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어커스 희랍화 정책 촉진은 유대 제사장들의 타락상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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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딱딱한 역사 이야기를 계속 듣고 계셨네요. 이 역사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맺습니다.
기원 3세기에 애급이 팔레스틴을 다스렸는데 헬라의 안티어커스가 애급과의 파니움 전투에
서 승리한 후 팔레스틴은 자연스럽게 헬라의 안티어커스의 수중으로 넘어갔습니다.
안티어커스의 희랍화정책의 실상은 어떻게 하면 애급, 로마와 대결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점에
착안한 정책이었지, 어떻게 하면 유다민족과 그 종교를 탄압하느냐 하는 것은 그의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다만 피정복민들을 희랍문화로 묶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안티어커스가 유대를 침략하는 것이나 유대종교를 탄압하고 이교를 들여오는 것은 유
대 제사장들의 부패에서 기인했다는 것입니다. 안티어커스의 눈을 유대에 집착하게 한 것은
제사장들의 부패와 대제사장직의 자리 다툼이 예루살렘 간섭을 깊숙히 허락한 셈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직을 둘러싼 유다 사람 사이의 경쟁을 통해 안티어커스는 예루살렘에 영향력을 미
치기 시작했습니다. 합법적인 대극제사장 오니아스가 예루살렘을 떠난 사이에 그의 형 야손이
안티어커스를 뇌물로 오니아스를 퇴위시키고 자기에게 대제사장직을 줄 것을 요구하였으며
야손은 그 보답으로 예루살렘의 희랍화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3년 후 메네라우스가 안티어커스에게 보다 많은 뇌물을 바쳐서 야손을 내몰고 대신 대제사장
이 되었습니다. 이러다가 서기 전 169년 안티어커스가 애급 원정에서 전사했다는 풍문을 듣고
용기를 얻은 야손이 예루살렘으로 가서 메네라우스를 추방하고 다시 대제사장직을 갖게 되었
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다시 한번 역전되었습니다.
전사한줄 알았던 안티어커스가 회군하는 길에 예루살렘에 들려 다시 야손을 추방하고 메네
라우스를 대제사장의 위에 복직시키고 성전 보물을 약탈해 갔습니다. 바로 이것이 큰 시점을
이루어 안티어커스의 희랍화 정책을 반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167년 안티어커스는 하는
수 없이 예루살렘에 군대를 파견했다고 역사는 쓰고 있습니다.
그때 안티어커스는 부하 장군을 보내게 되었는데 유대 사람들이 비참하게 학살 당하게 되고
예루살렘성은 약탈 당하고 성벽 요새지는 무너지고 대신 시리아의 요새가 예루살렘에 들어
서게 되었습니다.
다음에 안티어커스는 종교제도에 각종 절기 및 유다 사람들의 희생제사를 모두 금했습니다.
율법 사본을 모두 회수하고 율법 사본을 가진 자는 극형에 처했습니다. 전국 방방곡곡에 이교
도의 제단을 설치하고 성전 안에 제우스 제단을 쌓고 제우스 신상을 세워놓고 그에게 제사를
드리는 일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안티어커스의 종교탄압이 대단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람들의 반발 역시 대단히 처참하고
큰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핫시딤의 운동, 마카비의 운동까지 일어난 것이 아닙니까? 유
대의 극심한 희랍화는 제사장들의 터뜰인 물고 때문이었습니다.
이로 보건데 제사장들의 명예와 자리 다툼이 나라를 말아먹는 지경에 이르고 하나님을 모독
케 하는 일이 일어난 것을 고려할 때 참으로 수치스러운 역사 이야기가 오늘날을 향해 교훈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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