 늘리고 튼튼히 하는 일이겠다. 살다보니 그 관계가 엉키고 망가지는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 무덤가에 앉으면 그렇게 단절된 관계로 인한 상처가 일순간에 다독여진다. 모든 것이 끊겨 고요한 장소이어서인가. 죽음 앞에 미련 없이 굴복하는 인생사가 조화롭고 아름답다. 삶에는 이유와 변명이 많지만 이곳에서는 그것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 아무도 시비를 걸지 않고 변명한다 해도 들을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사는 날까지 열심히 사는 거다. 이곳에 누우면 만사가 편해질 터이니. 편안하고 고요한 시간, 그때까지 미루어도 늦지 않으리. 우선은 이렇게 살자. 아픔도 슬픔도 달게 맞이하면서.
오전에 로즈 힐 공원묘지에 가서 두 남자를 만나고 오는 길이다. 미스터리는 성품이 서글서글하여 기분 좋은 사람이다. 커다란 눈동자에 선량함이 가득한 사람. 베니스 비치에서 미술품을 파는 그는 자신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늘 맛난 샌드위치와 드링크를 대접했다. 바닷가 경치의 다양한 변화에 대하여 스스로 감동하여 얘기해주던 사람. 그가 골라준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이 집안 곳곳에 있는데. 그는 이제 떠나고 없다. 벌써 2년 전이네. 한 여름날, 두 다리에 기운이 없다더니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에 입원한지 며칠 만에 허망하게 가버렸다. 50중반에 사랑하는 아내와 두 아이는 어떡하라고. 뇌출혈이었다.
몇 블록 떨어진 언덕길에 누워있는 미스터 김 앞에 서니 머릿속이 텅 빈다. 불과 몇 개월 전에 그는 이곳에 왔다. 문패도 아직 없다. 만 50세. 한의사가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의 병을 모두 다 고쳐주겠다더니. 누나,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아, 그러다가는 일찍 죽어, 맨날 나를 구박하더니 지가 먼저 가버렸다. 제 발로 병원에 걸어 들어갔다가 주검이 되어 나왔다. 잠든 듯이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니 기가 막혔다. 눈꼬리에서 흘러나와 귀밑까지 이어져 하얗게 말라있는 소금기를 아무도 몰래 닦아주면서 문득 서러웠다. 참 속절없다. 그는 병원에 입원해있는 동안 두 번의 심장마비를 일으켰다. 그는 콘트롤할 수 없는 자신의 심장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끔찍하게 아끼던 아내와 아이들을 두고 어떻게 이곳에 올 수 있었을까.
어머니 아버지의 묘소에 오면 언제나 마음이 평안해진다. 어머니는 당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아셨을까. 기운이 성성하실 때였는데 느닷없이 말씀하셨다. “셋째야, 서방도 자식도 없는 니 시누 잘 부탁한다.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는 불쌍한 병신 니 막내 시동생 잘 챙기겠다고 지금 나한테 약속해라. 그래야 내가 눈을 감는다.” 나는 웃으며 어머니도 참 별 소리 다하시네요, 했다. 바로 그 후, 어머니는 치매에 붙들려 세상을 잊으시더니 맥없이 돌아가셨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가신지 5년 후에 잠드셨다. 아버지는 내게 여러 가지 고운 추억을 많이 남겨주셨다. “내가 우리 셋째한테 돈을 좀 많이 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돈을 벌 수 있을까. 늙고 병들었으니 그것은 하마 물 건너간 꿈이겠지. 하지만 내가 너에게 정말로 좋은 선물을 하나 주마. 셋째 네가 한국에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내가 발견했어. 우리 집 뒷산으로 나있는 신작로에 서있으면 네 고향으로 가는 버스가 하루에 한 대씩 오는데 이천 원만 주면 된다. 비싼 돈 들이고 위험한 비행기 타지 마라. 친정 식구 보고 싶으면 언제든지 그 차타고 휘휘 다녀오면 돼. 비행기로 가는 시간하고 똑같이 걸려. 아무에게도 말 안했으니 너만 알고 있거라.” 하셨다. 어느 때는 마음이 섬뜩해지곤 했다. 동네 뒷산으로 걸어 올라가 그 길에 서서 기다리면 고향으로 가는 버스가 정말로 올 것만 같은 생각이 들곤 했다. 매사에 정확하고 기억력이 비상하신 아버지가 노래처럼 똑같은 말씀을 여러 차례 하시니 진짜라고 여기고 싶은 것이었다. 버스로 갈 수 있는 길이라면 밤새워 걸어서라도 가고 싶은 고향 아닌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나중에야, 한참 후에야, 나는 가슴을 쳤다. 당신이 고향에 가고 싶으셨던 거구나. 나보다 아버지였구나. 이제 마지막일지 모르니 고향에 한번 보내다오, 라는 메시지였구나. 나는 왜 그렇게 미련했을꼬. 아버지는 왜 “셋째야, 나 고향 한번 다녀오고 싶다. 선영들 돌아보고 아직도 살아있을랑가, 고향땅 친구친척들 만나보게 한국에 나 좀 보내다오.” 하지 않으셨을까. 왜 “동네 뒷길에 내 고향 가는 버스가 있다.”고 하지 않으셨을까. 당신의 셋째 며느리가 미련퉁이라는 것을 진즉 아셨을 텐데. 아버지는 멈추지 않는 장기출혈로 돌아가셨다. 대장암으로 투병 중이어서 유난히 통증에 약한 아버지가 고생하실까봐 염려했는데 마지막까지 고통 없이 지내다가 편안히 눈을 감으셨다.
시간이 훌쩍 흘렀다. 어느새 바람이 싸늘하다. 일어나기가 싫다. 살아서 무얼 하자는 것일까. 무엇을 위해 삶에 아부하며 매달려야 하는 걸까. 글을 쓴들 대수일까. 추수문장(秋水文章), 군더더기 하나 없이 잘 된 글을 쓴다한들, 저 먼지 한 올만도 못한 것을. 잘 쓰고 싶어 머리 쥐어박을 일 아니다. 그냥 설렁설렁 하자. 사는 일도 글 쓰는 일도.
오늘, 망자 4명을 만났다. 마음이 평안하다. 살아있는 사람들을 만나느라 이곳저곳 옮겨 다니며 네 탕을 뛰었다면 내 몸은 지칠 대로 지치고 마음은 여지없이 허망해졌을 것이다. 아, 알았다. 오늘은 나 혼자서 일방적으로 말을 했다. 상대로부터 아무런 지천도 충고도 비난도 듣지 않았다. 그래, 칭찬과 격려조차 때론 피곤하지. 그래서 어쩌자는 건가요. 이대로 내버려 두세요, 싶은 때가 많지 않느냐.
그렇구나. 이제부터는 때때로 죽은 사람인척 하자. 상대방의 말꼬리를 자르지 말고 잠잠히 들어주자. 그는 내 반응이나 위로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그저 토로하고 내려놓고 싶을 따름이거늘.
사는 일 글 쓰는 일, 천천히 쉬엄쉬엄 하자. 삶이 영광이 되든 치욕이 되든 죽는 것보다 낫다니 그대로 받아들이자. 죽는 것은 이 땅에서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기회를 잃는 것이다. 진정 슬픈 일이고말고.
네 분의 망자를 추억하며 죽음 같은 고요를 경험한다.
펜문학 2014년 11/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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