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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새롭운 곳에서 새로운 직장을 잡아 살게된

큰아들의 집에 가서 남가주에서 비행기로 날아온 둘째와 함께 부자지간의

정을 나누고 돌아왔다.


젊은 시절 일찌기 나는 제 어미를 닮은 이쁜 딸하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을 하고 살았지만 내 아버지 때 부터 여자형제는 없었던 탓인지

아들만 둘을 얻어서 기왕에 아들들이니 언제나 남자다운 놈들이 되기를

내심 바라며 살았었다.


다행히 두놈이 모두 동양인에 대한 차별이 은근하게 남아있던 중서부의

중고등학교에서 동양인이면 누구나 염려하듯이 자식들이 설움을 당하며 학교를 다니던

것이 아니고 놈들이 오히려 반대로 힘깨나 쓰는 백인아이나 흑인아이들에게

어깨 자랑을 심하게 하다가 부모로서 학교와 법원에 불려다닌 일이 여러번 있기도 했다.


모든것이 크고 굵고 시원시원한 큰아이에 비해서 작고 마디게 크는 아이지만 둘째는

누가봐도 그 이목구비가 정교하고 아름답게 생긴 녀석이어서 우리 부부는 그놈이 어린시절에

데리고 다닐때 은근히 자랑스런 기분을 느끼곤 했었다.


그놈이 서너살 되던 해  낮잠이든 아이의 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나는 백년된 산삼을 발견하고

 "심봤다"를 소리치는 심마니들의 소리처럼 내심 격렬한 발견으로 소리치는 순간이 있었다.

첫째로는 그 아이의 머리카락 하나도 나의 노력과 재주와 나의 어떤 영역의 한도안에서 태어났거나

생겨나지 않은 신비한 창조의 걸작을 보았음이요 둘째로는 그런 조물주의 걸작앞에서

두려워하거나 경배하는 마음은 한줌도 없이 오랜시간 그놈이 무슨 나의 소유의 영역인것처럼

대하며 살았다는것이 갑자기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마치 욥에게 나타나신 하나님이 욥이 잃어버린 소유들이 그리고 그 소유의 마지막 소유지인

자신의 몸뚱아리에서 일어나는 고통에 대해 골돌히 번뇌하는 한수아래의 일들을 나무라며

내가 이세상을 조성할때 너는 어디에 있었으며 생명이 빚어지는 거룩한 자리에 인간이 서 있을'

자리가 어디에 있었는가를 준엄하게 물으며 허리에 손을 얹고 대장부답게 대답하라고 다구치는 순간처럼

엄숙한 기별을 경험하고는 줄곧 자식들을 소유하려는 생각에서 늘 벗어나기를 희망했고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매한번 때리지 않고 키우게 되었다.


그러나 내 소유의 영역이 아닌 자식들이 자라서 다시 가정을 갖게되고 저들 나름의 세상을

잘 살아가고 있는데 왜 오지랖이 저들의 어미는 하루에도 몇번씩 자식들의 안부를 궁금해하고 그리워하고

염려하는것인지 그리고  나 또한 은근히 그들을 만나러 가는 발길이 젊은시절 애인을 만나러 가는

순간 못지않게 들떠있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헤어져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한참을 생각해 보았다.

비행기가 내릴 즈음에 모아진 촛점은 핏줄이라는 단어였다. 대부분의 인간관계는 소유라는 개념에서

출발하고 소유의 관계에서 온갖 희비가 일어나지만 그 소유의 관계를 넘어서 존재하는 관계가 핏줄의 관계이다.

나는 내 자식들이 생겨나는 과정에서 머리카락 하나도 어쩌지 못한 무능한 아버지이지만 그런 생명의

형성과정에서 어미는 자궁의 피를 쏟았고 피보다 진한 가슴을 열어서 젖을 먹였고 애비는 그 핏줄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 젊은시절의 황금같은 시간을 땀흘려 보내면서도 늘 가슴이 벅차 있었다.


성경은 각각 구약과 신약에서 부자라는 개념의 관계를 달리 표현하고 있다.

고통을 겪기전의 욥은 소유의 개념에서 형성된 어느누구도 비교될 수 없는 가장 많은것을 수유한  동양의 부자였었다.

그런 그의 소유를 회수하고 그에게 남아있는 몸뚱아리까지 껍질부터 썩어가는 것으로 서서히 망가져 갈때에

그런 과정에서 사방을 상징하는 친구 넷이 모여서 이세상의 어떤 지혜자들도 그 이유를 알아내지 못하고

의롭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그 의로운 본인조차도 끝내 알아내지 못한 특별하고 신비하고 심묘막측한 구속의 경륜이

그 고통의 과정에 일어나고 있었다.


소유를 중심으로 생겨난 욥의 생애를 철저히 파괴하고 이제는 다시 핏줄로 생겨나는 새로운 부자로 그를

변화시켜 주듯이 신약에서 예수님이 부자라는 개념으로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갈 수 없는것처럼 그런

소유의 의를 가진 율법적인 관계로는 구원이 불가능하다고 설파하면서 십자가라는 핏줄로 다시 새로운

생명의 의로움을 선언하시는 것이 복음의 관계이다.


그렇게 자신들이 행하는 율법적 의인들을  예수님은 부자라 칭했고 그들을 곳곳에서 나무랐고 심지어는

내 자식들이 아니라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선언하시는 반면에 거지 나사로나 죄인들의 겸손한 자세를 향해서는

은혜와 긍휼의 물방을을 찍어서 입술에 발라주고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이 내용이 다시한번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큰아들은 여전히 아버지의 물질적

소유에 근거해서 아버지를 섬기고 둘째는 그 소유를 다 잃어버린 후에 오직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에 의해서

새롭게 시작하는 핏줄의 아들임을 확인하는 이야기다. 그 핏줄이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가 맨발로 서 계시고

날마다 기다리고 계시고 그러다가 가장 값진것을 풀어서 잔치를 베풀게 되는것이다.


나의 아들들은 내 소유가 아니라도 이 핏줄이 엉켜있어서 나는 그들을 내 삶에서 풀어낼 수가 없는것이고

무상불 찾아가서 아직도 남아있는 어떤것이라도 쥐어주고 오고 싶은것이다.

여인이 그 자식을 잊을 수 없음같이 나도 너희를 잊을 수 없노라는 그 거룩한 핏줄의 관계속에서 아마도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연민과 관심과 심지어 안달을 하면서 맨발로 서서 발을 동동 구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제대로

상상하는 믿음 하나만 있으면 어디에 있던지 그의 다시 오심은 기쁜 기별이 될 것이다.


소유의 관계속에선 안식일에 해가지고 다시 해가지는 시간이 있지만 핏줄이라는 관계속에선 해가지고 다시

해가지는 그런 안식일은 없다. 그래서 히브리서에는 아직도 소유의 영역에 남아있는 큰아들처럼 안식일은

지켜야할 날이 아니고 둘째아들처럼 핏줄의 안식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보고 돌아왔어도 벌써 보고싶은 아들을 생각하며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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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송자님의 댓글

no_profile 고송자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삼 부자의 만남이 보이는 듯 합니다.
행복은 멀리 잊지 않지요.


아름다운 자식은 보고 돌아서도 금방 보고싶습디다.




 다시 만날 수 있어서 반갑고 기쁘고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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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경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장도경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명지원 고송자님
옆방인 게시판과 이곳 글동네는 지척이긴 합니다만 어찌보면 그곳에서 잘 찾아오지 않는
외딴곳이기도 한데 어찌 그곳의 꽃이신 분이 이곳까지 들어와 어줍잖고 어렵기만한
글에다 귀한 침 (?)까지 발라주십니까.
게시판에 진을치고 사는 사천왕(?)들께서 날더러 민초에서 온 필객이라고 핍박할할때
민초에서 보다 훨씬 먼저 나는 이 글동네에 둥지를 틀고 있었습니다.
다시온것이 아니고 늘 있던 곳이니 돌아와서 반갑다고 하던 어떤분의 인사가

사실 어색한 인사일 뿐.


여기도 간혹씩 들려주십시요.
나도 기쁘고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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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지인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유지인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명지원


 

 

안녕하세요?  장목사님 !

'시카고의 봄'에 이어 '핏줄'까지 두 편의 글 문학적인 관점에서 잘 읽었습니다.  

지난 겨울 저도 건강을 위해 영하 12도할 때도 하천 산책로를 매일 산책한 적 있답니다.

그렇게 하고 나니 아, 겨울을 정복했다는 생각 아니 겨울이 더 이상 두렵지 않다는 자신감으로

은근히 충만 했었는데 '시카고의 봄' 글을 보면서 에구 이곳의 겨울은 댈게 아니다는 생각이 드네요

'강철 같은 추위' 유치환 시의 한 귀절처럼 그곳의 기후는 글쓰기에는 딱일 것 같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쓰시고 건강하세요

좋은 독자는 쓰는 사람에게도 감동이지요 제 시에 좋은 덕담도 남겨주시고

지면으로 처음 뵙게 되어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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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경님의 댓글의 댓글

no_profile 장도경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명지원 유지인님
추운 겨울이 있는 까닭중에는 여름내내 번성했던 해충을
박멸하고 땅을 쉬게해서 또 다시 한해의 꽃과 열매를 약속하는
밤과같은 준비의 시간이라고 들었습니다.


겨울이야기 하고 있는데 어제 오늘은 봄기운이 찾아와
쌓여있는 눈을 열심히 녹이고 있네요.


글동네에 가면 글친구들이 있을것이란 예상이 어긋나지 않았네요.
각기 다른 환경
각기 다른 연령
각기 다른 생각들에서
새싻처럼 삐져나오는 순들이 자라
숲을 이루는 동네에서
님들의 발자국 소리를 듣는 일은
산책하는자들의 기쁨입니다.


자주 그리고 정기적으로 뵈올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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