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이 빛도 없이" - 8. 직장과 안식일 - 유영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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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과 안식일
카나다로 이민 온 이후 나는 여러 회사에서 일하였다. 한국에서야 책상에 앉아 넥타이 매고 일하였지만, 이민 생활이란 육체적으로 고된 일들의 연속이었다. 물론 남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용이한 일은 아니다. 대부분의 이민자들이 과거 한국에서 무슨 일을 했던 간에 일단 이민을 오면 처음에는 몸으로 부딪치는 일들을 하게 된다. 의사 소통에 능하고 특수한 기술이 있거나, 개인 사업을 할 수 있는 자금이 있다면 이민 생활을 즐기며 살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이민자들은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러한 조건이면 한국에서도 잘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나 미국에서 이민자들을 대대적으로 받아들인 때는 1970년대 부터이다. 그 전에도 약간의 이민을 받았지만 1970년대부터는 이민의 문이 크게 열려서 수많은 한국인들이 캐나다나 미국으로 오게 되었는데, 나도 그 대열에 끼어 캐나다 토론토를 거쳐 서북부 에드먼턴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스위프트 회사는 1,000여명의 직원을 가진 큰 회사이며, 비교적 대우도 좋고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아 나는 그곳에서 근 3년을 계속 일하고 있었다. 내가 일하는 부서에는 허먼이란 과장이 있었다. 독일계 사람으로 같은 부서에서 25년을 일하고 있는 근면하고 정확하며 공사가 분명한 인물이었다. 몇 년을 같이 일하다 보니 정도 들고 서로 신뢰하는 사이가 되어, 같이 일하는 직원 20여 명이 질투할 정도로 나에 대한 신임도가 높았다. 가끔 회사에서 일이 바쁠 때는 정상 근무 외에 토요일, 일요일, 국가 공휴일에도 일을 시키되, 토요일에는 1.5배, 일요일이나 국가 공휴일에는 시간당 2배의 수당을 더 지급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날에 일하기를 원하지만 허먼은 마음에 드는 몇 사람만 뽑아서 일을 시켰다.
그런데 나는 재림교인이 된 이후 큰 근심거리가 생기게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금요일 오후에 허먼이 내 옆으로 다가왔다.
"영! 내일 오보타임이니 그리 알아!"
허먼의 입장에서는 다른 직원보다 나에게 선심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당황하였다. 언젠가는 사정 이야기를 하고 겪어야할 문제이기 때문에 사무실에 앉아있는 허먼에게 정중히 다가갔다.
"나는 지난주 침례를 받고 재림교인이 되어 매주 토요일마다 교회에 나가야 되니까 다른 분으로 대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그래 알았어!"라고 퉁명스러운 한마디 대답을 남겼다.
그 날은 대수롭지 않게 그냥 지나갔다. 이렇게 몇 번을 지나다 보니 허먼이 마침내 열을 받기 시작하였다. 내가 맡은 부서는 중요한만큼 다른 사람이 대신할 경우에는 실수도 많고 능율을 올리지 못하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여러 번 요청이 있었지만 나는 교회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재림교회에 대하여 연구를 많이 했다. 돼지고기를 안 먹는 것과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를 안식일로 지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회사규칙에는 노동자들에게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노동계약이 되어 있어 강제로 일을 시킬 수 있었지만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일을 시킬 수 없게 되어 있었다.
나의 문제가 점점 커지더니 나와 허먼의 대결이 아니고 회사와 노동조합(Union)과의 대결이 되고 말았다. 나에게 중대한 실수가 없는 한, 회사측에서 해고를 시킬 수 없으므로 허먼에게는 커다란 두통거리가 되었다. 그 전 같으면 일하다가 약간의 실수가 있으면
"영, 걱정 마!"
하던 그가, 이제는 사무실로 불러놓고 호통을 치며 나무라는 것이었다. 몇 주일이 지난 후였다. 허먼이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다음 주부터는 근무시간이 바뀌어 오후반이 되었다."
사전에 한 마디의 상의도 없이 일방적인 통보였다. 사실 재림교인이 된 이후, 8개월이 지나는 동안 이 회사에서 받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일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허먼에게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일하는 것은 더욱 괴로운 일이었다. 그 동안 기도를 많이 하였다.
"저 사람이 참 안식일을 깨닫고 주님을 발견하도록 해 주시옵소서!"
이렇게 간절히 기도하면 할수록 그는 나를 더욱 괴롭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도 아니었다. 나는 오후반에서 일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후 3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하면 안식일 시간이 걸리는 것을 허먼은 잘 알고 그렇게 나를 골탕먹이려 했던 것이다.
노동조합(Union)에서도 할 말이 없었다. 토, 일요일에 대해서는 대변할 수 있지만 금요일까지는 회사의 권한이라는 것이다. 나는 금요일이 되면 3시에 출근하여 5시에 옷을 갈아입고 퇴근하여 안식일을 맞이하였다.
몇 주가 지난 월요일 오후, 출근과 동시에 허먼이 나를 부르더니 자기를 따라 오라고 했다. 그곳은 사장실이었다. 나는 사장실에 간 적도 없고 그의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주위에는 과장급 간부들 20여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마치 재판정에서 배심원에 둘려 재판(종교재판?)받는 느낌이었다.
사장이 나에게 묻기 시작하였다.
"네가 재림교인이냐?"
"토요일에 꼭 교회에 나가야 되느냐?"
이 외에 몇 가지 질문이 있은 후,
"회사가 이익을 얻은 후에 개인의 이익이 보장되는데..., 네가 원한다면 토요일에 일하지 않는 부서로 옮겨주겠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이 있다."
나는 사장이 고맙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응답하셨구나'하는 생각을 하며 귀를 기울였다.
"만일 회사에서 급한 일이 생기면 토요일에도 나와 도와주지 않겠는가? 그저 일년에 한두 번 있을까말까한 일이다."
사장은 힘을 주어 나에게 물었다. 참 애매모호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 외에는 성스러운 안식일에 일한다는 자체가 하나님께 불순종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즉시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읍니다."
나의 말이 떨어지자 마자, 사장도
"그렇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없네."
라고 말하면서 허먼에게 눈짓으로 해고시키라는 신호를 보냈다.
나는 사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런 시련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며 이곳보다 더 좋은 자리를 나에게 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가지고 내 부서로 돌아왔다. 잠시 후 허먼이 나타났다. 그는 나에게 봉급 수표를 내보이면서
"아직도 늦지 않다. 토요일에 일만 한다면 정상근무를 보장하겠다. 그렇지 않으면 이 마지막 수표를 받고 떠나라."고 했다. 그때 마침 함께 일하던 동료 직원이 달려와서 나를 저쪽 구석으로 데리고 가더니
"예"라고 대답해 놓고 나중에 토요일에 일 안 하면 되지 않습니까? 해고는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나를 위해 충심으로 조언하는 말이었다. 나는 허먼에게 조용히 다가가 마지막 수표를 받아 쥐었다.
"허먼! 정말 미안합니다. 그 동안 당신 마음을 괴롭힌 점이 있으면 용서해 주시오. 내가 떠나기 전에 당신에게 마지막 부탁이 있소. 앞으로 당신은 곧 은퇴하게 될텐데, 그 때는 교회에 나가기 바랍니다. 교회를 택하게 되면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회에 나가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회사 문을 나오는데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때 허먼이 내 앞으로 다가서더니
"영! 내가 잘못했소....잘 가시오!"
그는 아쉬운 듯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내가 마지막 말을 했을 때 그가 감동을 받았는지 쌀쌀한 그의 표정은 사라지고 자기도 눈물을 글썽거리며 내 등을 두들겼다. 그는 진정으로 내가 미워서 해고시키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안식일에 일을 시키도록 마귀의 시험에 잠깐 빠진 것이었다. 주차장에 나와 시동을 걸 때,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였다.
"오, 주님! 진리가 무엇인데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먄 합니까?"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로다." (시 55:22).
"오, 주님, 나의 모든 앞날의 문제를 주의 뜻대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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