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과 그리스도와 모세의 법(토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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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그리스도와 모세의 법
기억절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요 5:46)
빙산의 일각이라는 말이 있다.
바다에 떠 있는 얼음덩이 조각이 작게 보여도
그 밑에는 10배가 넘은 크기의 얼음이 숨어 있다.
언어학에서는 얼음덩이를
<형식지>와 <암묵지>로 분류한다.
형식지는 들어난 일각을 말하고
숨어있는 엄청난 크기의 빙벽을 암묵지라고 말한다.
이번 기 동안은 모세의 율법을 공부할 것이지만
율법사나 바리세인들처럼
모세의 율법을 통달한다 할지라도
빙산의 일각에 불가하다.
막상 지혜와 통찰력의 보고(寶庫),
보물섬은 일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다 밑에 숨겨져 있는 암묵지이다.
앞을 못 보는 심학규는
죽은 줄 알았던 딸 심청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자
그가 있다는 궁으로 가서 딸을 만난다.
음성을 듣고 딸임을 확인하지만,
끌어안고 얼굴을 만져본들 보지 못하니 답답할 뿐이다.
어디 보자 내 딸 심청아!
눈먼 봉사 심학규는 눈을 번쩍 떠본다.
기적이 일어났다.
보인다. 보여! 청아 네가 청이로구나!
심학규는 딸을 보자 감격으로 절규한다.
잔치에 참석한 다fms 봉사들도 덩달아 눈을 뜬다.
그들은 지팡이를 집어 던지고
얼굴과 얼굴을 맞대어 보며 웃음잔치 벌린다.
우리나라의 전통 전설 이야기다.
마치 우리의 미래관을 쓴 성경 이야기같다.
우리나라의 전설 이야기 중 춘향이 이야기도 있다.
이 소설 역시 성경 이야기 같다.
오직 굳은 절개로 이도령을 기다리지만
삿도의 유혹과 옥사리를 견뎌야했다.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오자
춘향이는 구제된다.
언잰가 기독교 방송국에서 보도된 이야기이지만
춘향전을 현대판으로 번역하던 소설가가 체포되어
순교를 당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죄목은 성경의 축소판이라 했다.
자!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일요일부터 목요일까지의
분류된 제목의 소지는 참으로 방대하다.
일요일; 할례, 성경에는 할례에 다하여
이방인과 구별짓는다라고 설명한다.
월요일; 명절; 유대인의 유수(幽囚)기간에 지킬 수 없었던
세 개의 명절,
화요일; 하나님의 전, 사람의 전에 대한 비교 연구는
영원을 공부해도 암묵지의 비밀일 것이다.
수요일;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세리들을
미워할 일이 아니다.
만일 세금 쟁이를 미워한다면
헌금을 거두는 수금 집사들을 미워하는 것과 같을 것이다.
목요일; 법; 보좌의 초석이다.
오늘 공부할 소제들을 볼 때
너무나 방대하여 평생을 공부해도
입이 딱 벌어질 엄청난 주제다.
오늘은 할례에 대한 나의 소신만을 말하려한다.
할례의 의미를 검토하기위해서는
우주에 속한 다양성을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감히 이 짧은 지면을 통해
우주를 논할 수 는 없지만,
할례는 번제단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할례의 히브리원어는 <물>이다.
뜻은 짜르다인데 남성의 생식기의
끝부분을 덮고 있는 피부를 잘라내는 행위를 말한다.
할례의 기원 역시 추론에 의지할 수밖에 없지만
그 중에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 3가지를 들 수 있다.
1. 할례는 부부생활과 관련하여
여자에 대한 배려로 시행된듯하다.
<필로>는 할례를 변론하는 글에서
부분적으로는
지나치게 현학적이다(on the special Laws I. 4-7).
할례관습이 결혼을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하는 논리에서
성 행위의 이슈가 오르가슴과 관련이 있으므로
남자와 여자의 오르가슴의 시제의 갭을 좁혀주는
방법론이라고 말한다.
남성의 성기의 예민성을 줄이면서
여성의 오르가슴과의 격차를 좁혀주는 것이라 했다.
2. 할례는 제사제도의 형식이지만
진화론에 기인한 종의 기원 논리를 배격한다.
성소제도는 죽을 죄인들에게
사는 방법을 제시하는 봉사이고,
없음에서 있음의 생명체를 만드는 봉사이다.
첫 창조와 재창조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AD 9세기에 회당에서 이루어지기까지는
주로 집에서 이루어졌다.
하지만 출 4;24-26에 대한 탈금의 해석은
모세의 아들의 할례의 피를
모세로 하여금 야훼의 진노를 벗어나는
속죄의 가치를 갖는 것으로 보았다(참고문헌 M.. shab 19.16).
또한 유대교는 탄나의 시대 이래로
할례에서 피 흘리는 것을 중시하게 되었다.
허지만 제사의 개념은 강조하지 않았다.
3. 후대에 히브리인들에게는
언약의 백성으로 가입하는 행위였다.
그러나 이것이 할례의 목적이었는지 어떤지는
단정해서 말할 수 없다.
할례가 시작되었을 당시 사람들이
발가벗고 사는 것이 관례였다고 간주하지 않는 한
부족적인 차이를 눈으로 확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에게 내린 명령은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의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니라.
바울은 아브라함의 할례를
그의 의를 인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히브리인들은 오늘날 <뻬리트>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 그뜻은 언약이다(롬 4;11).
이사야 52장 1절에는
할례받지 않은 사람은 부정한 것이라했다.
성경에 표징이라는 단어가 17번 나오는데
그중 너와 나사에에 표징라는 말은 4번 나온다.
그중 3번은 안식일이고
한번은 할례이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알아보는 방법은
안식일과 할례이다.
할례의 중요성은 자못 대단하다.
창 17; 11에, 히브리 원어는 <오트>이다.
오트는 표징 신호 증거 표시라는 뜻이 있다.
언약의 표징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하나님의 사이에 표징으로
언약한 안식일과 함께 할례도
하나님과 인간사이에 언약이라 말씀하셨다. (겔 20;12,20, 출 31;13,17).
성소의 평면도의 축면에서 생각해 보면
안식일은 지성소,
할례는 번제단이다.
이 사실을 입증하게 위해서는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전이라는 말씀에서 힌트를 얻는다.
성전의 평면도는 성소의 입구에서 시작하여
서쪽의 울타리 끝을 말한다.
사람의 평면도는 발꼬락 끝에서 시작하여
팔을 들어 올린 손가락 끝까지를 말한다.
나는 어느 날 바닥에 엎드려 누었다.
두 팔을 머리 위로 뻗고
발가락 끝으로부터 손가락 끝 부분까지
기지개를 하듯 누었다.
그리고는 그 길이를 자로 제어 보았다.
정확히 7피트였다.
그리고 그 길이의 절반을 잘라
3.5피트 크기의 정 사각 두 개을 만들어 보았다.
그리고 두 개의 정 사각에
각각 두 개의 중심점을 찾아보았다.
이 두 개의 중심점은
인간 몸 구성의 중대한 역할을 하는 부분이다.
나는 다시 한 번
정 사각 두 개 위에 가지런히 엎드려 누었다.
이 두개의 정 사각을 나란히 놓은
한 개의 장방형 사각은
나의 몸 길이로 만든 나의 몸의 청사진이다.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두 개의 정 사각 속에
두개의 두 중심점에 맞닿는 나의 신체부분은
놀랍게도 대뇌와 생식기였다.
한 개의 정 사각의 중심점에는
나의 대뇌가 있고,
다른 정 사각의 중심점에는
나의 생식기가 가지런히 맞닿고 있었다.
얼마나 중대한 기관인가?
이 두 개의 기능이 마비 혹은 능력이 상실 될 때
이는 죽음을 뜻한다.
인간 삶의 목적과 보람은 이 두 기능에 있다.
그러므로 삶의 목적은 두 개의 중심점에 의해 주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개의 쟁점에 대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의 언약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소는 삼중 구조로 되어있다.
뜰, 성소, 지성소이다.
뜰에는 번제단이 있고
성소를 거쳐 지성소에 이르면 법궤가 있다.
중간에 있는 성소의 첫째 칸은
법궤에 이르는 통로이다.
사람으로 친다면 오장 육부이다.
첫째 칸 성소에는 떡상이 있고
7 촛대가 있고 향단이 있다.
향단은 떡상과 7 촛대에서 발생된 사연을 흠향하여
지성소로 내 보낸다.
향단의 직접적인 상징은 기도인데
향을 피우면 향의 연기가 성소를 채우고
커튼을 타고 지성소의 공간을 채운다.
결국 성소와 지성소는
향단의 연기로 성소를 들어온 죄가
어떤 죄인지를 파악하고서야
어린양의 피로 죄를 흔적을 씻어낸다.
십계명은 죄인을 사형대에 올려놓는 역할을 하지만
십계명을 법궤안에 가두어 놓고
정금으로 된 뚜껑으로 법궤를 덮고
궤안에서는 생명으로 끔틀거리는
아론의 삯낸 지팡이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의 죄을 없에고
새생명을 부여할 것을 상징한다.
시은소에서 흘러나오는 쉐키나의 광체는
향단의 연기를 감지하는 센서의 역할을 한다.
만일 시은소가 이 역할을 하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은 지성소에 임재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몸 구성도 성소와 같은 역할을 한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모시는 지성소이다.”
이 거룩한 사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영물이기에 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인간 성전 사상을 주지시키면서
우리의 몸으로 하나님께 산제사를 드리라고 명하신다.
우리의 마음은 바로 성전이기 때문이다.
결국 번제단에서 새로 태어나는 것과 똑 같은 원리로
할례는 번제단과 십자가를 상징하며
할례를 통해 잉태된 신생아는
엄마의 배 속의 과정을 통해
새 생명으로 탄생된다.
인류가 십자가를 통하지 않고는
결코 새 생명을 얻지 못한다.
이 확호한 구속의 진리는 할례를 통해서 입증된다.
성기를 통하지 않고는
새 생명이 태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연인가? 섭리인가?
우연에 돌리기에는 너무나 심오한 성소의 메시지가
나의 심장 중심부를 강타한다.
번제단은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거기서 죽은 동물의 피는 제단 바닥에 뿌렸으며
그리고 그 몸은 제단 위에서 불로 태워졌다.
그곳은 죽음의 장소로서
성소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이 번제단을 통과하지 않고는
성막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번제단처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모든 죄인들을 차단한다.
성소의 번제단은
죄지은 한 인간의 생명이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다.
죄 지은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라는 법칙은
죄를 속하기 위해 양을 잡아야 한다는
대속의 원리를 만들었다.
바로 이 행위적 봉사가 번제단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번제단의 봉사는
새로운 생명을 뜻하며
번제단에서 태어나 시은소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자라나 비로소
“인간”이라는 새로 성숙된 하나님을 닮은
인간의 모습이 지성소에서 탄생된다.
할례와 번제단과의 목적의 동일성은
십자가에서만 찾을 수 있다.
할례 행위는
남자(man)의 생식기의 표피를 잘라내는
물리적 봉사 의식이다.
이로서 하나님의 택한 백성인 이스라엘과
이방과를 구별 짓는다.
이방인과 구별 짓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그 의미는 명백하다.
할례는 구속의 경륜이다. 반면에
이방인은 구속주가 없다.
번제단에서 양이 피를 흘려야 되었던 것처럼
할례는 돌을 쳐서 이 성기에 피를 흘려야 했다.
이 행사는
하나님께로 나아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된다.
이것이 곧 할례이다.
무엇보다도 할례는 언약의 공동체에 가입하는 행위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들에게 내린 명령은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에
언약의 표징이니라.”였다(창 17:11).
안식일이 너와 나 사이에 표칭인것처럼
할례의 의미는
하나님과 나 사이의 표징이다.
바울은 아브라함의 할례를
그의 의를 인친 것이라고 말했고(롬 4:11).
히브리인들이 언약의 아들임을 가리키는데 기여했다.
오늘날 유대교에서 할례식을 가리키는데
신명기 30:6의 하단 절에
할례는 곧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예식은 그리스도의 피를 상징하며
따라서 예수님은 생명의 시여자 이심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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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서경덕님의 댓글
서경덕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예수님의 단순한 설교와 박식한 강장로의 신학적(?) 표현을 비교하는 것이 좋을 듯
그리스도께서는 백성들의 형편을 따라서 진리를 전하셨다. 가장 유력하고 단순한 말씀으로 사람들의 마음에 진리를 소개하셨으므로, 아무리 가난하고 무식한 자라도 주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가장 고상한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었다. 누구든지 한 사람이라도 주의 말씀의 뜻을 알지 못하여 학자들에게 가서 물어 볼 필요가 없었다. 주님께서는 결코 깨닫기 어려운 추론(推論)이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어려운 말씀을 하여 무식한 백성들을 괴롭게 한 일이 없으셨다. 세상이 일찌기 알지 못하였던 가장 크신 교사의 교훈은 가장 명확하고 단순하며 또한 실제적이었다. 복음 49
예수께서는 그들의 곤고함을 익히 아시는 분으로서 사람들을 그들의 처지에서 만나셨다. 예수께서는 진리를 가장 직접적이고도 단순한 방법으로 제시하심으로써 그 진리를 아름답게 하셨다. 그의 언어는 깨끗하고 세련되어 있었으며 흐르는 물처럼 맑았다. 람비들의 단조로운 어조의 말을 들어왔던 자들에게 예수의 음성은 마치 음악과같이 들렸다. 그러나 그의 가르침은 단순했지만 그는 권세 있는 자와같이 말씀하셨다. 이 특징이 예수의 가르침을 모든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과 대조가 되게 하였다. 랍비들은 마치 성경의 말씀들이 한 가지 사물이나 혹은 그와는 꼭 반대의 사물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의심과 주저함으로 말하였다. 듣는 자들은 날마다 더욱 큰 불확실 가운데 쌓이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경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권위의 책으로 가르치셨다. 그가 제시하시는 문제가 어떤 것이든지간에 그의 말씀을 전혀 논박할 수가 없는 그런 권세로 그 문제가 제시되었다. 1소망 253
예수님 초림 당시와 이 시대를 한번쯤은 비교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어두움이 땅을 덮었고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웠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율례는 신속하게 생명없는 죽은 문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간간이 하나님의 작은 음성들이 들렸는데 이는 가장 경건한 성도들에 의해서 였습니다. -- 제사장들의 길고 복잡한 설명은 가장 분명하고 단순한 것들을 불분명하고 불완전하고 신비롭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경쟁관계에 있는 교파들간에 논쟁의 소리는 이해력을 어둡게 하였고 그들의 가르침을 진리의 올바른 논리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습니다. 리뷰 1895. 8. 6
예수님의 초림 당시의 형편을 나타낸 말씀이나 어쩌면 우리가 사는 현 시대를 그대로 그려 놓은 듯 합니다. 예수님의 설교는 참으로 단순하여 노인이건 어린아이든, 여자나, 남자나, 지식인이든 무식한 사람이든 잘 이해할 수 있는 알아들을 수 있는 이해하기 쉬운 말씀이 였습니다. 그 예를 들면
공중 나는 새를 보라!
들에 백합화를 보라! 하나님이 돌보시느니라.
내 하나님이 네 하나님이니라.
내 아버지가 네 아버지니라
이렇게 단순한 설명을 못 알아들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어린아이들로부터 노인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잘 알아들을 수 있는 극히 평범한 말씀으로 하늘의 대진리의 보화를 열어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주위에는 많은 관중들이 늘 따라 다녔습니다.
연설을 잘하는 사람이란, 유식한 말로 문자를 써서 유식한 사람만 알아듣는 그런 말이 아니고,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무식한 자나 유식한 자나 모두 골고루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하는 말을 들은 바 있습니다.
설교와 강의는 다른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강의(講義)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학문이나 기술의 일정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설명하여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강의는 설정된 주제에 대하여(about) 자신이 알고 있는 바를 대상들에게 알려주는 행위입니다. 사실 강의실에서는 주어진 시간에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을 들려주는 것 이상의 책임이 없습니다. 다시 말하면 강의는 절대진리가 아닙니다. 강의하는 사람의 지식과 판단과 경험을 들려줄 뿐입니다. 자신의 주장에 필요한 자료들을 소개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합리화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설교(說敎)는 그 성격과 내용이 강의와는 근본적으로 달리합니다. 설교는 인간의 말을 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절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시간입니다. 백성들에게 필수적으로 먹여야 할 영의 양식을 공급해 주는 시간입니다. 이 영의 양식인 성경 말씀을 선포함에 있어서 그 회중들이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없는 경우 그 말씀의 뜻을 해석해 주고 그들의 생활 현장에 손쉽게 적용해줍니다. 설교자는 강의하는 사람과는 달리 선포된 말씀을 회중들이 잘 먹고 소화 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책임까지 갖게 됩니다. 말씀을 들은 성도들은 영적활력이 넘쳐나도록 되어야 합니다. 말씀은 선포되었으나 백성들에게 활력이 없다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강의는 말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지만 설교는 말씀의 주인이신 성삼위 하나님이 주체가 되고 설교자는 그 운반자에 불과하다는 점이 구분되는 부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