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과 토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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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과 그리스도와 종교 전통
하나의 말이 태어나는 곳은 어딜까?
어떤 곳일까?
하나의 말이 태어나는 장소는
무수한 소리가 바람에 호웅하는 갈밭처럼
서걱이며 물결치는 가운데서
하나의 소리가 희미하게 모습을 갖추며
윤곽을 정하며 연기처럼 고요히 솟아오른 끝에
스스로 의미를 그리기 시작하는
신비한 장소,
그곳은 해묵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것처럼
성경은 거침없이 명쾌하게 대답해준다.
성경은 말할 수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고 말 한다.
그것만이 오늘공과의 과제일 것이다.
또한 비트겐수타인은
말 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침묵에 대하여 설명한다.
다무라 류이찌는 언어가 없는 곳은
정오의 시간이라고 말한다.
수직의 시간에 언어가 없는 것은
하늘과 수직으로 맞닿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을 하리오. 하나님은,
걸레 같은 구름처럼 나타나기도 하고
정오의 해가 눈을 부시게 하듯 그렇게 나타내기도한다.
그때는 다만 침묵일 뿐이다.
기억할 절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됭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마 15; 8-9
오늘의 기억 절을 보며
땅 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처럼,
인간 세상 저 너머에 인간을 응시하고 있는
신적인 존재를 생각을 해 본다.
생뚱맞은 생각을 한 것일까?
인간은 휴먼 빙(human being)이다.
휴먼은 라틴어 후무스(humus)에서 나에서 나온 말로
땅의 존재란 뜻이다.
영어의 겸손(humility)이란 단어도
후무스(humus)와 관련이 있다.
겸손은 라틴어로 후밀리타스(humilitas)인데,
이 단어의 어원 역시 땅(humus)에서 비롯되었다.
그렇다면 겸손한 사람은 누구인가?
땅과 하나 되는 사람이다.
땅과 하나 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굽혀야 한다.
그런 점에서 겸손한 사람은 자기가 흙에서 빚어진 땅의 존재임을 아는 사람, 땅에 붙어 있는 사람, 땅과 가까운 사람이다.
그러나 파스칼은 사람에 대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지기가 매우 어려운 존재라고 말한다.
만일 사람이 겸손해 질 수 있는 조건이라면
목숨을 잃고 땅과 함께 무덤에 있을 때야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럴 때만이 자신을 드러내고자 하는
천박한 자기애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개념은
'땅의 먼지(아파르 민 하아다마)'라고 명명한다.
인간은 대단한 무엇인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먼지처럼 바람에 의해
여기저기를 떠다니고
흙처럼 힘없이 밟히는 존재와 같다.
노자는 인간이 알고 있는 것은
모르고 있는 것에 비해 훨씬 작고
인간이 살아왔던 날은 살아가야 할 날에 비해 극히 짧다.
인간은 미물에 가깝기 때문에
궁극적인 도에 이를 수 없다고 말했다.
또한 20세기 최고의 과학자 아이슈타인도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은
앞으로 밝혀져야 할 사실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다고 말했다.
바리새파와 랍비들의 교만은
그들의 유전과 사람의 계명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살포한다.
그들의 안다고 하는 지식이
모르는 것들의 전부임에도
그등의 은유에 너무 천착(穿鑿)한다.
네온싸인이 맣은 동내는
구석구석 광안 대교처럼 화려하다.
그들은 가림의 미학을 터득한듯
눈가리고 아옹한다.
여기서 인간과 다른 동물의 공통점은 흙이지만
결정적 차이는 생기를 불어넣어주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기는 단순한 생물학적인 공급이 아닌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성을 불어넣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존재란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모든 인간은 아담이다.
아담은 히브리말 '아다마'에서 나온 말로
'땅'을 의미한다.
아담은 한 사람을 나타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사람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즉 사람은 아담이다.
땅(아다마)에서 나온 사람(아담)은
먼지(아파르)와 같다.
그 존재 가치가 거의 제로에 가깝고
눈에 띄지 않을 정도의 작은 먼지와도 같다.
그런 인간을 하나님은 무한정 사랑하셔서
생명의 숨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고
생령으로 만들어 주신 것이다(창 2:7).
흙으로 돌아갈 피조체임을 깨닫는 자만이
죽은 존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존재로
주님 곁에 서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창 1:27)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이란
인간의 언어 능력, 인격성과 주체성,
그리고 이성적 사고 능력을 가르치지만
이것은 인간에게 영원히 주어진
불변적 실체의 인간의 형상(imago homini)으로
환치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자연적 본성으로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에서부터 오시는
하나님의 영이 죄인인 인간에게
임마누엘 할 때만 가능하다.
바르트는 하나님의 형상을
원형과 모형의 유비 속에 있는
'계약관계'로 이해한다.
그는 하나님의 형상을
창조 이전의 하나님과
영원한 아들의 근원적 관계에 상응하는
남자와 여자의 관계로,
인간의 존재와 하나님의 존재 사이에는
이런 관계 신학적 유비가 있다고 본다.
따라서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에 대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인간에 대한 하나님 자신으로서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성 안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간주한다.
또한 바르트의 제자인
오토 베버(Otto Weber, 1902~1966) 역시
하나님의 형상을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의 성취이시며
하나님의 형상의 실재성 자체이시다.
그는 하나님을 위한 인간이시며,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인간이시며,
하나님 앞에 서신 인간이시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롬 8:3) 보내셨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새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뿐이지만
그 자신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를 위해서인데,
신자는 그분 속에서 자신의 새 신분과
실존의 종말론적인 형태를 갖는다.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1892~1971)는
인간의 영적 본성으로 인한 자기 초월성이,
곧 성경의 전통이 증언하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이제 성경을 살펴보자.
성경에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포로기(捕虜記) 문서(文書)에 속한다.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 있었던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마르둑 신을 숭상하는
바벨론의 웅장한 문화와
자신들의 포로 상태의 왜소함을 비교한다.
거기서 그들은 인간의 노동으로 만들어진
신의 형상들이 도리어 인간을 지배한다는
불합리성과 종교적 숭배 뒤에 숨어 있는
무자비한 착취 구조를 역설한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은 태초에 인간을 창조하시고
에덴동산에 이끄시고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셨다고 말한다(창 2:15).
여기서 '경작하다'는 말은
'종', '노예'를 의미하는 '에베드(abed)'에서 나온 말로
'일한다(abad)'는 뜻의 동사형이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듯이
에덴동산은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마냥 풍요와 즐거움만을 찾는 유흥장과 같은 곳이 아니라
함께 동산을 가꾸고 경작하며 노동을 하는
삶의 일터와 같은 곳이다.
따라서 노동은 타락한 인간에게 내려진 징벌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실현해 가는 인간의 본질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노동하는 인간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형상'이다.
반면 경륜적 삼위일체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徑輪)을 말하는 것으로
성부의 창조, 성자의 구원, 성령의 성화를 말한다.
이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
혹은 '계시의 삼위일체'라고 한다.
여기서 경륜적 삼위 하나님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으로
삼위 하나님이 직접 천지창조와 구원의 사역,
즉 노동을 하셨다는 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은 인간 또한 노동하는 존재로 규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일반적으로 인간을 가르치는 단어
휴먼 빙(human being) 대신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human doing)으로 바꾸어 써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하면 인간은
단순히 땅의(humus) 존재(being)가 아니라
땅의(humus) 일꾼(doing)이란 말이다.
이때 인간의 본질은 일하는,
혹은 노동하는 존재가 된다.
성경은 일하기 싫은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살후 3:10)고 했다.
비약하자면 일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파괴하는 사람이다.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리스도인은 노동을 기피하거나
노동의 가치를 폄훼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노동을 즐겁고 복된 마음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주어진 일을 해야 한다.
비록 나의 삶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이
정신노동이든, 육체노동이든, 큰일이든, 보잘것없는 일이든
최선을 다할 필요가 있다.
그런 사람이 땅(humus)과 같이
겸손하게 일하는 사람으로(doing)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는 사람은
사람의 계명을 배격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의 삶이 힘들다고 생각한다.
내게 주어진 삶에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지나친 삶의 부담을 견디지 못한다.
우리의 삶이 나에게 주어진 일이,
혹은 앞으로 주어질 모든 일은 극복하지 못할
신의 징벌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의 본질을 이루어 가는 아름다운 과정이다.
이 세상은 어제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모순과 부조리로 가득 찰 것이다.
성경의 전통은 아예 도외시하고
사람의 계명을 전통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믿음의 노선은 그 자체가 아름다운 인간의 근본이다.
이 땅의 모든 휴먼 두잉(human doing)은
힘 있고 가진 것 있다고 뽐내는 것이 아니라
우주 가운데
한낱 흙으로 왔다가 흙으로 돌아갈
먼지임을 기억하고
넙죽 엎드려
갯벌에 입 맞추는 아름다운 겸손을 가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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