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현실(필요)과 말씀(중요)” 사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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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현실(필요)과 말씀(중요)” 사이에서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마태 6:25)
목숨이 있고나서, 거기에 걸치는 것이 옷인데, 옷을 위해 목숨을 걸 수는 없다. 우리의 조상의 똑같은 전철을 밟을 수 없지 않은가? 선악과에 우리의 목숨을 더 이상 걸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오병이어의 이야기가 말해주고 싶은 내용이다. 음식과 목숨의 충돌이다. 필요와 중요의 충돌이다. 현실과 말씀의 충돌이다.
이 줄다리기싸움 사이에 우리가 끼여있다.
제자들은 어떻게 배를 채울까로, 예수님은 어떻게 심령을 채울까로, 서로 다른 관점에서 출발한다.
다른 생각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제자들은 자기 자신들을 위하여(시대의 소망 39장) 무리들을 보내라고한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주라"의 말씀으로 우리 자신에게는 능력이 전혀 없음을 뼈저리게 알게 하시고, 오직 예수가 생명의 떡임(요 6:35)을 알려주신다.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 이 두 갈림길 사이에 모든 인생들이 서 있다. (신명 30:15)
갈대아 우르와 가나안 사이에 아브라함의 믿음의 후손들이 그 똑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다.
마침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하나님의 열정으로 떠밀려서 간신히 홍해로 건너간)에서 믿음(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떠밀려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고후 5:14)으로 이를 것이다 (롬 1:17)
우리의 연약함과 시련과 고난(시 39:4)이 "나의 연한"(어떻게 살까-노후대책)과 "나의 종말"(어떻게 죽을까-사후대책)사이에 놓여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사후대책이 더욱 중요하다.
현실을 확실히 잡은 터줏네들과 말씀을 향해 가는 나그네들 사이를 왔다 갔다하는 방랑네로 한때 살아갔던 사도 바울이었으나, 빌립보서 1:23에서 "내가 이 둘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다고 말하는 고백이 나온다.
사는 동안 잘 살고, 죽을 때 잘 죽어야 하는데, 그것이 그렇게 말처럼 간단하지가 않다.
그렇다고, 보이는 세력과 보이지 않은 세력의 대쟁투 사이에 믿는 우리들이 더 이상 이렇게 우물쭈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미국의 유명한 언론인 버나드쇼의 묘비명이 우리의 것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4,25입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출바벨론), 보이는 소망(현실)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현실)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하나님의 수확열매)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그러므로, 계시록 14장 6~16절에 영광과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한 복음 (첫째천사)으로 말미암아, 출바벨론 (둘째천사)과 수확열매의 추수 (네째천사) 중간사이에 성도의 인내(참음)로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 (세째천사)이 우리들에게 필요이며 중요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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