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과 거룩한 지혜(교사들을위한강해와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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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4과 거룩한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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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4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46분
기억절 :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잠 8:22).
도입)
하나님은 창조 전부터 지혜를 창조의 동역자로 세우셨습니다. 22절에서"조화의 시작"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그의 길의 시작"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조화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계획하신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에는 잠언서 저자가 주어로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서는 지혜가 주어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잠언서 저자는 지혜를 의인화하여 살아있는 인격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혜는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부터 나를 가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2). 화잇부인은 부조와 선지자 34p에서 이렇게 이 글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잠 8:22-30)다. 아버지께서는 하늘의 모든 존재자를 창조하심에 있어서 그분의 아들을 통하여 일하셨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골 1:16)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 그분의 어전(御前)에서 흘러나오는 빛으로 빛나고 그분의 뜻을 실행하기 위하여 신속한 날개로 빨리 날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아들은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히 1:3) 모든 천사들 위에 최상권을 가지신다. 원시부터 높이 계신 영화로우신 보좌는 당신의 성소(聖所)가 있는 곳이며(렘 17:12 참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히 1:8). “존귀와 위엄이 그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 성소에 있도다”, “인자함과 진실함이 주를 앞서 행하나이다”(시 96:6, 89:14). 부조와 선지자 34p
연구 범위 : 잠 8:1~21, 마 16:26, 잠 8:22~31, 창 1:31, 잠 8:32~36, 잠 9:1~18.
잠언의 무대에 지혜가 재등장한다(잠 1:20~21). 이번 주 교과의 본문은 지혜가 곧 진리임을 명확히 하는데 그것은 모든 진리의 기원이자 근본이신 하나님 안에 존재한다.
진리의 ‘절대적인’ 특성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일부 현대적인 사고와 대조된다. 특별히 서방 세계에서 한 사람이 생각하는 진리는 다른 사람과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진리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이며 문화적인 요소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런 개념은 성경적이지 않다. 나의 진리는 그대의 진리와 동일해야 한다. 왜냐하면 진리는 보편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리는 모두가 그것을 알든지 모르든지 일부가 아닌 모든 인류에게 속한 것이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고 물었던 빌라도의 유명한 질문은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절)고 하셨던 예수님의 진술에 대한 반응에서 비롯되었다.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래서 진리가 말하는 바를 듣고 순종할 것인지 아닌지는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이다.
*신자들과 반생들이 서로 공부하도록 권합시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잠언 8장에서 거룩한 지혜이자 공동 창조주 그리고 타락 이전의 중보자로 묘사된 그리스도의 실체를 파악한다.
➋ 느끼기 : 창조의 사역에 나타난 신성의 따뜻함과 친밀성, 기쁨을 느낀다.
➌ 행하기 : 공동 창조주이셨던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받아들인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너무 중요한 정보라서 가족에게 빨리 전달해야 했던 경험이 있으면 이야기해 봅시다.
❷ 왜 하늘의 지혜 또는 성경의 진리는 모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❸ 잠언이 말하는 지혜가 창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우리는 진정한 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과의 관계에 얼마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까?
B. ❶ 무엇을 할 때 또는 누구와 함께 있을 때 그대는 가장 큰 행복감을 느낍니까?
❷ 창조 주간에 주님 또는 ‘지혜’가 느꼈던 기쁨은 어떤 것이었다고 생각합니까?
❸ 우리가 지혜를 얻을 때 누리는 행복이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❹ 그대는 지혜를 따름으로 삶에 어떤 진전과 발전이 있기를 바랍니까?
결론 : 잠언 8장은 창조 시에 친밀하고 즐거운 교제를 나누셨던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 그리고 신과 피조물 사이를 중보하기 위해 내려온 거룩한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계시합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나의 영적 성장 보고서’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영적 성장’을 강조합니다.
❷ 우리 안교반(소그룹)이 안식일 오후에 어떤 활동을 함께 할 수 있을지 의견을 나눕니다.
❸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함께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1월 18일 지혜가 부른다
“지혜가 부르지 아니하느냐 명철이 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느냐…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 8:1, 12, 17).
교사강해 1)
구약은 하나님의 ‘말씀과 지혜‘를 하나로 봅니다. 왜냐하면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요, 지혜도 예수 그리스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말씀은 곧 지혜, 다른 말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계획’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유대 신학은 ‘말씀과 지혜’를 실체화해서 인격화한 표현을 많이 썼습니다. 아래에서 교과의 설명에서 지혜가 발하는 음성을 묘사하기 위한 단어들로서 ‘입’, ‘입술’, ‘말’의 은유적인 표현을 보면 유대 신학과 유대 문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dabar/logos)은 남성 명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표현을 하고 지혜(hokma/sophia)는 여성 명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딸‘이라고 표현을 합니다. 그래서 잠언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가 하나님의 어좌 앞에서 하나님의 딸로서 재롱을 떠는 모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은 귀로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보고 만질 수 있으며 그 자체가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지혜하면 일상 뒤따라오는 게 바늘과 실 같은 관계인 명철입니다. 명철과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지혜와 명철은 사촌간입니다. “마음이 지혜로운 자는 명철하다 일컬음을 받”(잠16:21)는 이치와 같습니다. 즉 지혜 있는 자는 명철한 사람입니다. 명철은 지혜가 만들기 때문입니다.
잠 8:1~2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에 따르면 지혜의 가치는 무엇인가?
지혜는 너무도 중요하기 때문에 모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의 삶을 창조하셨고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를 위해 죽으셨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그분이 제공하시는 구원 그리고 지혜도 모든 인류를 위한 것이다.
지혜가 발하는 음성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들을 보라. ‘부르다’, ‘소리를 높이다’, ‘입술을 열다’, ‘입’, ‘입술’, ‘말’. 이 은유적인 표현들을 어떻게 이해하든지 분명한 것은 지혜는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혜는 그것을 듣고자 하는 모든 자에게 들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지난주에 보았듯이 지혜가 말하는 바는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혜는 여덟 번이나 그 말의 정직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흥미롭게도 지혜에 대한 잠언의 묘사는 신 32:4에서 그리는 여호와의 모습과 비슷하다. 이런 유사성이 놀랍지 않은 것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모든 진리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요 1:1~3 참고).
잠 8:10~11을 읽어 보라. 이 성경절은 지혜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과거의 수많은 사람이 무지와 어리석음과 어둠 속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게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아무런 희망 없이 또는 헛된 희망을 가지고 산다. 이런 슬픈 현실에 비하면 성경이 제시하는 진리와 지혜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그것은 더욱 나은 이생에 대한 소망과 약속 그리고 예수님의 희생 덕분에 새 하늘과 새 땅에서 누리게 될 영생의 확신으로 가득하다. 세상의 부귀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비하면 헛될 뿐이다(전 2:11~13 참고).
교훈 :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그분을 아는 지식에 이르기를 원하고 이 세상의 불행과 고통에서 벗어나 영생을 소유할 수 있는 지혜를 얻기를 바라신다.
(부가적용)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만이 지혜의 사랑을 받게 되고, 지혜를 간절히 찾는 자가 지혜를 찾게 될 것입니다. 지혜를 사랑하고 구하는 자는 지혜를 얻을 것이며, 지혜를 찾는 자는 지혜를 찾게 되고, 지혜의 문을 두드리는 자에게는 지혜의 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목마른 사슴이 물을 찾고, 상인이 값진 보석을 찾듯이 지혜를 찾고 구하는 사람은 지혜를 얻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혜를 간절히 찾고 구하는 자에게 지혜의 성령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지혜를 찾고 구한 사람은 지혜를 통해서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 안에 "부귀와 장구한 재물과 의"가 있다고 말합니다(18). 여기에 언급된 "부귀"는 물질적인 풍요를 말하고, "장구한 재물"은 "영원한 재물", 즉 그 기반이 튼튼해서 대대로 물려줄 수 있는 재물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과 재물은 허망한 가치를 가질 뿐입니다. 하늘의 것과 비교할 때, 그것은 모두 썩어 없어질 것들일 뿐입니다.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2-3).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는 그리스도, 곧 참된 지혜를 소유하는 것은 모든 부귀와 재물, 하늘을 영생으로 얻게 해줍니다. 지혜자는 의로운 부귀와 의로운 재물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러한 부귀와 재물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혜자는 부귀와 영원한 재물, 그리고 의를 동시에 겸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지혜의 가치는 무한합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하늘의 지혜를 통해 그대가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금이나 은 그리고 진주보다 지혜와 지식을 얻으라고 충고합니다. 그것은 얄팍한 기술이나 잔꾀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원칙적인 삶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원칙을 저버리고 눈앞의 이익을 얻도록 부추깁니다. 그렇게 눈앞의 것을 쫒다가 우리는 어느새 사망의 길을 걷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마 16:26).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정말 지혜가 필요한 이유는 생명 때문입니다.
| 적용 |
그대는 지금 어떤 문제에서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하늘의 지혜를 선택해야 합니까?
영감의 교훈
지혜 얻기를 힘쓰라 - “구주께서는 그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고 분부하셨다. 단지 물질적인 유익만을 구하지 말라. 금생을 위하여 준비하는 것을 첫째의 노력으로 삼지 말고 영적 양식, 곧 영생하도록 있는 그 지혜 얻기를 힘쓰라. 하나님의 아들만이 이것을 주실 수 있으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 치신 자’이기 때문이다”(시대의 소망, 384).
기도
아버지, 너무도 어리석어 무엇이 득이 되고 실이 되는지 헤아리지 못하는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오직 우리의 구원과 행복을 바라시며 긴 안목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아버지의 음성에 순종하는 마음이 우리의 지혜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1월 19일 지혜와 창조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잠 8:22).
교사강해 2)
위의 도입부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잠언서 저자는 지혜를 의인화하여 살아있는 인격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지혜는 그리스도와 동일시되고 있습니다. 지혜는 "하나님께서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부터 나를 가지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2). 하나님은 창조 전부터 지혜를 창조의 동역자로 세우셨습니다. 22절에서"조화의 시작"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그의 길의 시작"이라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조화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창조 사역을 계획하신 때를 말하고 있습니다. 22절에서 "나를 가지셨다"고 번역된 말(카나니)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그 동안 많은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이 말은 원래 "소유한다"는 말 외에도 "바로 세운다", 또는 "조성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역 성경은 "카나니"를 "가지셨다(소유하셨다)"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그 동안 이곳에 언급된 지혜는 성자 예수님의 상징으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아리우스라는 사람은 "카나니"라는 말을 "나를 창조하셨다"고 번역하고, 이 구절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성자 예수님을 창조하셨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며, 하나님의 지음을 받은 피조물에 불과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의 주장은 교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카나니"는 "바로 세운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이 말을 이렇게 해석하면, 22절은 태초에 성부께서 성자 예수님을 창조의 동역자로 세우(임명)셨다고 언급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잠 8:22~31을 읽어 보라. 지혜는 창조와 어떤 관련이 있는가?
이 말씀에서 지혜는 창조주 하나님과 기이하게 연관된다. 잠언 8장에 등장하는 이 시는 창세기 1~2장의 기사와 여러 낱말을 공유하며 심지어 세 가지 기본 요소인 하늘과 물, 땅을 중심으로 짜인 문학적 구조마저 유사하다. 이런 평행의 목적은 지혜의 근본적인 적격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해 지혜를 사용하셨고 지혜가 세상의 기초를 이룰 만큼 세상보다 오래된 도구라면 우리는 삶의 모든 면에서 마땅히 지혜를 사용해야 한다.
또한 잠언 8장은 지혜의 신적 기원을 강조한다. 이 시의 첫 낱말 ‘야훼’는 지혜를 ‘낳는다’(둘째 낱말). ‘가지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가나(ganah)’는 ‘창조하다’보다는 ‘낳다’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신 32:6, 창 4:1 참고). 그 다음 말은 창세기의 창조 기사와 관계있는 기술적인 용어 ‘레쉬트(reshit)’로서 창 1:1(“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처음 등장한다.
하지만 잠 8:22의 ‘태초’는 창세기 1장의 ‘태초’와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창 1:1에서 그 말은 창조 자체와 관련이 있지만 잠 8:22에서 그 말은 하나님 자신 또는 그분의 본성을 의미하는 그분의 ‘길(데레크)’과 관련이 있다.
따라서 지혜는 세상의 창조 이전에 이미 시간 속에 존재하고 있었다. 하나님만 계셨던 시대에 지혜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지혜의 기원이 영원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의미이다. 결국 지혜는 우리 안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계시되는 것이며, 우리가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르침을 받아야 할 어떤 것으로서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자신의 빛 가운데 행하면 필히 어둠 속에서 걸어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각 사람에게 비추는” “참빛”이 있다고 말씀하셨다(요 1:9). 모든 사람에게 그것이 필요하다.
교훈 : 지혜는 이 세상의 창조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지혜를 스스로 배우거나 깨달을 수 없고 오직 ‘참빛’되신 예수님 안에서 지혜를 경험할 수 있다.
부가적용)
지혜는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23). 여기에서 "만세 전부터"라는 말( 메올람)은 시간이 존재하기 전을, "상고부터"라는 말(메로쉬)은 천지창조 직전을, 그리고 "땅이 생기기 전부터"라는 말(미카드메 아레츠)은 창조 사역이 시작되었지만, 아직 땅이 온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했을 때를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잠언서 저자는 지혜가 창조 이전과, 창조 때, 그리고 그 후부터 계속해서 존재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후에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강조하는 구절로 간주되었습니다. 또 "내가 세움을 입었다"는 말(니사크티)은 원래 '붓는다'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 말에서 후에 "기름부음"이란 뜻이 파생되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혜를 창조 사역의 주관자로 임명하셨으며, 이 직분을 위임하기 위해서 기름을 부어 거룩하게 성별하셨습니다. 지혜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으며, 창조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구절은 후에 성자께서 신적인 존재로서 창조 사역에 참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구절로 간주되었습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어디에서 지혜를 찾고자 노력합니까?
현대인에게 지혜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종의 정신적 능력을 의미합니다. 쏟아져 나오는 자기계발서들은 지혜를 찾으려는 사람들의 이러한 욕구를 반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근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창 1:1)셨고 “태초에 말씀이 계”(요 1:1)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지혜의 발현도 태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잠 8:22~31). 따라서 창조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지 않고서는 참된 지혜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 적용 |
근원과 연결되어 얻어지는 지혜를 통해 그대는 무엇을 경험하기를 기대합니까?
영감의 교훈
주님에게만 눈을 고정하고 전진하라 -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의 빛이요 생명이신 주님에게만 저들의 눈을 고정시키고 계속 전진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빛이요 진리라고 말씀한 모든 것을 빛과 진리로 아는 것은 거룩한 지혜로 말미암아 받는 감화로 말미암는 것이며 사탄의 교활한 술책을 모방하는 데서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지혜의 빛은 모든 참되고 확고하며 통회하는 영혼에게 길을 비취는 등불이 될 것이다”(가려 뽑은 기별 2권, 17).
기도
말씀의 능력으로 세상을 만드시고 무궁한 사랑과 희생으로 인간을 죄에서 구하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합니다. 제 생각과 마음을 하나님께 연결시키기를 원합니다. 창조주의 신비한 지혜안에서 저 또한 기뻐하게 하옵소서.
셋째날(화) 1월 20일 창조 세계 안에서 기뻐함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잠 8:30).
교사강해 3)
첨단 물리학(Higher Energy Physics)에서는 물질의 궁극에 대하여 계속 도전하고 있지만 물질 내부의 엄격한 질서와 조화만 알게 될 뿐 물질의 근원에 대한 이렇다 할만한 해답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편 구약성경 잠언(8:22-26)에는 “22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26 하나님이 아직 땅도 들도 세상 진토의 근원도 짓지 아니하셨을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잠언8장에는 여호와께서 태초에 일하시기 전, 즉 창조하시기 전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26절에 진토(Primeval dust)의 근원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데 만물의 시작이 되는 근원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의 히브리서(11:3)에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에게 보이는 물질은 볼 수 없는 것으로부터 지어졌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이지 않는 조화로 온 세상이 지어졌다는 말씀입니다. 때문에 물질을 연구하고 그 내부를 탐구할 때에 물질 속에 있는 신비한 조화와 질서의 법칙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로마서 1:20). 하나님의 역사가 심지어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결론지었습니다 (Kugel). 그렇게 믿었던 한 가지 이유는 성경이 창세기 이외에 다른 곳에서도 창조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매 창조의 단계가 반복구로 끝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4, 10, 12, 18, 21, 25, 31). 그리고 마지막 단계는 “심히 좋았더라”(31절)는 말로 마친다. ‘좋다’는 뜻의 히브리어는 기쁨의 의미를 내포하며 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창조 주간의 끝에 하나님은 그가 만드신 창조물과 온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내시기 위해 휴식하셨다(창 2:1~3). 휴식의 시간인 안식일은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 잠언 8장도 창조 세계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지혜’에 대한 노래로 끝난다.
잠 8:30~31을 읽어 보라. ‘지혜’가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지혜의 기쁨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기쁨을 반사한다. 이 기쁨은 매일의 창조 과정마다 나타났을 뿐 아니라 창조가 완성되었을 때에 창조 사역의 대미를 장식하였다.
우리는 잠언 8장에서 ‘지혜’가 기뻐했던 이유를 발견한다.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31절). 창조 주간의 마지막 날이었던 안식일에 하나님은 인간과의 관계를 정립하셨다. 이러한 하나님의 휴식과 기쁨은 사람이 한 주일의 노동을 마치고 누리게 될 안식일의 의미에 적용되었다. “창조주의 모본을 따라 사람도 자신이 마친 일을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함으로 돌아볼 수 있다. 이런 방식으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뿐 아니라 피조물들을 다스리도록 자신에게 부여된 통치권(착취가 아닌)에 대해서도 기뻐할 수 있다.”- Gerhard F. Hasel, in Kenneth A Strand, The Sabbath in Scripture and
History (Review and Herald Publishing Association, 1982), p. 23.
교훈 :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세계에 대해 기뻐하셨으며 안식일에 그 기쁨은 사람과의 관계를 통해 절정에 달했다.
부가적용)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의 완전함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람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 우리 또한 주님의 기쁨이었고 즐거움이었습니다. 스바냐 선지자는 이 사실을 일찍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주님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로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3:17) 본래 안식일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안식과 기쁨 속에 참여하고, 죽음과 사망이 없는 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요 구별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이유도 안식일은 사망과 죽음의 공포가 없는 곳에서만 누릴 수 있는 완전한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이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땅, 곧 사망과 질병의 공포가 가득한 곳에서는 참된 안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신(마 11:28) 예수님의 초청 속에서는 참된 안식을 가질 수 없는 인생을 향한 그리스도의 초청인 것입니다. 우리가 본질적으로 가질 수 있었던 참된 이 안식은 창조의 시작,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실 때에 에덴과 하늘에서 이미 완전한 안식, 완전한 기쁨이 존재하였습니다. 사실 안식일의 본질적인 의미는 노동을 마치고 수고하여 누리게 될 안식의 필요가 일차적인 이유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에덴에서의 아담과 하와는 많은 노동을 한다할지라도 쉬어야 할 만큼 피곤이나 쉼이 필요한 그런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저들의 체력은 왕성하였고 피곤을 모를 만큼 에덴의 음식은 완전하였습니다. 다만 저들이 안식일을 누렸던 가장 일차적인 이유는 하나님께서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곧 썩지 아니하는 존재, 죽음의 공포가 없는 존재들만이 누릴 수 있었던 축복을 공유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 자들만이 가지는 안식의 축제였던 것입니다. 이 안식이 깨지게 된 것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고서 하나님의 존전에서 쫓겨나는 때에 깨어지게 되었습니다만 이전까지는 빛의 옷을 입고, 하나님의 영광과 같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기 전까지는 안식일로 인해 누릴 수 있었던 완전한 기쁨이 있었고 그 기쁨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더욱 찬란하게 나타나 있었습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기쁨과 창조주의 기쁨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습니까?
‘지혜’는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잠 8:31)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누리는 행복과 평화를 기뻐하셨고 그들과 누리는 교제를 즐거워하셨습니다. 죄로 인해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서도 그분은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고 여전히 인간의 구원과 행복과 안녕을 바라십니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과의 교제를 통해서 창조 때에 가졌던 그분의 기쁨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 적용 |
그대가 창조주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방법은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영감의 교훈
기쁨으로 세상에 주어진 안식일 - “새벽별들이 함께 노래하고, 하나님의 모든 아들들이 기쁨으로 부르짖을 때, 안식일이 세상에 주어져서 인류는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에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언제나 기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분께서는 제칠일에 안식하시고, 그 날을 그분의 안식의 날로 축복하시고, 그분께서 창조하신 사람들에게 그 날을 주셔서 그분을 참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으로 기억할 수 있게 하셨다”(교회증언 8권, 197).
기도
우리의 행복과 구원을 누구보다 바라시는 하늘 아버지, 그 동안 허망한 기쁨을 추구했던 저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이제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 세계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구원과 각양 선물에 감사하며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넷째날(수) 1월 21일 지혜의 호소
“누구든지 내게 들으며 날마다 내 문 곁에서 기다리며 문설주 옆에서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잠 8:34).
교사강해 4)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에서 기다리며 머무는 것은 복이 있는 삶입니다. 인간은 지혜의 근본이신 그리스도와의 교제 속에서만 참된 은총과 축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에만 인간에게는 참된 행복과 참된 기쁨과 참된 생명이 나타나게 됩니다. 성경은 변화가 우리의 개인의 몫이 아니라 주님과 연결되어 있을 때 일어나는 축복임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들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만나는 자리에 있을 때 인간은 참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잠언 8장의 남은 절들은 개인적인 주제로 돌아가 지혜를 얻는다는 것의 실제적인 의미에 대하여 논한다. 물론 창세전에 있었던 지혜의 선재성에 관한 지식은 매우 심오하다. 그러나 성경의 진리는 어느 시점에서는 꼭 인간의 차원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배운 지식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말한다.
잠 8:32~36을 읽어 보라. 여기서 말하는 삶과 죽음의 기별은 무엇인가?
‘복이 있다(또는 복된)’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행복하다’는 의미이다. 여기서 ‘복이 있다’라는 표현은 두 가지 명제에 결부되어 있다. 첫째는 행위를 설명한다. “내 도를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32절). 시 119:1~2에서 율법과 관련하여 같은 단어가 사용된다.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여호와의 증거를 지키(는)…자는 복이 있도다”
둘째는 태도를 설명한다. “내게 들으며…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나니”(34절). 두 경우 모두 지속적인 노력을 요구한다. 옳은 길을 발견한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것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날마다 “기다리며” 우리가 아는 것을 따라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눅 11:28).
“신체와 도덕에 관한 율법을 어기고 불순종하는 길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이 과연 바람직한 행복인가? 그리스도의 생애는 참된 행복의 근원과 그것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들이 정말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그들에게 위임된 사역을 충실하게 이행하며, 완전한 모본에 그들의 심령과 삶을 순응시키면서 의무의 문설주에서 기다리기를 기꺼이 바라야 할 것이다”(Ellen G. White, My Life Today, 162).
교훈 : 만약 진정으로 복된 인생을 살고자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날마다 그것에 주의하며 기꺼이 그 명령에 따라야 한다.
부가적용)
여러분은 사랑하는 애인을 기다리기 위하여 밤이 늦도록 그 집 앞을 서성이고 밤을 뜬 눈으로 세워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우리의 삶 속에서 그 분을 만나기 위한 사모함과 기다림은 없으십니까? 기다림이 없는 신앙, 그것이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어쩌면 매일 우리 주님은 우리를 위해 구걸하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주님 앞에 머무르며 주님을 기다리며 사모하며 나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사람들입니까? 그분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 분을 사모하기에 그 분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며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만약 하나님의 기막힌 사랑을 알고 있다면 그를 사모하며 그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이루어놓으신 그 엄청난 사랑을 아주 충분하고 넉넉하게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고 이 세상을 더 사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이 세상을 배설물처럼 생각했던 사도바울과 같이 우리는 변화하지 못하고 이 세상에 아직 미련이 남아있지는 않습니까? 미련이 남아있는 것을 끊으려 한다면 끊어지지 않습니다. 미련이 남아 있다는 것은 여전히 하고 싶고, 끊기 싫다는 증거입니다. 억지로 만들어낸 변화는 진정한 변화가 아닙니다. 그런 변화는 금방 제자리로 돌아옵니다. 진정한 변화는 미련도 남지 않습니다. 자연스럽습니다. 변화하기 싫은 데 의무감으로 변화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하기 싫어지고, 자연스럽게 더 좋은 것을 선택합니다. 사도바울은 세상에 것이 자신에게 배설물로 여겨진 것은 더 가치 있는 발견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붙어 있으면 발견하게 되고, 발견하면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가 진정한 행복을 바란다면 지금 무엇에 집중해야 할까요?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행복이다.’ 이 말은 꼭 철학자가 아닐지라도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품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막연하게 행복을 꿈꾸며 살아갈 뿐 실제로는 행복보다 불행에 더 익숙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행복의 영역에서 이탈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통치 아래 있을 때만 진정으로 행복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이 조건에서 벗어나기로 선택했을 때부터 인간은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그러한 행복에 도달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을 바란다면 우리는 인간의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 적용 |
그대가 추구하는 행복의 노선을 어떻게 수정해야 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우리의 생명이요 행복 - “현세적, 영적 번영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의 여부에 달려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지 아니하므로, 하나님의 율법을 부지런히 청종하고 그것을 그들의 가족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축복을 익히 알지 못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행복이다”(새 자녀 지도법, 80).
기도
아버지, 참된 행복을 모른 채 엉뚱한 노력을 기울이는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죄로 인해 볼 수 없었던 하나님의 세계를 향해 눈을 뜨게 해 주시옵소서. 십자가를 통해 열린 생명의 길에서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다섯째날(목) 1월 22일 이것이냐 저것이냐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잠 9:6).
교사강해 5)
지혜가 잔치를 마련하고 지혜 없는 자들을 간절한 애정으로 초청하는 모습입니다. '일곱 기둥'은 당시 축제를 위해 현관과 첫 번째 홀 사이에 행랑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기둥입니다. '혼합한 포도주'는 포도주에 몰약을 섞어 도수를 높인 것을 말합니다. '식물'(히.라하미)은 문자적으로 빵을 가리키나 성경에서는 자주 모든 음식물에 대한 일반적인 명칭으로 사용됩니다. 지혜가 잔치의 장소와 음식을 다 갖추어 놓고 여종을 시켜 지혜 없는 자들을 초청하는 것입니다. 잔치에 참여하여 먹고 마시므로 생명을 얻고 명철의 길을 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에 죽으므로 세운 하나님 나라에 주의 종들을 통해 복음 초청을 하는 것을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베푼 구속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알게 해 주기 위해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표적을 보이셨습니다 (요2:1-10).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5,000명을 먹이신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것은 자신이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서 자신을 믿는 자는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될 것을 계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먹고 마시는 자가 되기를 권고 했습니다 (요6:55-57).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는 우리 안에 우리는 그 안에 상호 내주하도록 해야 하며 그로 인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잔치에 계속 참여하는 생활입니다. 세상 적이고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사고 때문에 잔치 초청을 거절해서는 안됩니다 (마22:1-10).
지혜의 호소에 따라 영감 받은 잠언의 기자는 9장에서 그의 청중에게 지혜와 어리석음 사이에서 하나의 삶의 방식을 선택하도록 촉구한다. 잠언 9장은 처음 여섯 절과 마지막 여섯 절이 대칭을 이루며 각각 대조적인 진영을 설명한다.
잠 9:1~6과 9:13~18을 비교해 보라. 지혜와 어리석음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1. 지혜는 효율적이며 창조와 관련이 있다. 지혜의 사역을 설명하기 위해 일곱 개의 동사가 사용되었다(1~3절). 지혜가 다듬은 일곱 기둥(1절)은 창조의 칠 일을 암시한다. 반면 어리석음은 앉아서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것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가장하지만 사실 “어리석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13절)한다.
2. 비록 지혜와 어리석음은 동일한 청중에게 호소할지라도(4절과 16절이 같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그들이 제공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혜는 자신이 준비한 떡을 먹고 음료를 마시라고 손님들을 초대한다(5절). 그러나 어리석음은 먹고 마실 것을 아무것도 제공하지 않고 도둑질한 것만 자랑할 뿐이다(17절).
3. 지혜는 우리에게 어리석음을 버리라고 호소한다. 어리석음은 훨씬 관용적이다. 그것은 무엇을 버리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죽음이다. 지혜를 따르는 자들은 전진할 것이다. 그들은 “명철의 길”로 행할 것이다(6절). 그러나 어리석음을 따르는 자들은 제자리에 고정될 것이며 아무것도 알지 못할 것이다(18절).
잠 9:7~9을 읽어 보라. 지혜로운 사람과 악한 자는 지혜의 교훈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지혜로운 사람이 악한 자보다 더욱 지혜롭게 될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인가?
교훈 : 지혜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고 호소한다. 지혜를 따르는 자는 명철의 길로 전진하지만 어리석은 자는 아무 발전 없이 죽음으로 나아간다.
부가적용)
사람들은 지혜의 길을 떠나서 정욕과 쾌락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창조주 하나님을 떠나서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혜는 이러한 사람들에게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의 길로 나아오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또한 지혜는 어리석은 자들에게 명철의 길로 행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언급된 "명철의 길"은 지혜가 인도하는 진리의 길을 말합니다. 지혜는 사람들에게 어리석음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혜의 권고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지혜안에서 생명을 얻고, 참된 분별력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지혜의 비결은 겸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열린 마음으로 가르침을 받으며 교훈에 반응하는 사람이다. 지혜는 어린이와 같이 성장할 필요성을 느끼는 자에게만 이른다. 이것이 예수께서 가장 진솔한 어법으로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하신 이유이다.
| 적용 |
그대는 자신에게 있는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을 어떻게 변화시키기 원합니까?
영감의 교훈
겸손과 지혜와 용기와 믿음을 구하라 - “구하라. 그리고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 겸손과 지혜와 용기와 믿음이 더하기를 구하라. 신실한 모든 기도에는 응답이 있다. 응답이 비록 바라는 때에 꼭 바라는 대로 오지는 않을지라도, 그 필요는 경우에 따라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가장 적당한 시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고독한 때와 피로한 때에, 또는 시험당하는 때에 드리는 기도가 항상 그대의 기대하는 바대로 응답되지는 않을지라도 항상 그대의 유익을 위해 응답된
다”(복음교역자, 258).
기도
아버지, 제게 어리석음에 머무르려는 부패한 본성이 있습니다. 창조적이며 진취적인 지혜로 제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시옵소서. 어리석음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매일 배우고 전진하는 겸손한 자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여섯째날(금) 1월 23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주의 통치자는 당신의 은혜로우신 사업을 홀로 행하지 않으셨다. 그분에게는 모든 존재들에게 행복을 주시려는 그분의 목적을 이해하고 당신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역자 곧 동료 한 분이 계셨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요 1:1~2)다. 말씀이시요,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리스도는 본성과 품성과 목적에 있어서 영원하신 아버지와 하나이셨으며 하나님의 모든 협의와 의도(意圖)에 참여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은 당신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하신다.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내가 세움을 받았나니…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잠 8:22~30)다”(부조와 선지자, 34).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 대한 믿음이 성경적인 지혜의 근원이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진화론 사상이 모든 면에서 성경과 대립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➋ 참된 지혜는 우리가 스스로 생성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계시로 주어져야 한다는 개념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영감이 아니었다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중요한 진리에 대해 말해 보십시오. 예를 들어 계시가 없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대해 그리고 그것이 우리에게 베푸는 은혜에 대해 알 수 있었겠습니까? 제칠일 안식일과 재림은 어떻습니까?
➌ 창세기 1장에 나타난 것처럼 하나님의 일은 선이 악과 섞일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하고 있습니까? 예를 들면 진화론적 세계관을 창세기의 창조 기사와 결합시킬 수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그대는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➍ 하나님이 창조 세계를 기뻐하셨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어떤 방법으로 안식일을 더 깊고 풍성하게 경험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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