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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비유를 통해 제자를 양성함(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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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비유를 통해 제자를 양성함

 

1월 11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33분

 

기억절 :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마13:3 4~3 5).

 

도입)

 [마5:1]예수께서 ...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 [행2:6]....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 [행2:41].....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 [행6:7]....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 [행9:36]...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위의 성경절에 따르면 예수님을 좇는 자들을 일컬어 모두 제자라 하였다. 또한 예수님을 따르는 여자들을 여제자(행 9:36)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인라고 우리 자신을 부르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런 칭호를 붙인 이름이 아니다. [행11:26]에 보면...“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고 하였는데 본래 그리스도인들이라 부르는 우리의 직함은 안디옥 사람들이 붙여준 이름이지 본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모두가 제자들, 그리스도의 제자들로 일컬어졌다. 제자란 그리스도께 배우는 자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며 그분을 닮아가려는 자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부인하고 거절하는 부류의 사람들, 제자가 아닌 자들이 또한 그곳에 많았다. 진리를 왜곡시키고 그리스도를 책잡고 비난하기 위해 경청하는 제자들이 아닌 사람들이 예수님의 청중 속에 있었기에 예수님은 많은 경우 비유를 들어 사용하심으로 저들에게 진정한 천국의 의미를 가리 우셨다.비유는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마음의 문을 연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이해하기 쉬운 계시의 기능이 있지만 예수님께 대해 흠을 잡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원수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은닉의 절묘한 표현법이기도 하였다. 예수님의 비유를 듣던 제자들도 때로는 그 뜻을 어려워하며 예수님께 비유의 뜻과 함께 왜 비유로 말씀하시는지를 물었다.(마13;10) 그때 예수님은 비유의 두 가지 기능을 말씀하셨는데 (마13;11-15) 제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알려주는 계시의 기능과 '저희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은닉의 기능' 이 있음을 가르쳐 보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발 앞에서 배우는 제자의 자세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그분을 따라 사는 제자의 정신으로 이 말씀을 받아 들여야 한다.

연구범위: 삼하 12:1~7, 사 28:24~28, 마 7:24~27, 마 13:1~30, 눅 20:9 ~19.

 

*기억절 낭독·노래 MP3를 이용하면 기억절을 더욱 잘 외울 수 있습니다.(안교·선교 홈페이지 안교자료실)

 

기독교는 이성적이고 논리적이다. 지성은 계발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성만으로는 인성 전체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 논리에 따라 작동하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는 로봇과 달리 인간은 사랑하고 느끼며 상처를 주고 울며 걱정하고 웃고 상상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지성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영원한 진리를 표현하셨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처한 자리에서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하여 일상의 구체적인 장면을 통해 말씀을 전하셨다. 이미지와 은유로 장식된 비유는 어른 아이 모두에게 심오한 진리를 이해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

구주의 화법으로는 칭의나 성화와 같은 복잡한 개념들도 이해하기가 쉬웠다. 즉 일상적인 언어로 파악하기 어려운 개념들도 상징이나 은유를 사용하면 쉽게 배울 수 있다.

 

안교활동반과교과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이야기나 예화가 설교를 채울 뿐 아니라 진리를 전달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➋ 느끼기 : 예수님이 청중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이유는 유익한 이야기를 들어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에서 영감을 받는다.

➌ 행하기 : 복음의 가치를 전달하기 위한 현대적인 상징들을 찾는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가 최근에 들은 가장 감동적인 예화는 무엇입니까?

❷ 예수님은 어떤 이야기 또는 비유들을 사용하셨습니까?

❸ 예수님이 예화, 비유, 상징 등을 사용하신 목적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그대가 재림 교회의 진리를 전한다면 어떤 비유나 이야기를 들어 전하겠습니까?

B. ❶ 그대는 책, 신문 또는 TV를 보다가 영적인 진리를 떠올린 적이 있습니까?

❷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그대는 어떤 땅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까?

❸ 마 7:24~27에 나오는 두 건축자의 이야기와 비슷한 경험이 있다면 나눠 보십시오.

❹ 각자 예수님을 믿으면 좋은 점을 자신의 경험과 예를 들어 증명해 보십시오.

 

결론

기술적인 발전에도 불구하고 영화, 드라마, 책, 잡지 등에 실리는 개인의 이야기는 여전히 가치를 전달하는 주된 방법입니다. 우리도 이야기의 장점을 잘 살리고 있습니까?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안교반의 활동 목표(1기 친교, 2기 초청, 3기 추수, 4기 번식)를 안내합니다.

❷ 장기적으로 매 기마다 어떤 활동에 중점을 둘 지 의견을 나눕니다.

❸ 단기적으로 안교반 단합을 위해 무엇을 할지 의견을 나눕니다.

 

 

첫째날(일) 1월5일

구약의 예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그가 다윗에게 가서 그에게 이르되 한 성읍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한 사람은 부하고 한 사람은 가난하니”(삼하 12:1).

 

교사강해 1)

선지자 나단의 비유는 구약 성경 중에서 가장 절묘한 비유들 중의 하나이다. 선지자 나단이 사용한 비유에는 한 성에 사는 부자와 가난한 자가 등장한다. 불의한 부자는 가난한 자가 가지고 있는 암양 새끼 하나를 빼앗아 자기에게 온 사람을 대접한다. 이 비유를 들은 다윗은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사람은 마땅히 죽을자라 저가 불쌍히 여기지 않고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양 새끼를 사배나 갚아주어야 하리라”(삼하12:5,6)고 말한다. 다윗의 의분은 온전히 악한 부자에게로 향하고 있다. 다윗은 나단 선지자의 비유를 들으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 즉 목동의 신분을 기억하며 자신을 가난한 자의 위치에 세워 두었다. 보호받고 보상받아야 하는 위치인 것이다. 하지만 나단의 “당신이 그 사람이라” 라는 지적을 듣고 보호받고 보상 받아야 할 가난한자의 위치에서 마땅히 죽어야 하는 부자의 위치로 급격한 위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여기에서 다윗은 매우 당혹하게 된다. 나단 선지자의 비유는 대성공이었다. 하나님의 심판은 그 스스로가 죄를 인정하게 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자신들이 왜 죽어야 할 죄인들인지를 말씀 속에서 깨닫게 만드신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에게 비유를 든 다음에 실제적인 책망과 심판을 선언하므로(7-12절) 다윗이 회개를 하게 된다 (13-14절). 그것은 나단 선지자의 비유가 적절했고 효과적이었다는 증거가 된다. 나단이 처음부터 책망과 심판 선언을 했다면 양심이 둔해진 다윗이 분노하고 회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나단 선지자의 훌륭한 메시지 전달 방법이고 나단의 다윗에 대한 세심한 배려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윗에게는 나단 선지자가 있는 것이 복이다. 하나님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사용할 줄 아는 나단 선지자를 보낸 것이 복이다. 누구에게나 자신을 지도해 줄 지도자가 있는 것은 큰 복이다. 특히 책망해 줄 수 있는 지도자,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심정을 가지고 약점을 배려하는 지도자가 있다면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비유(parable)는 일상생활에서 능히 경험할 수 있는 친숙한 상황들을 예로 들어 듣는 이로 하여금 핵심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사용하는 화법(話法)이다. 이 화법은 대화 내용이 직설적이거나 공격적이므로 듣는 이를 격동시킬 우려가 있을 경우 핵심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므로 자연스레 화장(話場)으로 들어오게 하는 잇점이 있다. 그래서 성경에서 선지자나 사도들도 비유를 사용했고 예수님도 많이 사용했다. 물론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신 이유는 그리스도의 은익 차원인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삼하 12:1~7, 사 28:24~28, 렘 13:12~14, 겔 15:1~7을 읽어 보라. 여기에 나오는 비유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이해를 어떻게 확장시키는가? 이선지자들이 사용한 대상 또는 배경 가운데 무엇이 예수님의 비유에 다시 등장하는가?

 

나단은 접견의 목적을 숨기기 위해 비유를 말한다. 다윗이 내린 판결은 자신이 범죄자임을 자인한 셈이었다. 나단은 문학적 장치를 사용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동시에 대립 또는 처형의 위기를 피하였다.

이사야의 시적인 이야기는 청중들에게 익숙한 농업적 배경에서 착안했다. 그리고 수백 년 뒤에 예수께서도 동일한 배경을 차용하셨다. 이사야의 비유는 징계의 시기에 임하는 하나님의 끝없는 자비에 대하여 가르친다. 마찬가지로 히브리서 12장은 하나님의 징계를 보복의 무기가 아닌 교정의 도구로 이해한다. 하나님의 징계에는 구속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것은 회계와 부흥 그리고 개혁을 권유하기에 적당했다. 그럼에도 더 완고하게 반역했기에 더 큰 징계가 따랐던 것이다.

예레미야의 비유는 끔찍한 심판을 예증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구속적 목적을 방해하면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그들이 선택한 결과에 내어준다. 예수님도 대중들에게 심판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에스겔도 유사한 기별을 전하기 위해 별도의 상징을 사용하였다.

 

교훈)

비유 또는 이야기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진리와 사실을 묘사하는 방식 가운데 하나였으며 하나님의 기별을 전달하는 도구였다.

 

부가적용)

이 비유의 매우 다양한 교훈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다윗이 범죄한 날로부터 나단의 방문이 있기까지에는 최소한 십 개월은 흘러갔다. 그 기간 동안 많은 공적(公的), 사적(私的) 업무가 다윗에 의해 이루어졌다. 사무엘하11:14-27에 언급된 것들 외에도 다윗은 일상적인 경로에 따른 행정과 공적 예배 및 종교의식을 주도하였다. 그는 여전히 경건하고 정의로운 통치자의 모범적인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지닌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또 다른 모습이 존재하고 있었다. 양심은 무디어져 있었으며 계속해서 억눌려 오고 있었다. 외적인 모습은 그럴 듯 해도 그의 내면의 세계는 황폐해 있는 것이 이중생활의 실상이다. 소금이 그 맛을 잃은 것이다. “경건의 모양”은 남아 있어도 “능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욕정에 가득한 은밀한 행위와 우리야를 죽이기 위한 은폐 계획 등은 하나님의 편에서의 징계와 회개의 촉구 및 단호하고도 적극적인 조치하나 없이 외관상으로는 성공리에 수행되고 마무리 지어질 수 있도록 허용 되었다. “죄악을 행하는 자는” 번성했고 죄 없는 자는 까닭 없이 죽음을 당했다.(시2:7, 시12:15, 잠:11-19). 공개적인 심판 억압받는 자를 위한 명백한 간섭 단호하고도 합당한 응징 회개로의 특별한 초청 등은 전혀 없었다. 다윗의 인간본성은 제멋대로 행동 하였으며 인간사회는 그 죄인과의 관계성을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었다. 다윗의 상황을 변화시키기 위한 선행적인 조치가 하나님 편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어 사랑으로 가득 찬 목적을 수행하게 하셨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죄인을 향한 구원의 주재가 되신다는 위대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분은 죄인을 찾으신다. 모든 인류에게와(요:16,17 요일:9,10) 죄의 길에서부터 건짐을 받은 각 사람에게와(요일:19), 그리고 잘못된 길로 빗나간 자들에게(시 23:3) 하나님께서 찾아오신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나단은 다윗이 자기 백성들에 대해서 마음을 쓰며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을 향해 동정적이며 그리고 정의를 사랑하는 인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였기 때문에 우호적으로 그에게 접근하였다. 그는 그 타락한 성도에게 여전히 선한 요소들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았다. 그 중대한 범죄가 옛날의 고상한 자질들에 대한 흔적을 모두 지워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드디어 선지자가 다윗을 향하여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말하는 순간에 그 이야기는 그에게 비유가 되었다. 그때 일반적인 묘사는 특수한 것이 되었으며 그는 심판의 선고를 받은 가장 두드러진 인물이 되었다. 다윗의 고조된 의분이 그 악한 인간에게 심판을 선언 하였을 때 인간의 양심은 그것이 마땅히 받아야 할 벌을 선포함으로써 다윗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실질적으로 선취하였다. 하나님께서 지적하신 말씀에 반응하여 죄를 버리고 용서를 구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이나 핑계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참 제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가 들은 수많은 예화와 비유 가운데 기억에 남는 것은 무엇입니까?

훌륭한 예화나 비유는 단순한 진리도 매우 인상 깊게 제시합니다. 특히 이야기 속에서 나를 빗대는 사람이나 사물이 있을 때 그 효과는 훨씬 더 커집니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오랫동안 마음에 간직하게 되는 예화는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불순종하는 자녀를 끝까지 사랑하고, 그들을 돌보고 보호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부모의 이야기는 달리 부연설명하지 않아도 예수님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적용|

그대는 어떤 예화를 들어 가족이나 친구에게 성경의 기별을 전하기 원합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진리를 설명하라- “우리가 지금해야 할 사업은 성경의 말씀에 대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치고 교육하는 일이다. 지금은 진리가 들어갈 문들이 개방되어 있다. 진리를 전혀 들어보지 못한 자들에게 접촉할 수 있는 기회를 얻기 위하여 이용하라. 그리스도께서 표상과 비유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가르치신 것과 같은 방법으로 진리를 설명하라”(복음전도, 131).

 

기도

아버지, 제게도 전할 이야기를 주시옵소서. 다른 이야기도 좋지만, 바로 제 삶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서 아버지의 사랑을 증언할 수 있게해 주옵소서.

 

둘째날(월) 1월6일

건축자의 지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마 7:24).

 

교사강해 2)

일본 동경에 있는 제국 호텔은 미국인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가 건축하였다. 로이드는 기초공사를 하는 데만 2년이라는 시간을 투자했는데 이것은 보통 건축물의 기초공사보다 배 이상의 시간과 돈이 드는 일이었다. 당시 일본의 건축가들과 언론들은 물론 기초공사가 중요하긴 하지만 저렇게까지 많은 시간과 투자를 하는 것은 낭비라고 평가했다. 기초공사에만 2년이 걸린 뒤 나머지 공사에 2년이 걸렸고 총 4년 만에 제국 호텔이 완성되었다. 공사는 완공되었지만 이후 몇 십년간 쓸데없는 데에 너무 많은 신경을 써 낭비를 한 대표적인 건축 케이스가 되었다. 그런데 52년이 지난 후 동경에 대지진이 발생했다. 대지진으로 인해 많은 건물들이 무너져 내렸고 도로가 끊어졌다. 그러나 제국 호텔만큼은 조금도 피해를 보지 않고 굳건했다. 평온할 때는 기초공사가 미련한 짓으로 보였지만 위기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현명한 처사였는지 알게 되었다. 평온한 인생에서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두 비슷한 삶을 사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고난이 찾아오고, 죽음이란 순간이 찾아올 때 누가 지혜로운 사람인지 알게 된다.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 반석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참된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에 자신의 인생을 세워야 한다.

 

마 7:24~27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리스도인 제자도에 대하여 무엇을 이해하게 되는가? 그와 같은 중요한 진리를 가르치기 위해 예수께서 왜 이러한 예를 사용하셨다고 생각하는가?

현대의 문명사회에서는 읽기와 쓰기를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오늘날도 아직 문맹사회가 많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도 읽기와 쓰기는 아주 예외적인 것이었다. 지배계층, 문필전문가(서기관)는 문자를 읽을 수 있는 기술을 통해 권력을 획득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자신의 기별을 문맹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형태로 설명하셨다. (물론, 식자층도 그 기별을 이해하였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발명 이전에는 세계의 많은 문서가 오랜 시간에 걸쳐 손으로 기록되었다. 그래서 비교적 소수만이 그와 같은 희귀한 물품을 소유했다. 따라서 전승, 비유를 통한 구두 소통이나 그와 유사한 방식이 정보 전달의 표준이었다.

하나님은 전체 인류에 구원을 베푸신다.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면 당연히 그와 같은 의사소통 방식을 사용하셔야 했다. 단순한 이야기들을 통해 세대와 세대를 거쳐 이어진 구전은 구원의 사상을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눅 14:27~33을 읽어 보라.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가? 여기에 나오는 은유들은 제자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얼마나 밝혀 주는가?

건축은 준비가 필요하다. 우리는 건축이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비용을 산정해야 한다. 제자도도 준비가 필요하다. 오천 명을 먹인 기적, 놀라운 치유, 눈에 띄는 성공은 제자 후보자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쉬울 것이라고 추측하게 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청중들에게 전체 그림을 보도록 독려했다.

 

교훈

예수님은 비유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이 얼마나 큰 대가를 필요로 하는지 설명하셨다.

 

부가적용)

미국의 금문교는 길이 2,825m 넓이 27m의 다리로, 토목공사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라고 한다. 금문교를 만든 사람인 레드우드는 아이디어를 2000년 된 나무에서 얻었다고 한다. 그가 나무를 자세히 살펴보니 세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첫째는 다른 나무보다 뿌리가 더 깊이 뻗어 있더라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나무보다 많은 잔뿌리가 습기 있는 곳을 찾아 뻗어나가며 수분을 나무로 공급하더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중요한 것은 뿌리가 큰 바위를 칭칭 감고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로 인해 2000년 동안 온갖 세월 속에서 쓰러지지 않고 살아남은 것이었다. 그래서 금문교를 만들 때도 반석이 나올 때까지 깊이 파고 들어가 그 위에 교각을 세웠다고 한다. 금문교는 1933년에 착공하여 37년에 완공되었다. 다리에 사용된 철근이 지구 6바퀴를 도는 양이며, 건설비용도 3,500만 불이나 들었다. 이것이 지금으로부터 73년 전에 세워진 금문교가 수많은 지진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늘까지 건재한 이유이다. 이처럼 다리가 든든해 세워진 것은 그 기초가 튼튼했기 때문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어떤 대가를 치를 각오가 되어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자기희생, 고난, 치욕 그리고 거절은 엄청난 대가를 요구한다. 우리는 제자들이 마주하게 될 구체적인 문제의 목록을 제공하실 수 있었음에도 예수님이 비유를 사용하여 그 기별을 전하기로 결정하셨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주목해야 한다.

 

|적용|

그대는 제자의 길에 어떤 보상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습니까?

 

영감의 교훈

예수께서 즐겨 사용하신 비유들- “크신 교사 예수께서는 청중을 천연계의 사물에 접촉하게 하여 모든 피조물에게 말하고 있는 목소리를 듣게 하고, 그리하여 저희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저희 생각이 받아들일 만하게 되면 저희가 보고 있는 만상의 광경에서 영적 교훈을 해석하여 주셨다. 예수께서 진리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시는 데 즐겨 사용하신 비유들은 그분의 정신이 얼마나 일상생활의 환경으로부터 영적 교훈을 수집하는 일을 즐겨하셨는지를 보여 준다”(복음교역자, 408).

 

기 도

아버지, 이 길이 결코 쉽지 않음을 압니다. 심지어 내 힘과 의지로 할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오직 은혜 베푸시는 아버지께 굴복하며, 예수님의 공로에 의지합니다. 제게 믿음을 더해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1월7일

농업적인 비유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그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마 13:3).

 

교사강해 3)

2006년도 이미애 작가가 지은 책 한 권을 소개한다. 그 책의 제목은 <사막에 숲이 있다>이다. 책 서평 등에서 나온 내용들을 그대로 엮어 소개한다. ‘꾸준히 하면 뭔가는 된다’ 라고 하셨던 어머니의 잔소리가 저 멀리 중국의 내몽고의 사막에서 인위쩐이라는 여인에 의해 이루어질 줄이야. ‘사막에 나무를 심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 나무를 심은들 모래밖에 더 보이랴. ’이런 생각이 스치는, 끝없이 펼쳐진 황량한 몽골 사막지대, 어찌 이곳에 나무를 심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가족 두 사람이 서로 협력하여 꿈을 이루기로 결심했다. 그 협력에 과연 사막의 기적을 탄생시킬 것인가, 아니면 고생만 실컷 하고 심각한 패배와 절망으로 끝나버릴까? 황량하고 거친 사막으로 덮혀 있는 곳에 어떤 기적이 일어난 것일까.

풀 한포기, 나무 한 그루, 물 한 줌 없는 삭막한 사막을 숲으로 만들겠다는 꿈, 이제 그 도전은 시작되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막 한가운데 버려진 인위쩐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지만 살고자 하는 의지와 ‘내가 처한 환경을 바꿀 수 없다면 내가 만들자’라는 말도 안 되는 다짐과 의지로 사막에 나무 묘목을 심는다. 그것도 목수도 미장이도 없이 두 사람의 협력만으로 집을 짓기 시작하여 꼬박 3년이 걸려 집을 완성하였다. 당시 숲이 없는 곳에서 살아가는 몽골 유목민들의 고충은 크다. 우리나라에도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황사의 발원지인 마오우쑤 사막, 그곳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인 징베이탕의 외딴 집에 사는 인위쩐과 남편 바이완샹, 이 두 사람은 몽골의 엘승타슬라헤 사막보다 훨씬 크고 더 척박한 마오우쑤 사막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물도 없는 곳에 나무를 심는다고? 정말 말이 안 되는 일을 시도했다. 그런데 기적은 용기 있는 두 사람의 협력으로 시작되고 있었다. 어느 한 쪽이 반대하면 시작도 진행도 불가능하다. 문제는 그 넓게 펼쳐진 사막 한가운데 나무를 심어 살려내는 일이다. 기적은 일어났다. 열 그루를 심으면 적어도 여덟 그루가 살아남은 것이었다. 사막 생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막무가내 식 투쟁을 시작한 지 무려 7년 만에 놀라운 기적을 일구었다. 목수도 미장이도 없이 오직 두 사람만의 협력으로만 집을 다 짓기까지만 꼬박 3년이 걸렸다. 7년 만에 제대로 된 나무군락을 만들어 낼 수 있었을 정도로 갖은 고생과 역경을 온 몸으로 견뎌냈다. 아이를 유산하기도 하고 피땀 흘려 심은 묘목들이 한 순간의 모래바람에 모두 뽑혀나가고, 겨우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나무들은 흉악한 나무도둑들에게 빼앗기기도 했다. 토굴과도 같던 집을 흙집으로 만들고 흙집을 제대로 된 집으로 만들기까지 두 사람은 꼬박 3년이 걸렸다. 멀리 시내까지 나가 벽돌 한 장 한 장을 사모아 부부가 직접 만든 집이다. “인위쩐은 나무를 자식처럼 위했다. 누가 나무 한 그루를 벤다면, 그것은 곧 자신의 목숨을 가져가는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p.66) 포기하려고 마음먹기를 수백 번. 하지만 인위쩐은 나무를 자식처럼 위하는 마음으로 이것들을 이겨낸다. “인위쩐과 바이완샹이 그들의 두 손으로 심은 나무만 80만 그루! 총 1400만 평의 모래 언덕이 숲이 되었다.” (p.128) 결국 두 사람은 그 기적을 어느 회사나 단체도 의지하지 않고 두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냈다는 것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80만 그루의 나무. 1400만 평의 숲. 1400만 평은 여의도공원의 200배 정도 되는 크기이다.(여의도 공원은 약 6만9천 평) 일부러 국가정책으로 특정한 산에 나무를 심는다 해도 여의도 공원의 200배나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숲을 만들어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사막에서 해냈다. 적어도 내가 본 사막은 생명이 생존하기에 가장 열악하고 힘든 곳이었다. 그런 곳에서 나무를 심어 숲을 만들어내었다는 것 자체가 비상식이다. 그러나 인위쩐, 바이완샹 두 사람은 해냈다. 곱디곱던 처녀였던 인위쩐의 얼굴과 손이 거칠어지고 갓난아이 젖 먹이러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아까워 나무를 계속 심었던 인위쩐이라는 여성의 강건함과 위대함. 그리고 남편인 바이완샹은 인위쩐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고 그만두고 싶을 때 옆에서 아무 말 없이 위로해주고 함께 해주었다. 그래서 인위쩐이 사막의 황폐함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돌아보면 다리 뻗고 쉰 날이 없었다. 잘 먹지도 못했다. 밥보다 모래를 더 많이 먹었다고 해도 좋을 지경이니 폐나 기관지가 멀쩡하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p.64) “숲의 규모가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 지금도 살충제는 쓰지 않는다. 여전히 차통과 나무젓가락을 들고 오늘은 이 언덕 내일은 저 언덕에서 한 마리씩 잡아 없애는 것이다.” (p.167) 책에 수록된 사진만 보면 이곳이 정말 사막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다. 사막에서 저런 초록빛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두 사람이 만들어낸 기적과 같은 일이 방송에 앞 다투어 보도되고 중국 정부로부터 상과 지원도 받았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받았다. 우리는 복음의 황무지 같은 이 땅에 살고 있다. 복음의 씨앗을 심고 복음을 뿌리기 위해 노력하고 복음의 꽃을 피우기 위해 이 같은 노력을 한다면 분명 큰 수확을 거둘 것이다.

 

마 13:1~3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은 제자훈련에 관하여 청중에게 무엇을 가르치셨는가? 이 비유에서 오늘날의 신자들은 어떤 교훈을 끌어내야 하는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많은 사람에게 알려져 있다. 이야기의 배경은 농경사회에 익숙한 당시의 청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제자도와의 관련성은 확연하다. 근본적으로 예수님은 청중이 제자로서 그들의 표준을 높이도록 도전하셨다. 개인에게 구체적으로 대면하기보다는 비유를 통해 말씀하심으로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과 스스로 대면하도록 인도하셨다. 내면의 거울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물질주의적인 자신들의 경향을 평가하고, 자신들의 인내력을 검토하며, 세상과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분석함으로 타협하지 않은 제자의 삶을 선택할 수 있었다.

동시에 진정한 제자도는 판단을 자신의 손이 아닌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인간의 분별력은 불완전하며 그 지식은 부분적이다. 하나님만이 완전한 이해력을 소유하셨다. 예수님도 사탄이 틈탈 것을 경고하신다. 제자는 판단을 동료 신자에게 맡겨서도 안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곡식이 아닌 가라지일 수 있기 때문이다. 추수 때까지 두 가지는 함께 자란다.

“그리스도께서 비유를 통해 주신 교훈에는 이 세상에 대한 그분 자신의 사명에 나타나 있는 동일한 원칙이 드러나 있다.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거룩한 품성과 생애를 잘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는 우리와 같은 인성을 취하시고, 우리 가운데 사셨다. 신성(神性)이 인성(人性)을 통해 나타났고 보이지 않는 영광이 보이는 사람의 형상을 통하여 나타났다.… 하늘의 사물이 세상 사물을 통하여 드러났으며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셨다”(실물교훈, 17).

 

교훈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제자도의 높은 표준을 제시하시면서 동시에 우리의 자신을 돌아봄으로 온전히 그분을 의지하게 하셨다.

 

부가적용)

인간의 보편언어생활 가운데서 비유가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비유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사용되고 있으므로 비유자체가 어떤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비유는 일반 언어양식 가운데 한 방법일 따름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비유는 그 본질적 내용상 절대적임을 간과할 수 없다. 우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씨뿌리는 비유를 통해 영원한 천국을 얻을 사람들을 설명하시기 위해 특별히 채택한 언어방식이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를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그 비유의 내용 뒤에 숨어있는 참뜻을 올바르게 잘 찾아낼 때 비로소 그 값어치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인위쩐과 바이완샹 두 사람이 일군 사막의 숲은 그 어떤 불가능한 땅에도 꽃이 피고 나무가 자랄 수 있음을 보여준다. 기도하며 눈물을 흘리며 뿌린 씨들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돌짝 밭과 같은 곳에도 희망이 있다. 그리고 가시밭에도....인위쩐과 바이완샹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포기하지 않는 제자들이 된다면...

 

나의 삶 속으로

|묵상|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그대는 어떤 땅에 해당합니까?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려진 자요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마 13:19~23).

 

|적용|

그대는 결실을 가로막는 장애들을 제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의 교훈- “예수님께서는 공중의 새, 들의 백합화, 씨를 뿌리는 자와 씨, 목자와 양, 이런 것들을 가지고 불멸의 진리를 설명하셨다. … 그리스도의 교훈에는 각 사람의 마음에 흥미를 일으키게 하고 각 사람의 감정에 호소하는 그 무엇이 있었다. 그리하여, 날마다의 과업은 높은 이상을 잃은 단순한 수고의 되풀이가 아니고, 끊임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을 생각함으로 명랑하고 발전적인 것이 되었다”(교육, 102).

 

기 도

주님, 제게 결실을 가로막는 수많은 장애가 있습니다. 제 삶에 뿌려진 말씀이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며 줄기와 잎을 내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제 삶이 옥토같이 변화되기를 원하오니 도와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1월8일

혁명가의 전쟁

 

“그가 또 이 비유로 백성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시니라 한 사람이 포도원을 만들어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가서 오래 있다가”(눅 20:9).

 

교사강해 4)

예수님의 사역은 먼저 유대인에게, 그리고 이방인에게 구원의 효과를 가져왔다. 예수님의 사역은 기존의 선지자, 제사장, 왕의 역할과는 차원이 다르다. 예수님의 사역은 ‘하늘’의 관점, 그리고 ‘혁명과 개혁’으로 시작되었다.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 (눅12:49)다고 하신 예수님의 사역은 이 세상에 대단한 혁명을 위한 것이다. 그분이 일으키신 혁명은 썩어질 것에 종노릇하며 사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혁명이셨다.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생명 곧 썩지 아니할 생명(딤후 1:10)의 복음을 가지고 오셨다. 예수께서 불을 땅에 던지러 왔다고 하셨는데 여기 ‘던진다’는 표현은 상대방에게 공손히 주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혁명가의 열정, 예수님께서 모든 인류에게 썩지 아니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한 그분의 혁명적인 열정을 뜻한다. 이것은 예수께서 생명을 주려는 그분의 의도를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제사장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을 향해 자신을 믿지 못하면 결국 저들도 멸망할 것이라는 경고와 함께 주님의 편에 설 것인지 죽음의 편에 설것인지를 묻는 매우 혁명적 기별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기별이 우회적이고 완곡한 비유를 통해 증거된 것이지만 저들은 어느 한 편에 서지 않으면 안될 매우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는 정치적 혁명이 직선적인 혁명이라면 예수의 혁명은 곡선적인 혁명, 눈앞에 불을 보면서 불속으로 뛰어드는 대신 오히려 멀리 돌아가는 우회적인 혁명, 목적을 바로 획득하는 통쾌함 대신 흔들리지 않는 발걸음으로 영원을 향해 전진하는 점진적 혁명을 함의한다. 그것은 단순한 인간적 차원의 혁명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에까지 직결된 영원한 혁명으로, 그것은 지금도 개개인의 삶속에서 그리고 보다 큰 연대 속에서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는 어느 혁명가보다 더 강력한 혁명가였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단 선지자는 다윗에 비유로 말씀할 때 이 이야기의 실제적인 주인공이 자신이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포도원의 비유 속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후에 그 아들을 죽인 자들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백성들에게 물었다. 그랬을 때 백성들은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리라 하”였다. 그들 스스로가 그들의 죄에 의해 어떻게 심판을 받아야 할지를 그 스스로가 대답하게 하였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시는 비유는 저들의 실제적인 현실을 반영한 비유였다. 그러나 저들은 그들 스스로의 형편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리스도는 평범한 무기조차 없었지만 그의 사역은 혁명적이었다. 그분의 도구는 칼이나 창보다 훨씬 강력하였다. 삶을 변화시키는 그분의 말씀은 종종 비유와 상징으로 표현되었으며 악과 맞서는 그분의 병기가 되었다.

그리스도의 전략과 전술은 많은 지도자의 허를 찔렀다. 그들은 민중을 압도하는 그분의 호소력을 마주할 대비가 부족했다. 많은 경우 그분의 비유는 지도자들을 책망하는 기별을 담고 있었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의 기별이 백성의 심령을 관통하는 곳은 어디든지 그들의 영향력이 위축되리라는 사실을 직감하였다.

마 21:28~32, 눅 14:16~24, 20:9~19을 읽어 보라. 이 비유들은 어떤 강력한 기별을 담고 있는가? 비유는 종종 특정 부류의 사람에게 전달되었지만, 우리가 누구이든 여기서 어떤 원칙이 우리에게 적용되는가?

 

“포도원의 비유는 유대 백성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도 교훈이 된다. 현세의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큰 특권과 축복을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교회로부터 상당한 보답이 있기를 기대하신다”(실물교훈, 296).

우리는 하나님께 큰 복을 받았다. 그리스도 피로 구속함을 받았고, 우리의 의가 아닌 그분의 의를 힘입어 구원을 약속 받았으며, 영생의 보증과 성령을 받았다. 우리는 매우 많은 것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의 가치를 잊어버리거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하찮게 여기기 쉽다. 비유 속의 포도원 농부들처럼 우리는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심판의 날에 그들은 자신의 무지를 변명하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우리의 무지를 변명하지 못할 것이다.

 

교훈

비유와 상징으로 전달된 예수님의 기별은 칼과 창보다 강력하였고 반대 세력을 약화시킬 만큼 혁명적이었다.

 

부가적용)

산헤드린의 대표들은 성전을 찾아가서 주님의 권위에 대해 도전했다. 주님은 그들에게 침례 요한의 권위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물으셨다. 그러나 그들은 요한이 의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곤경에 빠질 것을 두려워해서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주님은 그들에게 진실한 마음이 없는 것을 보시고 자신의 권위에 대해서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완고함을 지적하기 위해서 두 가지 비유를 들어 주셨다. 주님은 먼저 두 아들의 비유를 말씀해 주셨다. 첫째 아들은 순종하겠다고 대답하고 나서 순종하지 않았다. 그리고 둘째 아들은 싫다고 대답했지만 후에 뉘우치고 순종했다. 여기에서 첫째 아들은 종교 지도자들을, 둘째 아들은 죄인들을 상징하고 있다. 주님은 종교 지도자들에게 두 아들 중에 누가 아버지의 뜻을 행한 사람이냐고 물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둘째 아들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에게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천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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