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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그리스도의 죽음과 율법(토막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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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그리스도의 죽음과 율법(토막이야기)

 

거울을 보고 얼굴에 티를 발견하는 것은

의학적으로 진단 학에 속한다.

진단 학이란 병의 원인을 분석하고 찾아내는 역할이다.

외과적인 방법이나 내과적 방법으로

초현대적 기능이 뛰어난다 해도

진단서가 없으면 치료에 착수하지 못한다.

만일 건강한 사람에게 치료행위를 한다면

생체실험과 같은 범죄행위에 속한다.

거울은 거울 속에 비친

티를 발견해주는 역할뿐이다.

결코 티를 빼내고 완치시켜주지는 못한다.

만일 이 티가 피부암일 경우 결과는 치명적이다.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거울은 말한다.

 

<너는 이제 죽었다>

 

만일 이 피부암이

율법의 10가지 조건 중 한 죄라고 가정한다면

거울은 죄와 사망의 법이 될 것이다.

피부암을 진단해주고 보여주는 역할을 했다고 할지라도

거울이 사람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다.

거울은 법조인이 되어 계시의 역할을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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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은 율법의 시니피앙이다.

거울이라고 하는 유리조각이

율법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할지라도

거울로 부터의 의미 생성을 위해 붙여진 기호이다.

기호는 곧 언어이므로 언어를 탐구할 때는

본능적 언어와 구성적 언어 두 가지를 전재해야한다.

즉 세미오틱과 쌩볼릭이다.

세미오틱은 우주 내의 일체의 사물들이 창조되기 전

그 원재료가 되는 생성(genesis)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세미오틱은 생성의 자궁이자 유모로 표현된다.

세미오틱은 공간성과 시간성에도 선행하면서

모든 의미의 존재론적인 원천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플라톤은 우주와 그 속의 모든 사물들의 생성,

즉 코스모스의 탄생의 원천으로 여긴 세미오틱을

인간 활동의 주체적인 내부로 끌고 들어와

일체의 의미들의 탄생하는 원천으로 본다.

세미오틱은 무질서한 카오스가 아니다.

세미오틱도 나름대로의 통제에 의거해서 구성되는데,

아무런 규제도 없는 것은 시니피앙스의 양태가 아니다.

세미오틱을 시니피앙스의 원천으로 본다는 것은,

나름대로의 규제를 따른다는 것을 뜻한다.

세미오틱을 바탕으로 쌩볼릭의 차원을 벗어나

그 아래의 심층으로 내려가 시니피앙스과 역추 할 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규제도 없고

말 그대로 혼돈의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여기에서 ‘어머니의 몸’을 살펴봐야 한다.

구강 충동과 항문 충동은

둘 다 어머니의 몸과 관련하여 감독되고 구조화되면서,

감각 운동적인 조직 구성을 지배한다.

어머니의 몸이 사회관계를 조직하는 쌩볼릭이고,

하나님의 원천적인 세미오틱과 가장 닮은 꼴이

바로 어머니 상이기 때문이다.

구강 충동과 항문 충동은 성기 충동과는 달리 분류된다. 이 충동들은 쌩볼릭한 기능들을 통해서

세미오틱의 기능들을 드러낸다.

감각적이고 운동적인 흐름이란 신음과 비명과 같은

구강과 항문의 괄약근들의 운동을 말하는 것이다.

모성애는 남편과 자녀들을 돌보는 세미오틱이라고 본다면

법칙 기능은 쌩볼릭한 사회역사적인 통제 방식이

복속되고 억제되는 것이다.

그때 세미오틱과 쌩볼릭을 중재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어머니의 몸이다.

세미오틱으로서의 기능적 어머니의 몸이 번제단이라면

어머니의 몸은 이중적인 역할을 한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통로이자,

쌩볼릭으로 올라오는 통로인 셈이다.

어머니의 몸으로서의 구속의 경륜,

쌩볼릭은 구속의 경륜이 문자화되어

위로 올라가는 통로가 된다.

세미오틱의 영역에서 쌩볼릭으로 올라 올 때

어떤 일이 벌어질까?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전치(déplacement)와 압축(condensation)이 될 것이고, 수사학적으로 말하면

은유(métaphore)와 환유(métonymie)가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쌩볼릭이란

결국 세미오틱의 변형으로 볼 수밖에 없는 셈인데,

쌩볼릭은 자신의 타자인 세미오틱으로부터

정련되어 나온 것으로 봐야 하고,

따라서 쌩볼릭에는 언제든지

세미오틱이 그 심층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 변증법 내에서 이해 과정의 첫 계기에 불과하고,

그 과정 자체는 시니피앙’을 생산해 내는

그 과정의 반복에 따라서 움직인다.

명제 속에서 주체가 몸이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몸이 있어야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죄를 지은 몸은 반듯이 죽어야 된다는 법 앞에

죽엄을 대치하는 세미오틱의 사명 때문에

그 몸을 어머니의 몸으로 은유한 것이다.

라캉이 말하는 ‘실재’와 엇비슷한,

혹은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살’과 엇비슷한,

혹은 들뢰즈가 말하는 ‘기관들 없는 몸’과

엇비슷한 쪽으로 몰고 간다면,

자아와 그것에 의거한 의미 작용이 성립된다면

시니피앙의 주체를 정립하는 거울(miroir)이다.

어머니를 마주한 의존 상태에서 분리시키고,

팔루스적인 기능으로써의 쌩볼릭한 기능?

이는 중대한 귀결을 낳는 결정적인 계기이다.

왜냐하면 쌩볼릭한 것에서

자신의 희열(jouissance)을 성기적인 것으로 국소화 하고, 세미오틱한 운동성을 쌩볼릭한 질서 속에 이전시킨다.

 

 

너, 어머니와 자꾸 연애질하면 성기를 잘라버린다.’라고 하는 아버지의 협박이 곧 쌩볼릭의 상징이며 율법의 요구이다.

 

 

일단 쌩볼릭한 질서 속에 편입되고 나면

시니피앙은 쌩볼릭한 질서 쪽으로 뿌리를 뻗는다.

이로서 구속의 경륜이 율법의 요구에 의해

세미오틱과 쌩볼릭의 논리와 연결되고 있다.

만일 팔루스적 기능때문에

아예 쌩볼릭을 파괴해버린다고

세미오틱이 제대로 드러나겠는가?

구속의 경륜이 율법을 아예 파괴해 버린다면

쌩볼릭의 기능없이 세미오틱 자체로

생존이 가능하다는 말과 같은 것이므로

구속의 경륜도 무용지물이 될것이다.

구속의 경륜은 하나님의 품성인 사랑으로 귀결된다.

결국 세미오틱과 쌩볼릭은 하늘로 향하는

등거리의 철로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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