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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에는 킹스파라는 찜질방이 하나 있는데 그 시설이나  실내의

분위기가 한국의 어떤 찜질방 보다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을 뿐 아니라

스파 문화에 익숙한 동유럽 출신의 이민자들에게도 이 찜질방은 대단한 인기를

끌고있는 가히 시카고의 한 명물로서 자리잡고 있다.


모처럼 친구가 나를 만나러 시카고엘 왔는데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일정에 이 찜질방이

있어서 다행이었고 이른 오후부터 한나절을 보내기 위해서 그곳을 찾았다.

일행 여섯이서 우선 향토방에 들어가서 딩굴기로 하고 누웠는데 한 백인 여성이

문을 열고 들어 오더니 다짜 고짜 "six mothers and six Korean daughters!" 라고

떠들어 댄다. "여섯명의 어머니와 여섯의 한국인 딸들" 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일어나 앉아 물어 보았다.


덩치가 크고 매우 건강미가 넘치는 사오십대의 그 여인이 자신을 자세하게

소개하기 시작한다.

자신은 오하이오의 신시내티  (차로 다섯시간 거리) 에서 왔으며 한국인 여자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는데 자신과 함께온 일행으로는 한국인 아이들을 입양해서 키우는 다른 다섯

엄마들도 있다고 한다. 그 여섯 엄마들이 여섯 아이들을 데리고 시카고에 와서 한국적인 냄새를 맡아 보기

위해서 사박 오일의 일정으로 왔다는 것이다.


얼마 있지 않아서 나머지 다섯 엄마들이 들어 오고 그 뒤를 따라서 우리의 얼굴과 피부를 닮은

고만고만한 십대의 여섯 한국 입양아들이 들어 왔다. 행여 아이들이 피부가 다르고 얼굴 생김새가

달라서 외롭고 열등한 의식을 갖게 될까봐 그들은 아이들이 매우 어린 시절부터 서로 한국 입양아의

모임을 갖게 되었고 십년이 넘도록 그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입양한 아이들을 위해서 배우고 의논하고

함께 여행도 하는 아주 가까운 사이들로 발전을 했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입양아들 끼리

친구를 사귀며 똘똘 뭉쳐서 사는 쉽게 깨어질 수 없는 화기 애애한 공동체를 건설한 것이다.


내나라 내민족 내교회 그리고 내 가족이나 내 자식들이 아닌것은 어떤 것이라도  쉽게 들어 앉을 수 없는

우리들 배타적인 시선에 그들이 천사처럼 화사한 얼굴로 입을 열고 자신들이 데리고 온 낮설었던

아이들을 위해서 쏟아내는 어머니의 사랑이 한편으로는 신기하고 또 한편으로는 한없이 부끄러운

기분을 주기 시작했다.


오직 자기들의 아이들을 위하여 알고자 하는 그들의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면서도 나의 어깨는 무엇인가

점점 무겁게 억누르고  있음을 감지했지만 한시간 정도 왁자지껄하게 떠들던 그들이 다시 아이들에게

돌아가기 위하여 자리를 뜬 후에야 그것이  부끄러움과 고마움과 존경의 무게였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나는 사실 이곳 카스다에서 부르짖는 십사만 사천이나 재림 신자들이 재림을 준비하고 또 심판을 피하기 위하여 말하는

그 거룩의 의미들이 그냥 구름을 잡는 것같은 모호한 이야기들로 읽혀진다.


아직도 사마리아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어머니를 잘못 만나서 길바닥에 버려진 나를 닮은 핏덩이 들이

즐비할 것인데


아직도 내가 다니는 교회에는 숱한 인고의 세월을 보내며 말년에  혼자가 되신 허리 꼬부라진 할머니들이

어쩌면 십년도 채 남지않은 날들을 날개 부러진 새처럼 파닥거리며 기도하고 찬미하고 억지로라도 미소지으려

애쓰시는데


그런것 비켜서서 또 다른 무엇이 우리의 거룩의 옷자락을 세탁해 주고 주름 잡아주고 다려도 줄 것인지 잘 모를 일이다.


외롭게 한주를 보내며 안식일에 교회에서 만나는 만남과 또 함께 먹는 파트락에 희망을 걸고 사시다가

그것 먹고난 다음 한봉지 싸가지고 돌아가서 다시 한끼를 풀칠하려고 하는 그분들의 외로운 고픔을 위해

안식일 저녁을 정성껏 마련하거나 주중에 다시 불러서 따끈한 수우프가 있는 밥한끼 마련하지도 못하고

우린 내년의 교회 성장을 위해서 무엇을 연구하고 무엇을 추구할까?

이천삼백주야의 또 한날이 오늘도 이렇게 할머니들의 주름을 타고 무심히 흐르는데...


십자가의 표상을 리허설한 요나에게 니느웨의 짐승들도 아꼈다는 주님의 심정이 밝아 오는 아침에...


"세천사의 기별을 전하는것 보다 우리 이것 먼저 합시다" 라고 내 입속에서만 옹알거리는 이 고아같은 애기의 울음 하나 입양할 사람

거기 없나요?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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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삼 주님의 댓글

no_profile 안 삼 주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내가 잘못 이해 했는지 모르지만 계14:6-12 과 마24:14를 비교해서 자세히 읽어보면 같은 내용이고
"고아같은 애기의 울음하나 입양하는일"과"세천사의 기별을 전하는 일"은 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됩니다
아무튼 좋은 그림 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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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경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장도경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명지원 "고아같은 애기의 울음하나 입양하는일"과"세천사의 기별을 전하는 일"은 같은 것이 아닌가


라고 일갈해 주신 선생님의 동감이 어느 각도에서 혹시 맞지 않을 수 있다 하여도
적어도 그런 맥락으로 한번은 돌이켜 볼 수 있는 여유가 듬뿍 들어 있는 선생님의

한마디가 제자의 아침을 풍요롭게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로만 가려고 애쓰는 우리들의 고집스런 신학과
언제나 나의 백성과 이웃에게로 가기 (선교)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고집스런 구원의 경륜이
부딪히는 바다에는 풍랑이 일고 있읍니다.


거기 깊은 잠 주무시는 예수님 (십자가) 깨우면

우리가 가야 할 곳이 예루살렘이 아니라 갈릴리의 건너편임을 알게 됩니다.


카스다의 게시판에는 검증이 되지 않은 의로움이 언제나 글로서 입술로서 너무
많이 일어 나고 있으며 내 마음에도 그런 입술만의 경건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음을 보면서 잠시 신학은 접어두고 외롭고 가난하고 배고픈자의 자리에
함께 앉아 보자고 하는 이야기 해 보았읍니다.
딱히 어쩌지도 못하면서 말입니다.


기독교 역사가들은 신학이 발달할 수록 교인은 줄고
봉사가 발달할 수록 교회는 성장한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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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규님의 댓글

no_profile 황현규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귀한말씀 고맙습니다.
신명기 14장29절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는 말씀이 가슴에 깊이 새겨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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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경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장도경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정무흠 황현규 선생님
소위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물었던 그 청년 율법사에게
대답하신 이가 다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들려 주면서 어쩌면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으로
취급하는 내 자신이 십자가에서 강도만난 자를 구하는 일을 하실 것이라는 비유를 말씀하신것을 보면
어쩌면 우리가 신학이 잘못되어도 그것을 용서하실 그분이라는 따스함이 느껴지지만
신앙 (마음의 표현)의 표현이 잘못되면 양과 염소의 비유처럼 끝내 영생의 문턱에서 편가르기를
하실것이라는 하나님의 속내를 보게 됩니다.


어쩌다 이 교회는 스스로 마지막 교회요 진리 교회요 또 남은자들이라는 신학적 결론으로만
"발이 땅에 닿지 않을 속도" 로 달려 가고 싶은지 모를 일입니다.


뭐 그런것이 다 틀리다는 말이 아니고
오직 예수의 말씀을 들을때에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고 물음하던 그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무언가 따뜻한 것들이 서로와 서로를 향해서 흘러 나오는 신앙이 그리운
계절이 마지막 시기가 아닙니까?


그분이 인을 치실 때
신학은 바로했지만 마음이 따뜻하지 않은 자들을 인치시지 아니하고
그러나 신학은 다소 어그러 져도 마음이 따뜻한 자들을 인치신다 하면
우린 바깥으로 쫒겨나서 슬피울며 이를 갈게 되지 않을까요?


오직 사랑이라고 말하는 하나님의 본성을 우리가 믿고 앙망할 때에
거저 우리의 마음이 뜨겁지 않을까요?


초면에 실례를 범했읍니다
용서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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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선님의 댓글

no_profile 한만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아, 장도경선생. 
참으로, 참으로 확실한 진리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인물이 이 시대에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고 경륜스럽습니다.
예수께서 이 시대에 계셨다면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수십년 전에  너무나 어리고 귀엽던 '도경'이가 이렇게 장성하여
시대를 똑 바로 주시하고 바른 길을 제시해 주게 된 것은 놀라운 사건입니다.
장도경 선생.
깨달은 바를 널리 세상에 알려 세상이 다 깨닫도록 기획해 보십시오.
건투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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