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목) - ‘믿음 안에서의 교제’로서의 교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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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행 2:42)
교회가 진정 부흥하기를 원하십니까? 이것은 물으나 마나 한 질문처럼 보이지만 진지한 질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부흥을 위해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혹은 무엇이든지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더들리와 해롤드 웨스트의 <왜 재림교회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는가?>라는 책은 교회가 그들을 대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 줍니다. 교회를 떠난 한 청년의 편지 내용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이름도 없고 얼굴도 모르는 존재였다. 교회의 교리가 옳다고 하지만, 부디 사랑으로 교리가 담겨져 있으면…친절한 웃음과 따뜻한 악수, 우정 그런 것이 필요하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행 20:28)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줄 만큼 사랑을 쏟으신 사랑의 대상입니다(엡 5:25). 그래서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살전 1:4)이라고 부릅니다. 오늘 옆에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두가 사랑의 대상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성경은 교회를 이 사랑의 대상들이 나누는 ‘믿음의 교제’라고 부릅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인 예루살렘 교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교제였습니다(행 2:42). 교제는 사귐을 의미합니다. 성경의 교제를 의미하는 코이노니아(koinonia)는 단순한 인간의 사귐 이상을 의미합니다. 사업상의 교제나 세상 사람들의 친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뜻을 같이하는 사귐이며 마음을 같이하는 믿음의 사귐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교제에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나눔(sharing)입니다. 초기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행 2:42) 힘쓰는 교회였습니다. 그들의 교제는 “떡을 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그룹이나 구역 모임을 마치고 단순히 다과를 나누는 그런 일이 아닙니다. 성만찬을 행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당시 떡을 나누는 것은 생명을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떡은 생존을 위한 양식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 역사에 유례가 없는 유무상통(有無相通)을 실현했습니다. 이러한 나눔은 그들이 섬기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배운 사도들의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나눔을 배웠습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있는 것을 떼어 나누어 주는 데서 옵니다. 하나님의 왕국(교회)은 나눔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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