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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이 빛도 없이" 13. 새 가정과 새 출발 - 선교열에 불타는 유영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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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가정과 새 출발


나는 본의 아니게 결혼을 두 번 하였다. 우리 집안 대대로 이혼한 내력이 없고, 완고하며 평범한 가풍을 지니고 있다. 이혼한 원인과 그 과정을 열거하다 보면 서로 간의 인격과 아픈 상처를 건드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이 점에 대해서는 그냥 덮어두고 지나가고 싶다.


재결합할 수 없는 데는 신앙적인 것과 그 외에 복잡한 문제가 있었다. 마침내 그녀가 원하는대로 남편이 자녀들을 부양하는 조건으로 에드먼턴 법정에서 이혼이 판결되었다. 이혼에 관한 모든 문제의 책임은 가장인 나에게 있다. 그 책임을 회피하거나 누구에게 전가하고 싶지 않다.


갑자기 엄마를 잃은 철없는 두 아들(5살, 4살)은 할머니의 극진한 돌보심과 주님의 은혜로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에드먼턴에서 특별 부흥집회가 있었는데, 정석우 목사님과 주상규 목사님이 다녀가셨다. 그들은 나의 가정에 대하여 깊은 동정을 갖고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1979년 봄부터 재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두 목사님의 권유로 한국의 영남대회 어린이 주임으로 일하고 있던 허순이 선생과 결혼하였다. 당시 대회장이셨던 배정학 목사님의 주례로 대구 중앙교회에서 결혼식을 하였다. 그렇게 새 가정을 꾸며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에게 그리스도의 애정과 신앙을 가르치며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새 가정을 축복하여 주셨고, 나에게는 새로운 개인사업을 하게 하셨다. 또한 아이들도 정서적으로 안정을 찾게 되어 그런대로 조용한 가정생활이 이루어졌다. 우리 부부는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선교하자는 의견에 일치되어 지난번 선교지인 벤쿠버로 이사하기로 하였다.


유트리티 트레일러(차 뒤에 달고 짐 나르는 두 바퀴 차)를 구입하여 중요한 짐만 싣고 록키산을 넘고 900마일을 운전하여 벤쿠버에 도착하였다. 큰 집을 빌려서 개인사업(전자계산기 수리 및 판매)을 시작하였다. 하나님께서 축복해주셔서 월 평균 6,000달러의 수입이 되었다. 사단은 나의 직장과 생명을 빼앗으려 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더 많은 수입으로 회복시켜 주셨다. 얼마 후에 은행에서 돈을 빌려 집을 구입하였고, 한국 신문에 연재되다가 중단된 "다니엘서 연구"를 다시 연재하기로 하여 매주 신문에 실리게 되었다.


아이들은 모두 삼육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아름답고 즐거운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게 되었다. 구도자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고 토론토와 각처에서 몇몇 재림교인들이 이곳으로 이사오게 되어 조그만 집회소가 생길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 때 우리는 휴가철을 맞아, 그곳에서 동쪽으로 5시간 떨어진 켈로나라고 전원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다. 인구는 30,000, 재림교인 2,000, 재림교회 8곳, 기후가 너무 좋아 과일이 풍성하고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한눈에 홀딱 반해 버렸다. 누구보다 아이들과 아내가 너무 좋아하였다. 나도 그곳이 좋았다. 그래서 그곳으로 이주하기로 결심하고 집을 팔려고 신문에 내니 그 다음알로 중국인이 와서 계약을 하였다.


개인사업도 그런 대로 자리를 잡아가던 터이라 이사할 조건은 못 되었지만 집 값이 갑자기 올라 현금 5만 달러를 손에 쥐게 되니 그 돈으로 켈로나에서 좋은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가정을 위하여 내가 한 발 양보하기로 했다. 그래서 은행 지점장이 살던 이층집 - 방 6개, 커다란 수영장, 채소, 포도, 과일나무들이 자라는 반 에에커(600평)의 땅이 딸린 집 - 을 샀다. 여름과 가을에는 채소와 과일이 풍성하고 이웃들이 너무 친절하여 천국 같은 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3년을 살았다. 아이들은 학교 수업도 충실히 하였고 바이올린도 열심히 하여 교회에서 이중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아름다운 순서도 많이 갖게 되었다. 나의 사업도 큰 도시에서보다 수입은 좀 못하지만 생활하는데는 아무 염려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속 한 켠에는 언젠가는 하나님 사업을 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매일 아침마다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습관을 가졌다. 가족들은 안정되고 평안한 만족감을 갖고 있었지만 과거 내가 하나님과 언약한 것으로 인해 나는 늘 마음이 편치 못했다.


어느 날 친구 집을 방문하여 중국에 관한 책을 보는 가운데 조선족 250만 명이 만주에 살고 있으며 자기네 풍습과 언어를 사용하고, 학교까지 있다는 흥미로운 기사를 읽고 커다란 희망을 갖게 되었다. 하루는 아내와 의논하였다. 내 마음 속에 있는 희망과 외방 선교에 대한 부담감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 봐도 별다른 묘안이 나오지 않았다. 한국에서 오신 장모님과 어린아이들의 교육과 경비 등등이 걸림돌이 되어,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결론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그냥 그런대로 살기로 마음먹고 주어진 일에만 충실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도할 때마다 중압감 때문에 마음에 평화가 없고 식욕도 잃어버려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하였다. 이 모든 사정을 이해하는 아내는 자기가 잘 아는 목사님께 전화를 걸어 알아보았다. 선교하려면 우선 앤드류스 대학에 가서 공부를 하고 떠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는 조언을 받았다.


그 후 우리들은 가족회의를 열어 집을 정리하고 합의했다. 집도 순식간에 헐값으로 넘겨버리고, 웬만한 것은 다 정리해버렸다.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트레일러에 중요한 짐만 싣고, 우리 다섯 식구는 미국 앤드루스 대학을 향하여 떠나게 되었다.

 

총 2,400마일(3,840km)을 혼자 운전하면서, 미국 10개 주의 고속도로를 통과하였다. 밤에는 모텔에서 쉬고, 낮에는 계속 달려 7박 8일 만에 앤드루스 도착하니 너무 지쳐 나는 쓰러지고 말았다. 잠시 병원에 입원하여 쉬고 있을 때 신계훈 목사님이 방문 오셨다. 얼마 후 건강을 회복하여 나와 아이들은 학교에 등록하였고, 장모님과 아내도 안정되어 새로운 대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방패시니 내 마음이 저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시 2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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