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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과 권력자들을 제자로 양성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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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일 안식일

일몰:오후 6시 25분

 

기억절 :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행 6:7).

 

도입)

성경은 제사장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해 ‘이 도에 복종하니라’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복종’이라는 단어는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는 과정을 설명해주는 단어이다.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 그것은 ‘복종’이다. 우리의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 하였다. 맞다. 그런데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즉 내가 복음을 믿는 것이 맞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신앙적 표현은 바로 ‘복종’이다. 복음은 단지 지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다. 우리도 죄인이다. 라는 복음의 선포를 머리로만 아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또한 우리 죄를 위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그리고 이것을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는다는 이 복음을 안다고 구원의 믿음을 가진 것이 아니다. 물론 복음을 듣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복음은 머리에서만 가두어 두면 안된다. 들었던 복음이 우리 마음에 영향을 준다. 찔림을 받고, 감동을 받고, 감격하게 된다. 그러면서 의지에 영향을 준다. 즉 복음에 복종하게 한다. 이것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모습인 것이다. 즉 내가 죄인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저항하지 않고 자기 죄를 인정하는 것이 ‘복종’이다. 그러면서 회개하라는 복음의 메시지에 복종하여 죄를 뉘우치고,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는 ‘복종’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복음에 복종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자이심을 믿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복종’이다. 복음에 대한 이 복종이 우리를 그리스도인 되게 한다. 구원받는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한다.

 

연구범위: 롬 13:1~7, 막 2:23~28, 마 8:5~13, 마 26:57~68, 마 27:11~14, 행 4:1~12.

*매일 교과를 공부할 때에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칩시다.

 

“제자들은 그런 은혜가 필요할 때까지는 순교자의 용기와 꿋꿋함을 부여받지 못하였다. 그 후에 구주의 허락은 성취되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산헤드린 공회 앞에서 증언하였을 때에 사람들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행 4:13)았다. 스데반에 대해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사람들은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그들이 능히 당하지 못하’(행 6:15, 10)였다. 그리고 바울은 자기가 가이사의 법정에서 심문을 당한 것에 대해서 기록하는 가운데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딤후 4:16~17)라고 말한다”(시대의 소망, 354~355).

안교활동반과교과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권력자들 앞에서 설 때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확신한다.

➋ 느끼기 : 과거에 성령께서 신자들을 통해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그분이 우리를 통해 일하신다는 사실을 믿는다.

➌ 행하기 : 사회적 지위가 어떻든지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자들과 협력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정치인이나 공무원의 도움으로 어려움을 모면했던 경험이 있다면 이야기해 봅시다.

❷ 예수님을 만난 정치, 종교 지도자들은 어떤 다양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❸ 로마 백부장은 예수님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어떤 매력을 느꼈을까요?

❹ 인기와 지위를 의식하는 정치인들이 우리 같은 소수 교단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 못하더라도 우리가 그들과 꾸준히 접촉하고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B. ❶ 우리 신앙에 대해 우호적인 정치인이나 공무원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 이야기해 봅시다.

❷ 성경에 따르면 교회는 정치 또는 세속 정부의 권위에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❸ 권력의 박해 아래 재판을 받았던 예수님과 바울은 우리에게 어떤 모본을 남겼습니까?

❹ 앞에서 이야기했던 우호적인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결론

권력자들을 구원하는 예수님의 방법은 다른 이들을 구원하셨던 방법과 같았습니다. 그분은 그들을 만나 동정하시고 그들을 위해 봉사하심으로 신뢰를 얻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방법과 다른 지름길로 가려는 모든 시도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오늘부터 시작되는 안식일 오후 활동을 다시 점검하고 참여를 권장합니다.

❷ 3월 친교 모임을 계획합니다(3월 15일 또는 16일).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2월23일

권위를 존중함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 13:1)

교사강해 1)

사도 바울이 세상 권력에 복종해야 할 근거로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것과 함께 '양심을 생각해서‘ 복종하라고 권면한다. 롬 13:5절“그러므로 진노를 두려워해서만이 아니라 양심을 생각해서도 복종해야 합니다.”그리스도인들이 권세에 복종해야 할 이유는 진노를 받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에서가 아니라 양심에 따라 복종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양심의 기준이 진노를 받지 않기 위한 복종보다는 우위에 있다는 가르침이다. 이 가르침을 확대하자면, 우리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하는 범위와 기준은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이 된다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악한 세상 권세자들의 요구가 하나님이 주신 양심을 거스르는 일이라면, 그것에 대한 저항도 가능하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세상의 정부나 권세와 권위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이 무조건 반항이나 저항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라고 해서 세상의 시민으로 주어진 의무를 부인하거나 거부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세상 속에서는 시민으로서의 의무를 충실하게 감당하면서 복음을 전하며 복음을 위해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그 모든 의무보다 위에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공의와 사랑의 법이요 양심의 법이다. 그것에 따라 순복하고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뜻과 질서를 이루어가게 될 것이다.

 

수세기 동안 사람들은 정부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이며 시민들이 정부와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지 이해하기 위해 씨름해왔다. 무엇이 통치자로 하여금 통치할 권한을 부여하는가? 어떤 정부가 최선의 형태인가? 백성들은 항상 정부에 복종해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문제들은 우리가 오늘날까지 고민하고 있는 문제들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롬 13:1~7을 읽어 보라. 이 말씀 속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어떤 중요한 기별이 있는가? 한편 이 말씀과 그 교훈은 어떻게 남용될 수 있는가? 역사적으로 그러한 남용이 있었던 예는 무엇인가? 일반 기독교 역사뿐 아니라 재림교회의 역사에도 있었던 그러한 과오로부터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억압과 잔인성은 예수님 시대의 로마 제국의 특징이었다. 로마 군대는 문명 국민들을 위협하고 굴복시킨 다음, 그들을 로마로 강제 이송하였다. 수십만 명이 재산을 빼앗기고 투옥되고 처형당했다. 로마가 세운 괴뢰정부는 필히 로마 정부보다 더 악랄했을 것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이러한 정부에 대항하는 어떤 반역도 지지하지 않았고, 심지어 납세 저항도 하지 않으셨다(눅 20:25). 예수님의 공적인 불복종 행위는 제사장들의 지위 남용에서 느끼셨던 혐오감을 표현하기 위해 환전상의 탁자를 한 번 뒤집은 것이 전부였다. 그 자체로는 로마에 반항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인간 정부를 하나님이 정하신 제도로 인정하며 그것에 대한 순종을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신성한 의무라고 가르칠 것이다. 그러나 정부의 주장이 하나님의 주장과 상치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인간의 법률보다 위에 있는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는 것이 교회나 국가가 말하였다는 것 때문에 제외되어서는 안 된다”(교회증언 6권, 402).

 

교훈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뜻을 벗어나지 않는 한 세속적인 정부에 복종해야 함을 가르친다. 예수님도 친히 그런 모본을 보이셨다.

 

부가적용)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 하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으시다. 이 세상에서 성도들을 보호하기 위한 마련된 계명들인 것이다. 이 세상 정부 조직은 완전 하지는 않지만 우리 성도들을 여러 면에서 보호해 준다. 예를 들면 만약 경찰관들이 몇일 동안 파업을 하고 근무를 하지 않는다고 가정을 해보면 여기저기에서 살인, 강도, 강간, 절도, 폭력 ,약탈 등이 몇 배 더 난무 할 것이다. 실제로 십 수년전에 LA에서 무정부 사태가 발생 했을 때 우리 한인들이 얼마나 많은 생명과 재산을 피해를 당 했는지 상기 하여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할 때 우리 성도들의 생명과 재산을 잃게 될 수도 있다. 물론 경찰관 중에는 어떤 사람은 부정과 비리의 관리들도 있다. 우리는 그 비리의 경찰관 그 사람을 존경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맡은 그 직책과 봉사에 대해 존경을 표시해야 한다. 경찰관은 때로는 악을 행하는 자들을 진노의 채찍을 내리는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도구이며 하나님의 사자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자녀의 교육을 담당하는 교육 제도도 우리에게 많은 유익을 준다. 브라질의 밀림 지대의 아마존강가에 살고 있는 원주민들은 아직도 정부 통치에서 벗어나 교육을 못 받고 또 그들의 자손도 교육을 받지 못하여 거의 동물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 현대 국가에서는 각급 교육 기관을 만들어 국민들에게 교육을 받을 혜택을 준다. 우리가 여행 할 때 여행의 편리를 제공하는 교통수단 등 수 많은 혜택을 정부로부터 받을 수 있다. 세상 나라의 정부들에게 사회 조직과 질서를 유지 하도록 마련해 놓으시고 우리 성도들에게 세상에 살고 있으되 세상에 속하지 않도록 훈계하고 계신다. 물론 우리도 때로는 우리에게 주워진 노동권의 권리를 주장할 때도 있다. 또 어떤 때는 데모에 가담 할 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과격한 폭력과 화염병이나 공공건물을 파괴하는 난동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주장하되 해결 되지 않으면 기다려야 한다. 그 주장이 옳다면 때가 되면 그 주장이 이루어 질 것이다. 로마서 13장 2절에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라고 하였다. 이 계명을 어기고 수많은 사람들이 해고 되고 감옥에 들어가고 가정이 파괴되고 심지어 자기 자신이 자살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의 말씀대로 심판을 자취한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에게 뱀 같이 지혜로우라고 교훈을 주셨다. 나라의 권세자들의 노고와 수고 그리고 법을 집행하는 자들에 대한 합당한 예의를 표시해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는 세속 정부의 권위를 어떤 방식으로 존중합니까?

오늘날처럼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는 자유주의 국가에서는 때로 정부에 반대하는 발언과 행동도 가능합니다. 특히 정치적 견해가 뚜렷하게 나누어질수록 그런 경향은 빈번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또한 정치가 특정 집단의 주장과 이익을 대변한다면 상대적으로 손해를 보는 집단에서는 격렬한 반대 의사를 표현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여러 정치적 흐름을 주시하되 중립적 입장에서 세속 정부에 협조하며 그것의 건전한 기능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적용|

현대의 제자들은 불의한 로마 통치하에서 예수님이 보이신 태도를 오늘날 어떻게 적용해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법과 질서를 지키며 진리를 옹호하라- “우리는 권력자들을 무시하라고 하지 않는다. 말로나 글로 우리가 법과 질서를 반대하는 사람이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도록 사려 깊고 신중해야 한다. 우리는 불필요하게 우리의 길을 막는 그 어떤 것을 말하거나 행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진리를 옹호하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전진해야 한다”(사도행적, 69).

 

기 도

아버지, 세상의 어떤 정부도 하늘 정부의 공의에 미치지 못하나 그 권세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모든 위정자가 그들 위에 계신 하나님을 인정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불의를 버리고 공의를 추구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2월24일

“읽어보지 못하였는가?”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바리새인들이 보고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그 함께한 자들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마 12:1~3).

 

교사강해 1)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 하는 사울을 피해서 도망을 쳤다. 그는 안식일에 성전에 도착해서 성전에 있는 제사장을 만났다. 그 때에 제사장들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제사장들은 왕의 사위인 다윗을 정중하게 영접했다. 그때에 다윗은 제사장들에게 자신과 부하들이 오랫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고 말하고 먹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날은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성전에 다윗에게 줄 떡이 없었다. 그 때에 성전에 있었던 것은 오직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진설병)이었다. 진설병은 성소 안에 있는 떡상에 올려놓는 거룩한 떡이었다. 제사장들은 율법에 규정된 대로 매 안식일마다 지난 주에 올려놓은 떡을 치우고, 새로 만든 떡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떡 상에서 치운 떡은 성소에 진설한 떡이기 때문에 제사장들만 먹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다윗과 그 부하들이 매우 허기가 진 것을 보고 율법의 규례를 어기고 그 떡을 다윗에게 주었다. 다윗은 그 떡을 받아서 부하들과 함께 나누어 먹고 굶주림을 해결했다(25-26). 제사장만 먹도록 규정된 진설병을 다윗에게 준 것은 분명히 율법을 어긴 일이었다. 만일 보통 때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으면 하나님은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징계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일에 대해서 제사장들과 다윗을 책망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 날 다윗은 그 떡을 먹지 않으면 쓰러질 수 있는 위급한 상황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다윗의 사건과 밀알을 따서 먹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비슷한 점이 많았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 왕이 될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기름 부음을 받고 메시아로 세움 받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었다. 또 다윗을 따르던 부하들과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모두 다 하나님이 세운 왕을 수종드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 두 무리는 모두 다 불가피하게 율법을 어기게 되었다.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배가 고파서 거룩한 진설병을 먹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천국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다가 배가 고파서 밀을 잘라먹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다윗과 그 부하들을 책망하지 않으셨고, 예수님께서도 말 이삭을 잘라 먹은 자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지 않으셨다.

 

불행히도 예수님이 상대하셨던 권력자와 큰 영향력을 가진 자들 중에 일부는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그분에게 공공연한 적대감을 표출하였다.

그러나 그들과 대면하는 중에도 예수님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항상 노력하셨다. 그분은 논쟁을 원치 않으셨다. 대신 모든 사람의 구원을 바라셨기에 그분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고 갈 권세가와 영향력 있는 인물들까지 구원하기 원하셨다.

막 2:23~28, 3:1~6, 마 12:1~16을 읽어 보라. 그들의 공공연한 적대감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하려고 노력하셨던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예수님은 그들의 마음이 닫히지 않았다면 감동을 받을 만한 어떤 말씀을 주셨는가?

흥미롭게도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을 상대하면서 그들을 감동시킬 성경과 심지어 거룩한 역사와 자료들을 언급하셨다. 예수님은 자신과 그들 사이에서 공감할 수 있는 영역에 호소하셨다. 예를 들면, 제사보다 자비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실 때 그분은 성경을 인용하셨다. 그렇게 해서 그분은 그 지도자들이 그토록 열렬히 높이며 소중히 여기는 율법의 더 깊은 의미로 그들을 인도하고자 하셨다.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진 가축을 건지는 일에 관한 대화에서 예수님은 그들도 강조해야 했던 친절과 관대함이라는 기본적인 개념에 호소하셨다. 그러나 문제는 예수님에 대한 반감과 증오심 때문에 그런 사실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교훈

예수님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으셨다. 하지만 그분은 끈질기게 그들을 설득하고 구원하고자 노력하셨다.

 

부가적용)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셨다. 예수님께서 만난 첫째 대상은 병든 자들을 많이 만나셨다. 교회에 병든 사람이 많이 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건강할 때 믿지 못하고 병들어서 믿는 것도 자연스럽다. 어떤 분은 병든 상태로, 사업에서 실패한 상태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못하다. 자기 코가 석 자나 빠져야 비로소 믿는다. 교만한 인간은 다 잘 될 때는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는다. 한계에 부딪혔을 때에야 머리를 숙이는 것이 인간이다. 둘째로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들을 만났다. 일곱귀신이 들린 사람, 거품 물고 물속에 들어가는 사람, 불 속에 들어가는 사람들을 만나셨다. 셋째 예수님은 외롭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을 만나셨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 남편이 다섯 있었던 여인, 돈은 있었지만 외롭게 사는 세리 삭개오 같은 사람들을 만나셨다. 넷째, 예수님은 목자 없이 방황하는 청중들을 만나셨다. 그리고 종교지도자들까지 만나 주셨다. 예수께서 이런 사람들을 만나실 때 두 가지 특징이 있었다. 언제나 그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이다. 혹시 여러분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잃어버렸다면 여러분과 저는 병든 것이다. 가난한 자, 병든 자를 볼 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남편, 아내를 볼 때도 그래야 한다. 그러면 절대 싸우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사람을 긍휼히 보셨다. 어미가 자식을 보듯이 불쌍히 여기셨다. 긍휼한 마음이란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저 사람은 죽는다’는 마음이다. ‘내가 도와주지 않으면 저 사람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그대라면 예수님의 끈질긴 노력에 대하여 어떻게 반응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은 그들 가운데 계셨던 비범한 분에 대하여 이 영향력 많은 지도자들에게 제시된 매우 큰 증거였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는 과거에 종교 지도자들이 진리를 거부하고 완고하게 행했던 사실을 의아하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에게서 오는 빛을 거부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보다 그렇게 할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적용|

전통적인 입장을 수호하기 위해 진리를 거부하는 우를 범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예수의 갈망- “예수께서는 당신께 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한편 자기에게로 나오지 않은 자들에게도 복을 주시기를 열망하셨다. 예수께서는 세리들과 이방인들과 사마리아 사람들을 이끄시는 한편 편견과 유전에 의해 갇힌 바 된 제사장들과 교사들과 접촉하시기를 갈망하셨다. 그는 그들과 접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다쓰셨다”(시대의 소망, 265).

 

기 도

주님, 잘못된 길에서 돌이키기 위하여 여러 방면으로 저에게 말씀하실 때에 제 마음이 완고하고 강퍅하게 되기보다 진리에 굴복하고 겸손하게 주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셋째날(화) 2월25일

백부장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 8:8).

 

교사강해 3)

백부장 그 자신은 군인이기에 더 높은 권위에 순종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순종하는 법을 알았던 것, 이것을 어디에서 배웠을까? 그는 자신이 일하고 있는 삶의 현장에서 배웠다. 그는 충실하게 권위에 순종하는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에 어떻게 순종해야 하는지 알았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워두신 권위가 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은 세상이 세운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도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한 것이기에, 세상의 권위를 인정한 사건이다. 그 일로 인해서 세상이 변화가 되었다. 세상이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세상이 참 생명의 길을 만나게 된 것이다. 백부장은 예수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졌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믿음을 보시고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고 말씀하시자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말을 하였다. 백부장의 이 고백은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을 믿는 믿음이었다.

 

물론 예수님과 권력자들의 조우가 험악하게 끝난 몇 번의 예도 있지만, 니고데모같이 주목할 만한 예외의 경우도 있었고, 로마 백부장과의 건설적인 만남도 있었다.

마 8:5~13, 눅 7:1~10을 읽어 보라. 예수님이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셨던 일화를 통해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워야 하는가?

예수님이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백부장은 몇 친구들을 보내 예수님이 오시지 못하도록 만류하였다. 유대인들의 예배와 예수님의 영성을 매우 존중한 탓에 그는 예수님의 개인적인 관심을 받기에 부족함을 느꼈다. 급기야 예수님이 도착하기 직전에 어렵사리 그분께 나아와 상황을 설명 드리고, 예수님의 선언만으로 하인이 회복되리라는 믿음을 나타내었다. 군 생활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권위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상관에게 복종했고, 그의 부하들도 자신의 명령에 복종했다. 훨씬 많은 영적 혜택을 누리는 자들도 예수님을 배척하는 때에 힘과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그토록 진지한 믿음을 보이다니 정말 놀라운 일이다.

이런 면에서 정직한 자기 검증이 유익하다. 우리는 현실에 안주한 상태에서 자신이 살아 있는 신앙을 경험하기보다 단지 좋은 교리를 옹호하는 것으로 그치고 있지는 않은지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아직 훈련이 덜 된 새 신자가 신앙 안에서 자란 자들보다 더 깊은 믿음을 나타낸 적이 있는가? 우리의 영적 특권이 자기 신뢰를 위해 사용되지는 않는가? 영적인 기회가 알게 모르게 줄어들지는 않는가? 위 질문에 예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누구든지 백부장과 같은 경험을 누릴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지위가 높은 자들을 전도하는 이들에게 힘이 된다. 이 세상에는 21세기의 백부장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을 깨우고 강화시키기를 바란다.

 

교훈

예수님께 하인을 치료해 달라고 요청했던 로마 백부장은 유대 백성에게서 찾아볼 수 없는 순수하고 진실한 믿음을 나타냈다.

 

부가적용)

로마시대에 남의 나라를 정복하며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무소불휘의 능력을 발휘하는 로마의 장교가 보인 따뜻한 인간애를 볼 때, 당시의 잔인하고 무자비한 모습의 로마 군인들만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사람임을 볼 수가 있다. 그의 하인을 사랑하는 따뜻한 인간애! 별 볼일 없는 사람을 아끼는 사람임을 볼 때 그는 참 훌륭한 인격의 사람이었다. 그는 사람을 얕보지 않았다. 사람이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가면 사람을 얕보기 쉽다. 로마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을 얕보기 쉬웠을 것이다. 그들은 정복자였고 또한 정복자의 군인이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데리고 있는 하인이라도 무시하거나 얕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의 이 같은 한 가지 행동을 보았지만 그의 이 같은 삶에 얼마나 많은 그의 진실한 선행이 감추어져 있는지 우리는 더 깊이 살펴볼 수가 있다. 우리는 너무나 작은 일, 하찮은 사람이라도 얕보지 않는 사람, 그리고 너무나 평범한 일 하나를 보면서 그가 얼마나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사람이었는지를 그의 하인 하나를 살리려고 애쓰면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에게 부탁을 하였고, 비록 로마를 원수로 여기는 장로들도 발 벗고 나설 정도로 그의 따뜻한 인간애가 보여 지는 그런 인간적으로 또한 정말 사람 냄새가 나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보려면 사람을 얕보지 않는 사람이어야 한다. 비록 하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를 귀중히 보는 삶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사람을 얕보지 않으신 분이셨다. 창녀라 할지라도 문둥병자라 할지라도 귀신이 들린자라 할지라도 중풍병자였을지라도 예수님께서는 친히 가서 고쳐 주리라고 하셨던 예수님을 본다. 사람을 한 사람 한 사람 귀히 여기고 얕보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사람은 천하보다 귀하고 온 천하를 주고도 바꿀 수 없는 참으로 귀하고 귀한 존재임을 아시기 바란다. 우리 교회에서 누구든 사람을 하찮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란다. 아이든 어른이든 못난 사람이든 잘난 사람이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되자. 누구든 존중 받고, 누구든 사랑받고, 누구든 사람을 귀히 여기자. 예수님께서는 이런 하찮은 백부장의 하인과 같은 사람일지라도 그를 고치려고 친히 가시고자 하셨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권세를 가진 자들에게 하나님의 도움이 더 절실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권력의 정점에 가까울수록 권한에 비례하여 책임도 커집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영향력을 확장시키는 데 골몰합니다. 사탄의 모본을 따른 결과 그들의 야욕에 많은 사람이 희생되거나 피해를 입고 그들 역시 실패한 역사로 남습니다. 그러나 하늘의 권위를 인정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훨씬 많은 지도자가 권력을 바람직하게 사용하여 백성을 이롭게 한 훌륭한 지도자로 기억될 것입니다.

 

|적용|

그대는 어떻게 간부급 공무원이나 정치 지도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진리를 이해한 백부장- “그러나 이방인 태생이요, 제국 로마의 우상 숭배 교육을 받았고, 군사 훈련을 받았으며, 그의 교육과 환경으로 말미암아 겉보기에는 영적 생애에서 끊긴 것처럼 보이고, 더구나 유대인의 완미함과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로마인의 멸시로 말미암아 한층 더 방해를 받은 백부장인 이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눈이 멀어 보지 못했던 그 진리를 이해했던 것이다”(시대의 소망, 317).

 

기 도

하나님, 이 땅의 지도자들이 사탄의 권력욕에서 벗어나 하늘을 두려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 섬기는 마음으로 백성들을 다스리는 믿음 있는 종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2월26일

재판 받으시던 날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라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겨지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

 

교사강해 4)

예수님은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라고 말씀하셨다. 이 세상은 썩어질 세상이다. 이 썩어질 세상을 위해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아니다. 썩지 아니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 그 국권이 다른 나라에게 넘어가지 아니할 영원한 나라, 그리고 영생하는 나라다. 지금 이 땅의 권세를 가진 자들과 다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신 예수께서 이 땅의 나라와 다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이심을 보이신 것이다. 그러면서 그 증거로 만약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나라였으면 예수님의 부하들이 예수님이 잡혀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유대인들과 싸웠을 것이라고 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의 나라가 이 세상과 전혀 다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이 나라에 자신을 재판하고 있는 저들에게 까지 하나님의 은혜와 구원을 증거 하려 하셨던 것이다. 이 세상은 본질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를 사는 성도도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닌 것이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한 것이다. 자기 나라가 어디에 속해 있는가를 모른다면 그는 불행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하신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라는 말씀은 사실 빌라도를 향한 부르심이었다. 너도 진리에 속했다면 내 음성을 듣고 나의 나라로 들어오라는 마지막 초청이었다. 그렇지만 빌라도는 그저 이렇게 시큰둥하게 한마디를 덧붙일 뿐이었다. “진리가 무엇이냐?” 궁금해서 물은 것이 아니었다. 쉽게 말해서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는 그렇게 해서 진리에 속하고, 또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차버렸던 것이다.

 

마 26:57~68, 27:11~14, 눅 23:1~12, 요 18:19~23, 31~40, 19:8~12을 읽어 보라. 이러한 고관들에게 증언하는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무엇인가? 예수님의 지상 생애의 마지막 장면에서 제자들은 위축되지 않는 충실함의 고통스런 대가를 엿본다. 체포에서 십자가까지 예수님은 그 땅에서 가장 권세 있는 군주와 관원 그리고 제사장들에게 증언하셨다. 예수님은 세속적 권위에 도취된 사람들을 하나씩 하나씩 살펴보셨다. 겉보기에는 그들이 예수님을 지배하였다. 군사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의 궁극적인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그분을 법정과 의회와 궁전으로 그리고 다시 재판정으로 끌고 다녔다. 그분에 대하여 어떤 형을 선고하든지 결국 그들이 내린 판결은 그들 자신에게로 돌아갈 것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를 삼기 위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지만, 때로 그 결과는 그분이 바라시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빌라도, 가야바, 헤롯, 그 밖의 사람들이 마음을 내려놓고 회개했다면 예수님이 매우 기뻐하셨을 것이다. 완고하게 그분의 간청을 거부하더니, 그들은 마지막 구원의 초청마저 냉담하게 비껴갔다.

마찬가지로 21세기의 신자들도 복음을 전할 때 그 결과가 바라고 기도했던 것과 크게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그들의 노력에 언제나 큰 성공이 따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그들을 낙담시키거나 계속적인 전도활동을 금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진정한 제자는 예수님처럼 죽기까지 충성할지언정 충성하다 실망하지 않는다. 듣는 이에게 결심을 호소할 때 알곡과 쭉정이가 나뉜다. 우리에게 알곡은 기쁨을 주고 쭉정이는 아쉬움을 남기지만, 그래도 추수는 계속되어야 한다.

 

교훈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했던 결과는 그분에게 큰 대가를 요구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까지 진실했던 그분의 증언과 태도는 후에 큰 결실을 거두었다.

 

부가적용)

예수님은 그리고 하나님은 진리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부르시고, 또한 그 진리로 그들을 다스리신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라면 그 진리에 응답하게 되어 있고, 진리의 다스림을 받게 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그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 있고, 또 그렇게 해야만 한다. 그것이 그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표시이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도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없는 일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 결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진지한 관심이 없고 그 말씀에 순종하려는 소원과 애씀이 없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을 수 없으며 그러면 그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 나라와 다르다. 세상 나라는 힘으로 권력으로 다스려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진리로 통치되는 나라이다. 그래서 진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며, 그 진리에 순종해야 한다. 즐겁게 귀를 기울이고 기쁘게 순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아버지가 그 나라의 왕이며, 우리를 위해서 생명을 내어주신 분이 우리의 왕이시기 때문이다. 항상 진리에 기쁘게 귀를 기울이시고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온전한 다스리심 가운데 살아가시는 하나님 나라의 복된 백성이 되시기를 바란다.

 

나의 삶 속으로

|묵상|

때로 거절과 모욕이 따르더라도 그대는 복음 전파에 대한 확신이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권력자들 앞에 제시한 예수님의 증언은 성공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행 6:7에 따르면 이후에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다. “제자들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였다. 그 최후의 순간에 예수님을 지켜보면서 그 기별을 경청했던 제사장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는 하나님만이 아신다.

 

|적용|

만약 그대가 신앙을 지키고 복음을 전하다가 재판석에 서게 된다면 그대는 어떻게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라- “주님께서는 그대의 전도활동에서 나타난 성공의 분량에 의해서 그대를 판단하지 않으실 것이다. 나는 그대의 믿음이 계속 소생하고 견실하며 꾸준히 증가해야 한다는 말을 전해 주라는 분부를 받았다. 귀 있는 자들이 듣지 않고 총명한 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될 때 그대는 그대의 최선을 다한 후 다른 지역으로 옮기고 모든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라. 그러나 그대의 믿음이 실패하게 해서는 안 된다”(복음전도, 328).

 

기 도

주님, 이 진리와 복음을 전하다가 박해를 받는다면 오히려 우리에게 복이 있음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저주하고 아프게 하는 자들을 위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라고 기도하겠습니다.

 

다섯 째날(목) 2월27일

초기의 폭발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1~12).

 

교사강해 5)

세계에서 고층빌딩들이 가장 많은 곳이 뉴욕의 맨하튼이다. 우리가 잘 아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비롯하여 하늘을 찌르는 빌딩들이 모여 있다. 섬이라고 할 수 있는 조그마한 도시에 어떻게 엄청난 빌딩들이 들어설 수 있는 비밀이 어디에 있을까? 뉴욕은 그 지하가 거대한 암반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든 빌딩들을 견딜 수 있다고 한다. 예수님 그 자체가 우리의 인생의 기초와 본질이 되시는 모퉁이의 머릿돌처럼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예수께 인생의 모든 기초를 바로 놓은 사람들에게 삶의 폭발적인 변화가 찾아오게 되었다.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핍박도 마다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의 증거에 앞장섰다. 초대교회 당시의 성도들 중에는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나 부활하신 주님을 친히 목격한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이들은 예수님을 뵙고서 오직 천국의 소망으로 뜨거워졌다. 저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능력과 본질을 깨닫고 이 땅에 물질을 쌓아두려는 욕심이 없어졌기에, 자신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며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며 살았다. 이런 이유로 교회는 힘을 얻었고 전도의 폭발이 일어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나라는 이 지상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나라이다. 이 세상은 다 낡고 썩어 없어질 나라일 뿐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기 위해 오셨다. 바로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가 무엇인지를 친히 보여주신 우리의 믿음의 머릿돌이시다. 하나님 나라의 능력을 경험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며 죽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복음을 전하므로 초대교회의 부흥은 놀랍게 증가되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은 문명세계 곳곳에 열성적으로 복음을 전하였다. 가정, 회당, 경기장, 재판정, 왕궁이 천국을 선포하는 무대가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 앞에 구금과 핍박 그리고 적대적인 왕족들이 기다린다고 예언하셨다(마 10:16~20). 불행히도 세속 권력에 취한 자들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 가장 더뎠다.

행 4:1~12, 13:5~12, 50, 23:1~6, 25:23~26:28을 읽어 보라. 어떤 사람은 수많은 사람이 순식간에 회심을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극적인 결과는 보이지 않는 여러 상황에서 비롯된 가시적 산물이다. 추수를 하려면 씨를 뿌려야 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열심히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의 제자들도 유대 지역 곳곳에 복음을 전하였다. 최초의 회심자들도 복음을 전달하는데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죽음을 정복하셨을 때, 그분의 기별을 확신하고 수천 명의 방관자들이 그의 나라에 가담하였다. 그들은 그분을 은밀히 추종하면서 마음속으로 그분의 초청에 응하였다. 문화적 요인, 직업의 안정, 가족의 압박 등이 그들의 분명한 반응을 지연시켰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장벽을 무너뜨리고 결심을 촉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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