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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를 벗고 사방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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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이라고 한다면 그냥 말년이라고 할 수도 있는 황혼 초입에 걸려 있는 내 인생길에

어쩌다 바람의 도시라고 낙인이 찍혀있는 시카고에 까지 밀려와서 도시의 한복판에 덩거러니

놓인 주인없는 보따리 처럼 친구도 없이 친척도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일이 꼭 퇴근길에 꽉 막힌 고속도로 같이

막막하기만 한데 반가운 얼굴을 내어 밀고 오랜 친구가 느닷없이 들이 닥쳤다.


남자들 끼리 만나면 무언가 나라를 뒤집었다 말았다 할만한 소질들은 누구나 다 있어 보이는데

처음엔 안부 몇마디 나누다가 막상 한두시간이 지나면 멀뚱 멀뚱한 얼굴로 변하고 또 한두시간이 지나면 

혼자 있을 때 자신도 모르게 짓고 살던 그 무표정이 나타나게 된다.


교회에 가서는 안교 교과반에서 마치 교회로 오기전에 금방 하나님을 만나고 온 것처럼 화사하고

요란스런 가르침으로 침 튀기던 그 얼굴이 남자와 남자 끼리 만나면 그런 신앙적인 대화도 쉽지 않고 또

왜 이리도 빨리 만남의 희열이 식어지고 마는지 남자인 나도 잘 모를 일이다.


그래서 골프를 치러 가기로 했다.

그것도 꼭두 새벽이나 마찬가지인 아침 일찌기 서둘러 골프장으로 갔다.

다섯시 삼십분인데도 벌써 대 여섯명이 되어 보이는 골프광들이 나타났고 그 중에는

한국인 중년 부부도 끼어 있었다.


맨 처음 티를 치고 한국인 부부가 나가고 그 다음으로 백인 영감님 둘이 준비를 하고 있는데

우리를 먼저 보내주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더니 빨리만 치고 갈 수 있다면 그러자고 한다.


고마운 마음으로 우리는 서둘러 골프를 시작했고 별로 말도 필요하지 않아서 진행이 비교적

빠르게 흘렀는데 중간쯤에 그 노인중에 한사람이 황급히 우리에게로 오더니 아침 일찍 시작하기전에 빨리 치면

좋겠다고 한 자신의 말 때문에 비싼 돈주고 치는 골프를 망치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엔죠이 하면서

치라고 친절하게 부탁을 하고는 돌아서서 가는데 그 뒷모습에 걸려 있는 얼마 남지 않아 보이는 세월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비록 유일한 경찰국가라는 은근한 비난을 받으면서

전 세계에 걸쳐 수시로 일어나던 전쟁 마다 참가해서 피를 뿌리고

가난한 나라에 원조 갖다 바치고

소비가 미덕이라는 그 경제 원리 하나로 부강한 나라가 되어

나라도 개인도 흥청 망청 부를 접해본 유일한 시대가 베이비 부머 시대이다.


오지랖이 자신들의 게임에만 몰두해도 잘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골프를 치면서도

한 홀을 건너서 황급히 가고 있는 덜 늙어 보이는 세대를 염려하는 이

마지막 세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서글픈 것은

첫번째로는 나 또한 그리 멀지 않는 거리에서 그들을 따라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두번째의 이유는 이런 것이다.

행여 기분이 망가지는 극한 상황이 오면 이 베이비 부머 세대는

중간 손가락 하나 올려 세우는 정도의 욕으로 끝이 나지만 지금의

세대는 기분이 잡치면 총이던 칼이던 무엇이던지 살상의 무기를 들고 나오고

기분을 잡치게 한 장본인 뿐만 아니라 무고한 사람까지도 무차별로 사살하는

마치 국지전을 방불케하는 범죄형이 언제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일제가 저질렀던 강제 위안부의 산 증인들이 매년 별똥처럼 사라지는 안타까운 한국국민의

심정과도 같이 이웃과 이웃끼리 그리고 나라와 나라끼리도 손잡아 주고 염려하여 주던 이런 아름다웠던

세대가 매년 속절없이 사라져 가는 아쉬운 그림을 바라 보면서 내 어깨에 걸린 늙음이라는

망태기가 한결 무거워짐을 느끼기도 한다.


뒤에 따라오는 소위 뒷방 늙은이들을 의식하지 말고 그냥 천천히 즐겁게 골프를 치라고 일러주고

돌아가는 그 마지막 세대를 향하여 나는 모자를 벗었다.


그리고 친구에게 참 아름다운 세대였음을 이야기 하면서 마음이 숙연하고 찡 하기도 했다.


십사만 사천인은 천지에 깔려 있고 거룩한 냄새와 이야기도 이 누리엔 사방 넘쳐 나는데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던 그분의 선한것이 들어 있는 또 다른 한 세대가

우리중에 존재하고 있을까?


모자를 벗고 사방을 바라보는 중이다.

궁금해 진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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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숙님의 댓글

no_profile 윤은숙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그렇지요.
저도 그 세대의 이웃으로 이 땅에서 한 40년 이상 부대끼며 살았는데

돌아보니 그렇습니다.

톰 브로코가  '위대한 세대'라 불렀던 사람들의 자녀로  태어나

풍요로운 나라의 일등국민으로, 세계를 돌아다니며

물질문명과 오만의 허명도 뿌렸지만

대체로 우호적이고 유머러스한 아량의 미덕을 지닌 사람들 덕분에 

그만큼 외국인으로 자리 잡고 사는 길에 도움이 되었던

'미국과 미국인 다움'에 대해 늘 감사와 경의를 품고 삽니다.



비록 신조에 의해 곧 선악의 대쟁투에서 만나야 할 상대가 되겠지만-



나른한 안식일 오후, 게으른 마음으로 카스다를 써핑하다

공감의 글에 느슨한 발자국 하나 찍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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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경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장도경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명지원 느슨한 발자국이 라니요.
그래도 가장 빠른 손가락 (댓글용)이 아니십니까?


함께 경의를 표할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것 또한 위로가 됩니다.
선배님
언제나 건강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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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만선님의 댓글

no_profile 한만선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장도경님.
은혜로운 말씀입니다.
그 어떤 목사님도 이런 설교는 수준에 못미쳐서 못합니다.
모자 벗는 이야기 또 부탁드립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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