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여정 - 주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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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봉 교수님과 주영희 집사님이 지성미 넘치는 아름다운 딸 혜은양(Grace Nam, MD)과 함께 방문 오셔서 귀한 선물을 주고 가셨다.
남기봉 교수님은 위스칸신 대학 수학 교수이시고, 주영희 집사님은 삼육대학 간호학과를 졸업하였고, 남혜은양은 전도 유망한 소와과 의사다.
주영희 집사님이 쓴 수필집 "사랑의 여정"과 "베개 도둑"을 참 재미 있게, 은혜롭게 읽었다.
이렇게 글을 재미 있게 감동적으로 마음에 깊이 와닿게 잘 쓰시는 분이 가까이 있는 줄 몰랐다.
말과 풍속이 다른 멀고 먼 타향 미국에서 노동하고 공부하며 자녀들을 교육하며, 고난 중에도 하나님께 기도하며 시련을 극복하고, 믿음으로 승리한 남기봉 박사님과 주영희 집사님의 행복한 가정에 하나님의 은총이 충만하시기를 기도드린다. 믿음 있고 지혜로운 효녀 남혜은 양(로마린다 병원 소아과 의사)도 하나님의 축복 속에 믿음 좋고, 성품 좋고, 건강하고, 실력 있는 재림 청년을 만나 성령충만한 재림 성도의 가정을 이루어 부모님께 효도하고, 사회에 봉사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행복하게 살기를 기도드린다.
주영희 집사님의 수필 "사랑의 여정"에 실린 마음에 깊이 와닿는 감동적인 글 하나를 소개하고 싶다.
"사랑에 빠지다."
남편은 계속 침울해 보인다. 늘 바빠서 이야기 할 시간도 없었지만 나를 피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루하루 살얼음을 디디고 가는 듯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남편의 가방을 씻으려고 내용물을 꺼내다가 학교에서 온 편지를 발견했다. 장학금을 더 이상 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장학금만 믿고 이 먼 곳까지 왔는데.....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서 나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지난 학기의 교통사고로 인해서 일과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없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이렇게 현실로 닥쳐오니 대책 없이 막막하기만 했다. 말도 못하고 혼자서 힘들어 했을 남편을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아팠다.
그날 저녁 우리 부부는 같이 손잡고 기도를 했다. 오랜만에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남편이 다시 장학금을 받을 때까지 내가 일을 하겠다는 제안에 다른 때 같았으면 펄펄 뛰었을텐데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우리가 살고 있던 작은 도시에서는 일자리가 없어서 뉴욕에 살고 있는 믿을 수 있는 대학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그 다음 날에 내가 일할 곳과 기거할 장소까지 다 마련해놨으니까 빨리 오라고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너무 고맙고 반갑지만 두렵기도 하고 이제 막 돌이 지난 딸 애를 떼어 놓고 가야하는 또 다른 현실이 가슴을 친다. 그래도 별 다른 도리가 없으니 친구한테 가겠다고 했다. 난 갑자기 급해진 마음으로 딸이 자고 있는 방으로 가서 아무 것도 모르고 천진하고 평안하게 잠들어 있는 딸아이를 꼭 끌어안았다. 달콤하고 익숙한 딸의 체취를 오랫동안 내 속에 담아둘 수 있을 것만 같은 마음에 얼굴을 딸에게 파묻고서 자꾸만 크게 숨을 들여 마시면서 우리 아기의 냄새를 음미했다. 그러다가 쏟아져 흘러내리는 눈물을 감당하기 힘들었지만 남편이 눈치 챌까봐 소리죽여 울었다. 다음날부터 김치를 담그고 밑반찬을 만들고 옷장정리를 계절별로 하면서 무너지는 마음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이웃 주에 사는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우리 전화번호를 잃어버렸었단다. 남편 이름도 모르면서 나를 찾으려고 남편 학교의 여러 기관에 수십번을 전화하고 수소문한 끝에 가까스로 우리 전화번호를 알아내서 전화를 했단다. 무조건 자기네 집으로 놀러오라고 했다. 거절해야하는 이유를 설명 안할 수 없었다. 그러자 더욱 적극적으로 비행기로 가야하는 뉴욕보다 차로 여섯 시간밖에 안 걸리는 자기 집으로 오면 일자리도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를 설득했다. 일단 가보고 일자리가 없으면 뉴욕으로 가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그보다 남편과 딸과 조금이라도 더 있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모든 형편을 아시는 아버지께서 친구를 통해서 그렇게 필사적으로 우리 전화번호를 찾아내어서 나를 멀리 있는 뉴욕보다 가까운 곳으로 가게 하신 것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친구 집에서 며칠 지내면서 남편과 같이 다녀보았지만 영주권 없이는 직장 구하기가 불가능해 보였다. 친구가 자기 영주권으로 취직하라고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남편은 일이 있어서 일주일 후에 다시 오기로 하고 나와 아기를 남겨두고 집으로 갔다. 친구와 직장을 다시 알아보러 다녔지만 역시 매번 허탕이었다. 그런데 아기가 열이 나고 잘 먹지 않고 보챈다. 친구의 시어머니도 계신데 밤에 자꾸 울어서 아기를 업고 밖에서 밤새도록 서성였다. 더군다나 친구 아기한테 열병이 옮겨갈까봐서 더 조바심이 났다. 내 마음은 타들어가는데 밤하늘의 별들은 이럴 때도 찬란하기만 하다. 며칠동안 그러다가 열이 내리고 온몸에 열꽃이 나더니 덜 울고 잔다. 남편이 돌아오고 마지막으로 한군데만 더 가보고 안 되면 집으로 돌아가겠다면서 인사를 하고 친구 집을 나섰다. 친구가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따라오면서 영주권을 가만히 내 손에 쥐어준다. 친구의 사랑에 콧등이 찡해온다. 하지만 나에겐 우는 것마저도 호사스럽게 여겨질 만큼 경황이 없었고 인간적으로 내 마음은 밑바닥에 가 있었다.
그 와중에 나는 실수를 했다. 뉴욕의 친구가 여러 번 전화해서 올 것이냐고 물을 때마다 간다고 해놓고 결국은 못 갔다. 못 간다는 전화도 못한 채 20년이 지났는데도 연락도 못했다. 항상 남을 편하게 배려해주고 웃게 만드는 친구가 정말 보고 싶다. 친구는 이미 날 용서했겠지만 난 아직도 죄스러워서 마음이 무겁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 만나게 되면 서로 마주보며 크게 웃을 수 있는 사랑하는 내 고마운 친구다. 그리고 추방당할 수 있는 위험을 무릅쓰고 영주권을 선뜻 내준 내 친구. 그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나를 위해 발을 동동 구르며 애쓰고 뛰어 다니던 내 고마운 사랑하는 친구, 피로 맺어진 사이라도 이럴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맺어진 친구다.
남편과 딸은 집으로 돌아가고 난 미국 할머니 집으로 가서 내 친구의 영주권과 이름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아프고 난 후 제대로 회복도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간 우리 아기가 염려되었는데 집에 가서 맘껏 뛰놀면서 잘 지낸다고 했다. 집을 떠나오기 전 이웃의 사람 좋은 한국 엄마에게 남편 학교가 시작되면 우리 아기 봐달라고 미리 부탁을 해놓고 왔다. 그런데 초등학생 두 명이 있는 가정이 학교 아파트가 안 나와서 지난해의 우리처럼 모텔에서 지내고 있는 것을 보고 착한 남편이 아파트 나올 때까지 우리 집에서 같이 지내자고 제안해서 우리 집으로 이사를 왔단다. 우리는 기대도 안 했는데 며칠 지난 후에 그분들이 그 집의 애들도 좋아하니 우리 아기를 돌보겠다고 하셨단다. 그분이 나보다 더 우리 혜은이를 잘 먹이고 그 집 애들하고도 잘 지내고 나중에는 밤에도 아빠랑 자지 않고 그 집 엄마랑 같이 잘 정도로 잘 따르고 지낸단다. 여호와 이레 하나님, 이렇게 미리 준비해주시고 여러가지 일이 주문해서 짜 맞춘 것처럼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해주시는지 이젠 감사하단 말이 부족한 것 같은데 내가 아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나는 90세가 넘는 치매에 걸린 할머니를 노인아파트에 같이 살면서 돌보는 일을 했다. 노인 아파트 안의 식당에서 식사를 하니까 나는 음식을 만들지 않아도 되고 미국 음식에 관해서 배울 수도 있어서 좋았다. 영어를 잘 못해도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할머니가 잠드신 후에는 성경도 보고 기도도 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초등학교 교사셨는데 평생 결혼을 안 하고 혼자서 사셨다고 할머니의 여동생들이 알려줬다. 그런데 가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화장을 하고서 밖에서 남자 친구가 기다리니까 가야한다고 하셨다. 한번은 할머니가 잠드신 것을 보고 목욕하고 있는 사이에 할머니가 잠옷 바람으로 밖으로 나간 적이 있어서 무척 당황했다. 24 시간을 할머니 곁에 붙어있어야 했지만 정신이 없으신 중에도 온화한 성품을 가지셨다. 여동생들이 와서 도와주기도 하고 나한테도 신경을 많이 써주었다. 여러가지 힘든 일이 많은 남편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만큼 힘든 줄 모르고 과분하게 생각하고 감사하며 지냈다.
하루는 구내식당에서 할머니와 여러 사람들과 같이 식사를 끝내고 후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케이크와 수박들을 저쪽에서부터 배식해오기 시작하는데 느끼한 미국 음식을 먹고 나서 케이크보다 수박이 먹고 싶었다. 저만큼 멀리 오는데 벌써 수박이 하나 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한번도 그런 적이 없었는데 배식하던 사람이 순서를 무시하고 갑자기 한참 멀리 있는, 그것도 그 줄의 첫 번째가 아니고 세 번째 자리에 앉아있던 내 앞으로 와서 나에게 뭘 먹겠느냐고 물어본다. 내가 할머니께 먼저 권하니 케이크를 집으셨다. 나는 수박을 먹으면서, 무시해도 좋을 내 마음 속의 작은 신음 같은 소원까지 지나치지 않는 자상하고 섬세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또 한번 목이 메었다. 한 달 동안 할머니와 지내다가 할머니는 양로원으로 가시고 나는 다른 집으로 가게 되었다. 떠나올 때 사실은 내가 더 고마운데 할머니의 동생들이 고맙다면서 날 끌어안고 울었다. 다시 한번 보고 싶은 분들이다.
이 인생광야 길에서 나로 하여금 십자가를 깨닫게 하셔서 닥쳐올 비바람을 예비하게 해주신 하나님, 아직도 첩첩산중 갈 길이 먼데 내 아픈 발을 싸매주시고, 내 두 손을 꼭 붙잡아주셔서 놀라서 뒤로 나자빠질 수 있는 주위를 바라보지 않고 아버지만 바라보게 해서 안심하고 갈 수 있게 해주시는 분, 잘못된 길을 갈 뻔할 때 때맞춰서 교통정리를 해주시는 분, 내게 필요할 것을 미리 아시고 벌써 준비해두고 기다리시는 분, 그리고 간간히 또 깜짝쇼를 연출하셔서 날 감격하게 만드시는 분, 난 점점 그분과의 사랑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주영희 집사님의 "사랑의 여정" 14-16 페이지에 실린 "사랑에 빠지다"***
***주영희 집사님 약력***
경남 마산 출생
삼육대학 간호학과 졸업
2011년 가을호 "에세이문학" 등단
2009년 미주재림문학 수필부문 수상
201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미국에서 종합병원 간호사로 근무
수필집 "사랑의 여정" "베개 도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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