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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그리스도와 종교 전통(교사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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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과 그리스도와 종교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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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안식일

일몰:오후 7시 11분

 

기억절 :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마 15:8~9).

 

도입)

많은 경우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주장은 하나님의 가르침과 그 행위가 일치하지 않았으며,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대신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을 공경한다고 생각했다. 비성경적인 기준을 세워 놓고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이를 따르도록 하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다. 때때로 교회 안에서도 전통을 말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님 말씀과는 거리가 먼 일이 많다. 그냥 자기들이 해오던 습관들, 자기들이 전통적으로 해오던 방법들을 내세우는 것이다. 각자의 오래된 전통과 방법들을 하나님의 계명 보다 더 내세운다. 이것이 큰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 보다 사람들의 생각으로 교회 일을 결정하는 것이다. 또 신념이 너무 강해서 그 신념이 하나님의 말씀 보다 앞설 때가 있다. 자기 철학이나 상식이나 계획이 하나님의 말씀 보다 위에 있는 경우들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전통이나 신념이나 상식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들이다. 교회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내 생각, 내 전통, 내 신념이 앞서 가다보면, 정작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이 아니게 된다. 그냥 자기를 위해서 한 일이다. 섬기는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된다. 우리도 우리 자신의 생각을 합리화시켜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 일은 없는지, 내 생각을 고집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일은 없는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내 열정을 섬긴 것은 아닌지, 교회를 위한다고 하면서 내 자신을 위한 것은 아닌지 우리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연구 범위 : 마 23:1~7, 마 15:1~6, 사 29:13, 마 5:17~20, 롬 10:3.

 

감리교의 설립자 존 웨슬리는 신학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믿음, 이성, 성경 그리고 전통 이렇게 4가지라고 지적했다. 그렇다고 4가지 모두 다 동등한 권위가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는 성경이 가장 기본이며, 그다음으로 개인의 믿음과 사고 능력 그리고 성경 해석에 영향을 주는 신앙 전통의 가치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지금 웨슬리가 환생한다면 오늘날 웨슬리 신학 계열의 학자들(물론 다른 신학자들도)이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보다는 이성과 전통 그리고 개인의 견해를 더 가치 있게 여기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을 것이다.

이번 주에 우리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교리의 바탕으로 삼았던 종교 전통에 대해 연구한다. 최초로 이런 전통을 기록한 랍비들은 성경을 절대적으로 존중하였기 때문에 전통을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는 지위보다 높이려는 의도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열성적인 그들의 제자들이 기별과 방법을 혼동함에 따라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에서 인간의 전통으로 강조점이 옮겨졌다.

 

*적용 질문에 꼭 자신의 생각이나 결심을 적고 실천하십시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종교적인 전통이 결코 하나님의 법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하나님의 법이 전통보다 훨씬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➌ 행하기 : 우리 속에서 시작된 의로운 일들이 더 진전되도록 성령께 마음을 맡긴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그대가 속한 사회나 조직의 전통 가운데 지나치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❷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 종교적인 전통을 만든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❸ 목적과 달리 사람이 만든 전통에 초점을 맞춘 신앙에는 어떤 문제점이 있었습니까?

❹ 우리가 성경의 의도에 맞게 재수립해야 할 전통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B. ❶ 각자 자기 가족이 지키는 전통과 그 목적을 소개해 봅시다.

❷ 바리새인들은 어떤 종교적인 전통을 만들었습니까?(부탁 받은 반생이 미리 조사해 옴)

❸ 예수님이 전통을 중시하는 신앙을 경계하셨던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성경의 명령에서 벗어난 기독교의 전통은 무엇이며 우리는 그런 전통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결론 : 피조물은 하나님의 법을 변경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분의 법은 바꿀 수도 변경할 수도 없습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지난주 초청 대상자들을 위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서로 이야기합니다.

❷ 그들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 4월 27일에 가벼운 산행이나 소풍을 계획해 봅시다.

❸ 구도자를 위해 그리고 안교반(소그룹)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모세의 자리

4월 13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마 23:2~3).

 

교사강해 1)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이다. 말씀을 지식적으로만 열심히 배우고 익히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깨달은 말씀 하나를 실제 생활에 적용시켜서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다고 하셨고,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다"고 하셨다(마7:24-27).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을 속이는 자입니다(약 1:22절). 속인다는 것은 '사기를 친다'는 뜻이다. 사기란 상대를 해할 목적으로 속이는 행위를 말한다. 만일 우리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다면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된다고 하셨다.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예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꾸짖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마23;3-7).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성경을 많이 알고 있었기에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말하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외식하는 삶을 사는 위선자들이었다. 자기들은 선하고 의로우며 다른 사람의 선생이라고 자부하였다. 그들은 자기들이 성경을 많이 알고 있다는 자아 도취감에 빠져서 스스로에게 속아 자기들이 다 된 줄 알았지만 결국은 주님의 책망과 저주의 대상이었다.

 

항상 함께 언급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분리된 계파처럼 보이지만 사실 서기관들은 바리새파의 일부분이었던 것 같다(행 23:9 참고). 바리새파는 그리스제국 통치하에 등장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마카비 혁명기에 그리스와 맞서 싸웠던 ‘하시딤’이라는 경건한 유대교 종파의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바리새’라는 이름은 ‘나누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바라스’에서 유래했다. 많은 유대인이 이교 문화로부터 지대한 영향을 받았던 시절, 바리새인들은 모든 유대인 남자가 율법을 배우도록 제도화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들은 ‘나의 위대한 분’ 또는 ‘나의 스승’이라는 의미의 ‘랍비’라는 계급을 만들었다.

예수님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았다고 언급하심으로 백성들의 교사로서 그들의 지위를 인정하셨다(마 23:2~3). 왜냐하면 적어도 백성들이 율법의 길을 배우도록 보장할 책임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 23:1~7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예수님 사이에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었는가?

복음서에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언급은 대부분 부정적이다. 다는 아니지만 많은 수가 예수님의 죽음을 공모했고 제자들을 핍박했으니 그런 부정적 시선은 당연하다. 그들은 길모퉁이나 나무 뒤에 숨어 법을 집행하기 위해 백성들이 실수하기를 기다리는 자들 같았다. 이러한 바리새인들의 이미지는 성경에서 빈번하게 등장해서 마치 그 말이 율법주의자라는 말과 동의어처럼 사용될 정도였다.

 

교훈 :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의 스승으로서 율법을 가르칠 의무가 있었지만 예수님 당시에 그들의 신앙은 많은 경우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았다.

 

부가적용)

우리는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7:24,25)라고 하였다. 말씀을 행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말씀을 잘 들어야 한다. 말씀을 바르게 들어야 그 말씀이 믿는 자 가운데서 역사한다. 한 말씀을 듣더라도 너에게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들어야 한다. 이에 대하여 데살로니가전서 2:13에 잘 기록되어 있다.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 그리고 작심하고 깨달은 말씀대로 실천해야 한다.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고 하셨다. 인간이 그 행한 바 의로운 행실로는 구원받지 못한다.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진다. 그러나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은 행함으로 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구원받은 우리를 향하여 이에 합당한 행위를 요구하신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요일3:18).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14:15).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14:21).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요 15:10).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삶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마10:42).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혹시 그대의 신앙 가운데 주장은 하지만 지키지 않는 진리는 없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마 23:1~7을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예수님이 바리새인들에 대하여 제기하신 커다란 문제점은 다른 이들에게는 모세의 법을 지키기를 바라면서 정작 그들 스스로는 그것을 지키려하지 않았다는 데에 있었다. 그들은 말과 행동이 다른 위선자들이었다. 설령 그들은 옳은 일을 해도 잘못된 동기를 가지고 그렇게 했다.

 

| 적용 |

언행이 일치하는 신자가 되기 위해 그대가 회개하고 보완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가장 심한 형벌을 가져오는 죄 - “그러나 가장 심한 형벌을 가져올 것은 경건의 가면 아래 자행되는 죄악이다. 세상의 구속주는 아무리 큰 범죄일지라도 진정한 회개를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바리새인과 위선자들에게 심한 책망을 하셨다. 이 부류의 사람들보다 공공연한 죄인에게 훨씬 더 큰 희망이 있다”(교회증언 5권, 144).

 

기 도

아버지, 그동안 저는 지키지도 않는 진리를 마치 나는 아무 문제없는 사람인 것처럼 전하고 가르쳤던 잘못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것을 남에게 제시하기 전에 먼저 스스로 실천하기를 무엇보다 간절히 원하는 진실한 마음을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사람의 계명

4월 14일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마 15:3).

 

교사강해 2)

전통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전통은 좋은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열정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열정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전통과 열정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아래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제받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도되어야 한다. 그때 그 전통은 정말 좋은 전통이 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도 귀한 것이 된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왜 유전을 어기고, 씻지 않은 부정한 손으로 음식을 먹는지 물었다. 그들은 깨끗한 겉모습만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과 형식주의에 대해 책망하시며,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킨다고 말씀하셨다(마 15:7-9절). 식사하기 전에 손을 씻는 인습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되지 못한다. 그리고 그 한 예로 ‘고르반’을 들고 계신다(마 15:10-13절, 도움말 참조). 그들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사람들이었다(마 15:6절, 사 29:13).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았지만 종교적 교훈을 가르칠 그들의 권위는 그 원천이 구약성경을 벗어나 있었다. 바리새인들이 사용하는 법은 뛰어난 랍비들의 성경 해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해설의 의도는 성경을 대체하려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것들이 입으로 회자되었지만, 나중에 서기관들이 수집하여 책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최초의 공식적인 랍비의 법은 기원후 2세기 말엽 랍비 ‘예후다 하나시(유다 왕자)’가 <미쉬나>를 출판하면서 비로소 등장하였다. <미쉬나>에 기록된 법들은 랍비들이 4백 년 동안 성경을 해설한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 살았던 많은 랍비들이 <미쉬나>에 기여한 인물이며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랍비는 ‘힐렐’과 ‘샴마이’였고 바울의 스승이자 힐렐의 손자였던 ‘가말리엘’도 있었다.

마 15:1~6을 읽어 보라. 여기서 쟁점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어떤 잘못을 교정하려고 하셨는가?

제1과에서 우리는 랍비의 법을 ‘행하다’라는 의미에서 ‘할라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배웠다. 랍비들은 어떤 사람이 하위 법들을 따라 행하면 저절로 상위법도 지키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위 법들이 높은 지위를 차지하면서부터 성경적인 것과 전통적인 것을 구분하기 어려워졌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규율을 만들었다고 해서 예수님이 문제를 삼으셨던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규율을 교리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태도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으셨다. 사람은 종교적인 규제를 만들어서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 수준으로 격상시킬 권위가 없다. 이는 교인 집단이 공동체의 행실을 통제하기 위해 규칙을 만들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훈령은 백성들이 법을 지킬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준다. 그러나 그것이 법의 지위를 대신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

 

교훈 :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기 위한 하위의 법을 만들었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인간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부가적용)

바리새인들은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처럼 자신들을 보이려 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저들을 외식하는 자들이라 하셨다. "외식하는 자들" 영어로 hypocrites, 그 뜻은 '위선자들, 가면을 쓴 자들'이란 의미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가면을 쓰고 살았다. 거룩한 척, 믿음이 좋은 척, 경건한 척 가면을 쓰고 살았다. 하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속마음은 거룩하지도 않고 경건하지도 않았다. 이처럼 겉과 속이 다르고, 행동과 마음이 같지 않고,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외식하는 자들이다. 외식하는 자들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다. 그 마음은 하나님을 떠났다. 하지만 가면을 쓰고 있기에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두 번째 특징은 사람의 계명을 교훈을 삼아 사람들을 가르친다.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바를 가르친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면서도 전통에 슬쩍 끼워 넣어서 하나님의 계명인 것처럼 가르치지만, 그것은 사람의 계명일 뿐이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물을 섞어 왜곡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운운한다. 하나님의 뜻을 들먹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그래서 가만히 들어보면 하나님의 뜻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실상은 다 자기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 같지만 자기 뜻을 내세우는 것들이 많다.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지만 다 자기 영광을 구하는 일들이 많다. 이 모두가 헛되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들이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제칠일 안식일 예수재림교회로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에 더 충실하고 순종적으로 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어떤 전통 또는 관습이 있습니까?

신약시대의 유대인처럼 말씀을 실생활에 구체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도 많은 지침이 제시되었습니다. 식생활, 의복, 교육, 가정, 여가, 교회 사업 등 범위도 다양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지침이 성경의 빛 아래에서 가장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적용 |

성경적인 신앙을 위해 그대에게 가장 요긴한 재림교회의 전통은 무엇입니까?

 

영감의 교훈

성령을 부어주는 일이 불가능한 자들 - “예수께서는 인간의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게 할 수 있는 성령을 인간의 영혼에게 부어 주시기 위하여 오셨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틀에 박히고 변함이 없는 교리에 사로잡히고 그리스도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유전과 인간의 계명을 따라 행하는 자들에게는 성령을 부어주는 일이 불가능하다”(가려 뽑은 기별 1권, 386).

 

기도

하나님, 우리에게 풍성한 영적 유산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유산을 소중히 여기며 그 지침들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더 가깝게 나아가고 성경의 진리를 더 분명하게 제시할 수 있도록 복을 주시옵소서.

 

셋째날(화) 장로들의 전통

4월 15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마 15:1~2).

 

교사강해 3)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 한다.’는 장로들의 전통(tradition)을 가지고 예수님을 법을 어긴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여기서 ‘장로들’이란 나이가 많고 율법을 잘 아는 랍비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을 말한다. 이들은 공식적으로 율법을 해석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장로들의 율법에 대한 해석은 율법 자체와 똑 같은 구속력을 가지고 있었다. ‘장로들의 전통’이란 장로들에 의해 명령 형식으로 전승되어 내려온 구전율법(口傳律法)을 뜻한다. 차츰 유대인들은 율법 자체보다 장로들의 전통인 구전율법을 더 중요하게 취급하게 되었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고 하셨다. 즉 사람이 정한 어떠한 법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선이라는 말씀이다.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어야한다는 규정은 사람이 정한 것이지 하나님이 명령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장로들의 율법해석이 우선이 아니라 율법 자체가 우선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의 율법해석은 하나님의 뜻과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아무리 위대한 학자나 사상가의 학설이나 주장도, 그리고 아무리 유명한 목사의 설교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우선되는 권위를 가질 수 없다는 교훈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최고의 권위를 가져야 한다.

 

앞서 보았듯이 어떤 랍비들은 모세의 법을 지키기 위한 보조 수단으로 수립한 규율과 전통들에 너무 관심을 기울이다보니 둘 사이를 구분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런 사이에 랍비의 말은 경전의 지위를 획득했고 백성들은 랍비의 말이 성경만큼 구속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랍비들이 처음 주석을 기록했을 때는 성경에 덧붙일 의도는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열성적인 제자들은 이러한 특별한 해설을 일반 백성에게 전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마 15:1~2을 읽어 보라. 그 전통은 모세오경 가운데 어떤 말씀에 기초해 있는가? 그대의 대답은 어떤 중요성을 담고 있는가? 막 7:3~4과 마 15:11도 참고하라.

성경에 ‘음식을 먹기 전에는 손을 씻을지니라’는 명령은 없다. 그렇다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이런 반론에 기가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예수님과 논쟁할 때에 제자들이 범한 것은 모세의 법이 아니라 장로들의 전통임을 명백히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이 제기한 문제의 강도에 따르면 이것은 바리새인들에게 심각한 종교적 위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건강 전문가나 부모들은 바리새인들이 과도할 정도로 손 세척을 강요했던 위생학적 또는 심리학적 이유를 대고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학자들은 진정한 쟁점은 제의적 부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바리새인들은 백성들이 일상적인 일을 하면서 그들을 더럽힐 물체에 접촉했을 가능성에 대해 우려하였다. 그래서 만약 손을 씻지 않고 음식물을 집어 먹으면 제의적으로 오염되었다고 보았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트집을 잡았던 사실에서 미루어볼 때, 우리는 예수님이 그러한 관습을 어기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막 7:3). 그럼에도 그분은 바리새인들이 사소한 문제를 지나치게 확대하고 있음을 아셨다.

 

교훈 : 바리새인들은 성경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에 치중하여 손 씻는 의식 같은 장로의 전통을 지나치게 강요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부가적용)

우리의 주변에 자연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보다 자연 또는 자신들의 자연관에 더 권위를 부여한다. 사회주의자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사회론에 더 권위를 부여한다. 도덕론자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들의 도덕론을 더 우선시한다. 과학주의자들은 자신들의 과학을 우선시한다. 경제가들은 자신의 경제론을 앞세운다. 교육가들은 자신의 교육론을 우선시한다. 간혹 성도들 중에도 하나님 말씀보다 어떤 이론이나 주의(主義, ism)를 따라 말하며 살아가는 분들이 있다. 이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상식(常識)과 합리적(合理的) 사고와 경험(經驗) 그리고 다수(多數)가 진리라는 생각으로 살지 말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진리이며 바로 이 진리에 따라 지식과 상식과 합리적 사고와 경험적 지식을 사용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작은 일에 집착하다가 큰 것을 놓치지는 않습니까?

식사할 때 손을 씻지 않는 것보다는 씻는 것이 훨씬 낫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것을 종교적 규율로 정할 만큼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보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소한 문제를 규율로 정할 때 정작 더 중요한 문제들이 가려질 것을 우려하셨습니다. 그래서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마 15:11)고 하셨습니다.

 

| 적용 |

어떻게 하면 세부적인 신앙 지침이 지나치게 확대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을까요?

 

영감의 교훈

그들을 택하지 않으신 까닭 - “그분께서는 하늘의 왕이셨지만 당신의 제자들을 학식 있는 법률가, 통치자, 서기관, 바리새인들 중에서 택하지 않으셨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기들의 학식과 지위를 자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의 유전과 미신적 관습에 사로잡혀 있었다”(치료봉사, 197).

 

기 도

하나님, 우리에게 좀 더 넓은 시야를 주시옵소서. 작은 것을 보는 동안 큰 것을 놓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게 하시고 하나님의 사랑과 법도의 큰 의미를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넷째날(수) 사람의 교훈

4월 16일

 

“너희는…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 15:5~6).

 

교사강해 4)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 5계명과 함께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21:17)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셨다. 그런데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 = (고르반: 막7:11)고 말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로들의 전통이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빼앗았다고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꾸짖으셨다.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에서 ‘폐하다’라는 단어는 ‘권위를 빼앗다’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가정의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학생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공부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직장인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직장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사람을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 또한 ‘외식하는 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를 빼앗는 자이다. 즉 말씀을 버리거나 없애는 사람이다. 외식하는 자는 위선자이다. 즉 사람에게 보이려고 겉으로 꾸미는 사람이다.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면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께 하듯이 한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않고 모든 일을 주님께 하듯이 한다.

 

“하나님의 계명을 사람의 교훈으로 대체하는 일은 그쳐지지 않았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조상의 유전에 기초를 둔 것이나 다름없는 제도와 관습들을 찾아볼 수 있다. 단순히 인간의 권위에만 기초를 둔 이와 같은 제도가 하나님이 지시하신 제도를 대신하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유전에 집착하고 관습을 존중하며 그들의 오류를 보여 주려고 하는 자들을 증오한다.… 하나님은 소위 교부들의 권위 대신에 천지의 주 되시는 영원하신 아버지의 말씀을 받으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신다”(시대의 소망, 398).

마 15:3~6을 읽으면서 동시에 출 20:12, 신 5:16, 마 19:19, 엡 6:2을 참고하라.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어떤 두 가지의 문제점을 지적하셨는가?

바리새인들이 손 세척의 문제로 예수님과 논쟁을 벌일 때, 그들은 그분이 자신들의 비난에 바로 응하시리라고 예상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분의 특유의 방식대로 쟁점의 핵심을 찌르는 질문으로 그들에게 대응하셨다. 예수님은 문제가 손을 씻거나 십일조를 드리는 행위가 아닌 인간이 만든 규범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규범 위로 격상시키려는 데 있음을 그들이 깨닫기 바라셨다.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는 의식에 대한 그들의 입장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부모보다는 하나님의 유익을 위해 자원을 쏟아 붓는 것이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의 표현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행위에 대한 논리적 동기를 마련했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방식대로 그분을 사랑하기를 바라지 않으신다. 그들이 훈육과 거룩한 삶에 관심을 기울인 것은 바람직했지만 그런 관심이 하나님의 뜻을 가려서는 안 되었다.

 

교훈 :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사람의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문제점을 지적하셨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뜻대로 그분을 사랑하지 않기를 바라신다.

 

부가적용)

예수님은 이들이 장로들의 전통을 하나님의 계명보다 더 중시하는 것을 책망하셨다. 전통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전통은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화하게 도와준다. 사도 바울도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라고 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전통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선시해서는 안 된다. 가톨릭의 타락도 말씀보다 전통을 우선시 하는데서 생겨났다. 면죄부는 무엇인가? 그것은 죄사함의 확신을 주고 죄지은 것에 돈으로 책임을 지고 그 돈으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말씀보다 우선되었을 때 면죄부는 죄사함을 빙자한 돈벌이 수단이 되었다. 루터가 개혁하고자 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하나님은 친히 써서 주신 십계명에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다. 십계명을 풀어주신 말씀에서는 네 부모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고 하셨다. 부모님에 대한 효를 절대적으로 가르쳤다. 그러나 내가 부모님께 드려서 유익하게 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면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이것이 장로들의 전통이다. 이들은 부모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섬기자는 좋은 취지에서 전통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부모님에 대한 효도를 하지 않았다. 우리가 부모를 섬기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섬기느냐는 양자택일에서는 반드시 먼저 하나님을 섬겨야한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 때문에 부모에게 효도를 내 팽개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도 섬겨야 하지만 부모님께 효도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다 하도록 가르치신다. 예수님은 부모보다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섬기셨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말씀을 듣고 있었다. 부모님이 예수님을 잃어버린 줄 알고 찾아왔을 때 예수님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할 줄을 모르셨느냐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집에 가서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부모를 섬겼다. 예수님은 어머니가 찾아왔을 때 누가 내 어머니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자가 내 어머니라고 섭섭한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돌아가실 때는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며 돌아가셨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하나님의 교훈보다 우선시하는 인간의 전통이나 제도는 무엇일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법에 기록된 613개의 법이 모순되지 않고 조화롭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했다. 어떤 법도 다른 법으로 대체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적어도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화시켰다(마 15:6). 그들은 자신을 율법의 수호자라고 여겼건만,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을 더 잘 지키도록 돕는다던 바로 그 전통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심지어 소용없는 것으로 만든다는 책망을 들었으니 틀림없이 충격을 받고 수치를 느꼈을 것이다.

 

| 적용 |

그대가 전통적인 신앙보다 성경적인 신앙을 하기 위해 수정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그리스도의 가르침 -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성경 풀이 하는 것과는 같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랍비들은 유전과 사람의 이론과 추측을 중히 여겼으며, 성경에 관하여 사람들이 가르치고 기술한 것이 때때로 성경을 대신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훈의 주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복음교역자, 44).

 

기 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아름다운 신앙 전통이 있지만 그것을 고수하겠다고 오히려 “정의와 긍휼과 믿음”(마 22:23)을 저버리는 자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섯째날(목) 더 나은 의(마 5:20)

4월 17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5:20).

 

교사강해 5)

*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고 그분의 휘장을 달고 있다고 해서 모두 그분의 백성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하나의 싸움이며 진군이다. 그러나 얻어야 할 승리는 인간의 힘으로 얻어지지 않는다. 싸움의 장소는 곧 마음이다. 우리가 싸워야 할 싸움, 인류가 지금껏 싸운 가장 큰 싸움은 자아를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키는 것, 곧 마음을 사랑의 주권에 바치는 것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 난 옛 본성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 유전적 성향 곧 이전 습관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산상보훈 141) 매 발걸음마다 열렬히 기도하며 자아를 낮추는 일 없이는 승리를 얻을 수 없다.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의 능력에 억지로 협력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성령의 감화보다 백 배나 더 큰 강도(强度)로 그대를 강요할 수 있다 할지라도, 그것이 그대를 하늘에 적합한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사단의 요새는 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대는 스스로의 힘으로 그대의 목적과 욕망과 성향을 하나님의 뜻에 굴복시킬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하나님이 그대를 위하여 그 일을 이루어 주시되 심지어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고린도후서 10장 5절) 하기까지 하실 것이다.

 

마 5:17~20을 읽어 보라. 이번 주 교과의 문맥을 살펴볼 때 마 5:20에 나오는 예수님의 권고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롬 10:3도 참고해 보라.

한 절만 본다면 마 5:20은 마치 바리새인이 아닌 자들에게 바리새인처럼 하라는 권유로 보인다. 심지어 그들보다 더 열심히 행하라고 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정말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다행히도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다. 어제 교과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심심찮게 관습적인 법을 하나님의 법 위로 격상시켰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가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을 결과적으로 무력화시키고 있음을 그들에게 말해 주셔야 했다.

월요일 교과에서 언급한 것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교훈은 좋았으나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위선적인 삶을 살았다.

이런 문맥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의 진의를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분은 앞 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마 5:19) 했던 말씀을 언급하셨던 것일 수도 있다. 바리새인들은 너무나 인간에 기원을 둔 법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노골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파괴하고 말았다. 그들의 의는 그들 자신의 노력에 기초해 있었기 때문에 결함이 있었다. 이사야는 오래전 인간의 의는 더러운 옷에 지나지 않다고 단언하였다(사 64:6).

예수님이 장려하는 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종류의 의이다. 손 씻는 의식에 대한 논쟁에서 예수님은 사 29:13을 인용하여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지적하셨다. “이 백성이…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 29:13). 하나님이 추구하는 의는 눈에 보이는 행위 이상의 깊은 차원이 있다.

 

교훈 : 예수님은 인간이 노력하여 이룬 행위로 말미암는 의를 훨씬 능가하는 의, 즉 자아를 굴복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를 요구하신다.

 

부가적용)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움과 하늘나라의 영광에 매력을 느끼고 있지만, 그것을 소유하는 데 따르는 조건들을 만족시키려고 하지 아니한다. 넓은 길에는 그들이 걸어가는 길에 완전히 만족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죄악의 속박에서 빠져 나오길 열망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죄악적 습관에 대항하고자 애쓴다. 그들은 좁은 길과 좁은 문을 바라보나, 이기적 쾌락과, 세상에 대한 애착과, 교만과, 성화되지 못한 야망들이 그들과 구주 사이에 담이 된다. 자신의 의지와, 자신이 택한 애정의 대상, 흑은 직업을 버리는 것은 희생을 요구하나, 그들은 이 때문에 주저하고 망설이며 돌아선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 하는 자가 많으리라”(누가복음 13장 24절). 그들은 선을 바라고 그것을 얻기 위하여 어느 정도 노력을 하나 그것을 택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모든 것을 희생하고라도 선을 얻으려는 확고한 목적이 없다.(산상보훈 142p)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신앙생활을 자기 노력으로 하는 사람과 믿음으로 하는 사람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의는 바리새인들이 소유했다고 생각하는 의를 능가한다. 진정한 의는 행위 목록을 일일이 점검해서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우리를 위한 그분의 의를 주장함으로 그 의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완전한 자기 굴복에서 비롯되며, 우리에게 우리의 대속물이자 모본이신 예수님이 필요하다는 뜨거운 자각에서 이르러 온다.

 

| 적용 |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구하는 그대의 믿음을 고백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천국에 들어가는 의 -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바리새인의 의와는 다른 성격의 의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통하여 그들에게 완전한 율법의 마음의 문을 활짝 열면, 바로 하나님의 생명, 그분의 사랑이 그들 안에 거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을 통하여 율법이 요구하는 의도 얻게 될 것이다”(산상보훈, 55).

 

기 도

아버지, 저의 노력이 저를 구원하기에 무가치함을 고백합니다. 오직 순결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흠 없고 완전한 의에 의지합니다. 그 의를 입고 주님의 모습으로 행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성령으로 끊임없이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비옵나이다.

 

여섯째날(금) 더 깊은 연구를 위해

4월 18일

 

<시대의 소망>, 395~398 “유전”, 610~620 “바리새인들에게 화가 있음”과 마태복음 23장을 읽어 보라.

 

“인간의 권위, 교회의 관습 혹은 조상들의 유전을 받아들이는 자들은 다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라고 하신 말씀에 내포된 경고에 유의하도록 하라”(시대의 소망, 398).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따르는 전통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들을 인정하는 것이 왜 중요합니까? 전통들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이며 공동체 생활 속에서 그것은 어떤 역할을 합니까? 보편적인 중요성이 있는 전통은 무엇이며 지역과 문화적 요인에 기초한 전통은 무엇입니까?

 

➋ “신자들은 때때로 그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사업의 발전을 위하여 전적으로 헌신했어야 할 바로 그때에 원수가 그들을 통하여 역사하도록 허락했다. 모르는 사이에 그들은 의의 길에서 멀리 떠나 방황하게 되었다. 그들은 비평과 흠을 찾는 정신, 바리새인적인 경건과 교만의 정신을 품음으로써 하나님의 영을 슬프시게 하고 하나님의 사자들의 사업을 크게 방해했다”(교회증언 9권, 125). 우리는 어떻게 “모르는 사이에” 의의 길에서 멀리 떠나게 됩니까? 자기 의의 틀에 갇히지 않으려면 어떤 단계를 밟아야 합니까?

 

➌ 우리 교회 예배 순서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교회는 왜 그런 순서를 따르고 있습니까? 기원, 송영, 대표기도 등과 같은 각 순서에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전통이 우리 신앙생활에 얼마나 깊숙이 맞물려 있는지 보여주는 교회 예배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됩니까? 동시에 우리는 단지 전통일 뿐 다른 이유는 없다면 그것이 나쁜 것인지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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