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의 전성시대
페이지 정보
본문
할례의 예식은 이스라엘의 뭇 남자들이 다른 "씨"를 기다리는 의미에서 정결과 구별이 섞인 언약을
통해서 남자의 전성시대를 열게되었다 하였으나
"산자"로 오셔서 "다시 산자"로 부활하므로서 그 부활의 대상인 교회에게 "여자들의 전성시대"를 시작하게 하는
언약의 예식이 되었다.
- 이전글성경의 두 갈래 길 15.07.23
- 다음글남자의 전성시대 15.07.17
댓글목록
여효명님의 댓글
여효명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주지하신 말씀을 감사히 읽었습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성경의 교의로 맺음 했더라면
더 없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구속학적 예증에는 설득이 있는 반면
하나의 가정(남자와 여자)을 하나로 본 이스라엘의 계수방식은
죄와의 투쟁을 가능케 하는 아이들과 노인들을 배제시킨 민수기의 씨의 전쟁인 표상인데
이는 남녀의 우열이나 계급적 수열을 정한 것이 아니라고 볼 때
여섯째 남편에 대한 생명의 씨를 받은 여인(교회)의 구속적 소망을
여자 안수에 접목한 발상은
시적 형상으로는 가능하지만..
다소 무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군요
소자는 어느 편도 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는 입장이지만(정해진 결정을 수용한다는)
자유의 포스트모던시대에 협곡을 건너기 위해서는 남은 교회만은
이 위기의 시대에
조직을 부정하지 않는 한
신사도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자기생각의 포기를 배울
아름다운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피조된 어느 누구도
정답의 정의를 내리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
총회의 결정이라고 받아드리고 싶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무서운 적은 자아라는 기초위에 건설된
첨단 지성이라는 점을 놓친다면
우리는 사단의 함정에 빠지기 쉬운 배도를
충성이라고 자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에덴의 가정은 하나님의 세계와 구속사의 예정인 하나 됨을
거룩한 분리를 통한 하나의 개체를 둘로 나누어 그리움을 창조하시고
자기의 것을 찾는 사랑으로 하나 되는 관계적 보완을 통하여
또 하나의 생명을 얻는 완전한 행복의 가치를 감득함으로
창조와 구속의 목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감득하도록 마련하신
최소의 사회적 관계 공동체를 가족으로 주신 은혜이지요
하나의 가정은 작은 우주이자 반쪽 계명의 배양소인 셈입니다
성경이 하나의 조화로 보는 가정을(반쪽 계명의 원형)
하나님과의 혼인관계의 신앙을 통한 또 하나의 관계의 원형인
안식일로 모으고 두 쪽의 계명을 하나 되게 하시지요
민수기가 여자를 둘로 표시하지 않은 이유입니다
남녀는 결코 우열의 개념이 아닌 사랑과 조화의 관계임을 무너트리지 않아야
하나님의 뜻을 욕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침묵은 두려운 심판이며
심는 대로 거두게 되는 공의의 순환입니다
자유는 공의의 저울대 위에서 책임을 통하여 행복과 두려움을 양산합니다
우리의 생각과(이마) 행실의 열매는(손)
하나의 표를 받기 위해 기록되고 있겠지요
이미 잘잘못을 떠나서
내 생각으로 조직을 부정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과정의 순결을 위해 기도하고 나의 옷매무새를 여미며
그분이 이끄시는 손발이 되기 위하여
우리의 몸을 기도의 단상에 드릴 때입니다
감사합니다.
장도경님의 댓글의 댓글
장도경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명지원 길고도 성실한 감상과 반응에 호기심 반 그리고 대단한 느낌으로 읽었읍니다.
자아 비판이란 통로를 통해 일갈해 본다면 님의 글은 마치 통일교의 원리 강론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님의 마음속에 이미 그려져 있는 어떤 그림을 그려 가면서 거기에 성경의 내용을 갖다 부치는
그리고 성경의 내용에 충실하기 보다는 그리스도인적 미덕이 먼저인것처럼도 느끼게 하는.
꼭이 그런것도 아닌데 만약에 내 글이 그렇다 한다면
조직에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뜻이라는 의미를 놓고
이런 발상도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뜻이 조직에 순종하지 않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 말입니다."
설마 님이 말씀하시는 조직은 천주교회와 재림교회가 같은 조직이라는 의미로 말하지는
않았겠지요
아니라 해도 역설이 되고 맞다고 해도 역설이 되는...
하나님의 침묵은 두려운 심판이며
심는 대로 거두게 되는 공의의 순환입니다
자유는 공의의 저울대 위에서 책임을 통하여 행복과 두려움을 양산합니다
우리의 생각과(이마) 행실의 열매는(손)
하나의 표를 받기 위해 기록되고 있겠지요
이상의 부분은 왜 여기서 뜬금없이 도입하셨는지 모를 일입니다.
다만 이 부분은 퉁일교회의 원리강론 못지않은 재림교회적 원리 강론처럼 들립니다.
문장과 내용 하나하나를 대질하면서 조목조목 거쳐가는 알맹이가 없고
슬며시 무엇인가 비껴가는 듯한 허탈이 느껴 집니다.
만약에 내 글 내용과 상관없이 님이 하고자 하는 말을 한 것이면 침묵하셔도 좋고
그렇지 않고 무언가 지적하고 싶은데 슬쩍 비켜가는 것이라면
좀 더 구체적이기를 희망합니다.
성경을 바라보는 방법이 우리 사이엔 동과 서로 갈라져 있읍니다.
성경이 성경을 말하게 하는것 비록 서툴지만 제가 힘껏 노력하는 부분입니다.
그래도 침묵하는 손가락들 보다 님의 손가락이 더 아름답다고는 생각하면서...
장도경님의 댓글
장도경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여섯째 남편에 대한 생명의 씨를 받은 여인(교회)의 구속적 소망을
여자 안수에 접목한 발상은
시적 형상으로는 가능하지만..
다소 무리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군요
님은 왜 여섯번째 남편이라 하시는 지가 궁금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의 여섯번째 남편은 모세의 오경 (법적인 다섯남편) 이 아니고
결혼도 하지 않고 살고 있는 남편인데 그것이 사마리아의 성경입니다.
사마리아의 신앙 전통이라고 할까요.
일곱번째의 남자가 우물가에서 만나는 예수님이십니다.
그 여섯의 그릇을 물로 채우시고 그것을 퍼서 나누어 주라는
가나의 혼인잔치의 초청받지 않은 신랑이 일곱번째의 신랑이십니다.
여섯번으로는 낫지 않는 나아만의 뭉둥병을 낫게하는 일곱의 주인이십니다
그래도 그리스도는 여섯번째 남편이신가요???
여섯번째 남편은 두려운 남편?
일곱째는 두렵지 않은 남편?
아직도 두려운 심판을 염두에 두시고 계신다면
한번 남편을 갈아 보라고 권하고 싶어 집니다
기호는 7번입니다.
7번째 신랑이요
여효명님의 댓글
여효명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저는 한국에서 안식일을 보냈고 저녁을 맞고 있습니다.
행복한 안식일 보내셨는지요?(시공을 초월한 인사드립니다)
좋은 지적 주셔서 저를 포함한 독자에게 잘 배우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멈춰서는 것이 좋다고 느꼈으나
독자의 알 권리를 위해 펜을 들었습니다.
우리의 배움은 모두에게 나누어주신 주님의 은혜이지요.
빛은 왜소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누구에게도
독점적으로 주어지지 않음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그런 은혜가 신학적 논쟁으로 번지면 성령의 개입이 소실되어
문자가 정확해도 실현이 불가한 비켜가는 답이 될 뿐 아니라
목적을 이루고자 하는 자신을 어두운 상태에 두는
은혜가 사라지는 현상을
웬만한 지성이면 목격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복음은 하나의 도를 따라 가는 것이나
관점적 각도에 따라 다를 수 있는 한소리라는
다양한 답을 도출하여 더 깊은 숲을 보게 하는 것입니다.
님 께서 이르신 답은 틀리지 않은 결론적 정의이지만
민족주의적 교파주의에 투쟁하는 수가의 여인에게는
유대인에게 위탁된 모세의 법을(옛 계명) 통과해야 하는(마5:20)
여섯째 피 남편을 만나는 과정을 지나야 성경에서 예수를 만나게 되며(요4;22)
주님이 세상에서 인성으로 인간에게 침례를 받고
율법과 선지자의 글을 적도록 하신 이를 성경에서 만나
자기 의를 꾀하는 실패를 대신하신 여섯째 남편을 지나(히10:15-20)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받으시는 새 계명이신
일곱째 남편을 만나게 될 것이었습니다.
옛 계명은 구약의 모세에게 약속하신 인간과의 언약이요
새 계명이신 그리스도는 의문을 파하고
친히 나무에 달려 우리의 의가 되신 대속의 사랑이겠지요.
짐승의 피로는 우리가 죄에서 해방될 수 없으며
주님은 모세의 법을 폐하는 자기모순의 구주가 아니며
그런 과정적 관점으로 여인은 5에서 7로 건너뛸 수 없으며
십자가는 나의 죽음과 부활을 대속한 속량의 현장이었습니다.
여인은 인간의 의에 대한 실패를 대신한 여섯째 남편의 희생 없이
부활로 나의 의가 되신 일곱째 남편이신
재림마당의 신랑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합니다.
장도경님의 댓글의 댓글
장도경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이영희 예 감사합니다.
이제 이곳은 안식일 새벽다섯시가 지나고 있읍니다.
충분히 대답이 있으실 분이라고 생각하고 기다렸읍니다.
한국사람들이 외유내강의 성품을 좋아하는데 아마도 님께서는 그런
외유내강의 흔적이 글속에 고여 있어 보입니다.
때론 외유내강이 여름 바닷속의 해삼처럼 늘어져 있으나 질겨서
씹기가 어려운 그런 단점도 있을 수 있겠지요.
두가지를 먼저 이야기 하고 싶었읍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피조된 어느 누구도
정답의 정의를 내리기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 (님의 첫번째 댓글에서)
빛은 왜소한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누구에게도
독점적으로 주어지지 않음을 알게 되실 것입니다. (님의 두번째 댓글에서)
첫째:
내가 쓴 글 어디에서 정답의 정의나 독점적 결론이라고 단정해 버린 느낌을 가지셨는지?
둘째:
그것이 원만하거나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빗대어 놓으시고는 적어도 님이 정의하는
그 독점적 결론에서 조차 님도 자유롭지 않은 펜대의 활동이 나처럼 적은자의 눈에도
읽혀지는 것은 말씀하신대로 인간의 연약함의 한 부분이겠지요?
님이 갈파하신대로 우리가 여러 각도의 시각에서 수확한 관점들이 다를찌라도
함께 갈 수 있다는 여백을 남기셨는데
진실로 님의 가슴안에서 "손"과 "이마"라는
영적 마당에 심판의 멍석을 깔아놓고 하나님의 율법이
거기서 다시 재현되는 삶의 증거 (인)가 없다면 오직 영원한 심판에서
제외될 수 밖에 없다는 기별을 결론적으로 갖고 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됩니다.
그렇지 않다면 제가 크게 실례하게 된 것이고요.
그리하였다 해도 용서 하실 넉넉한 마음이 심판의 두려운 고리속에서
만들어 질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하게 되므로 이리 막말도 하게 되네요.
우스개 소리로 님의 성함속에서 중간의 "효" 자가 하나 빠지면 더
아름다운 이름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는 아침입니다.
요나의 이야기를 하러 교회로 가야할 시간이네요.
건강 그리고 건필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