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6일(일) - 관계가 관점을 결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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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진흙을 이겨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요 9:11)
무엇에 관하여 안다는 것과 누군가에 관하여 안다는 것은 매우 다른 문제입니다.
물건은 설명서를 읽으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다릅니다. 사람의 자유와 존재의 깊이는 단순히 읽고
이해 할 수 있는 정도의 매뉴얼로 규정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이해하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신영복 선생은 그 방법을 ‘관계’라고 규정합니다.
마음을 지닌 존재인 ‘사람’ 을 올바로 이해하려면 ‘관계’라는 프리즘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단지 정적이고 평면적으로 바라보아서는
이해할 수 없는 대상입니다. 관계라는 프리즘을 통해서 입체적으로 경험해야
그 존재의 가치를 알 수 있는 심미적이고 총체적인 존재가 바로 사람입니다.
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바로 이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알베르 카뮈가 쓴 <오해> 라는 희곡이 있습니다.
이 작품은 관계를 무시한 인간의 부조리한 판단이 엄청난 비극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실존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깊은 산골에서 어머니와 딸 마르타는 여인숙을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다와 태양이 있는 남쪽으로 이사하고픈 꿈을 이루기 위해
부자들이 투숙할 때마다 수면제를 먹이고 돈을 빼앗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20년 전에 집을 나간 아들이 성공해서 어머니와 동생을 만나러 옵니다.
그 아들은 가족을 놀라게 하려고 일부러 정체를 숨기고 이 여인숙에 투숙합니다.
그런데 어머니와 여동생은 그를 단순한 부자 손님으로 여기고 수면제를 먹여 살해합니다.
뒤늦게 그가 가족이었음을 깨닫고 비극적으로 자살하고 맙니다.
이 희곡은 관계의 부재가 낳은 부조리의 극단을 보여 줍니다.
관계가 상실된 관점은 오해가 되고, 그 오해는 결국 인간의 부조리한 판단으로
이어지고 맙니다. 그래서 신영복 선생은 “관계는 관점을 결정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 중에서). 요한복음 9장에는 선천적인 맹인을 예수께서
고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시각장애인은 예수와 만난 관계를 통해서 그분이
메시아임을 고백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여전히 예수의 존재를
불신했습니다. 그들은 고침 받은 시각장애인의 부모를 불러 놓고 그 아들의 행위를
꾸짖으면서, 그가 만난 예수는 죄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미 예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은 시각장애인과 그의 부모는 더 이상
종교 지도자들의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관계가 관점을 바꿔 놓은 것입니다.
이렇듯 그리스도인은 관계를 통해서 올바른 관점을 지녀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사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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