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삶과 죽음의 문제(교사들을위한 강해와 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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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3과 삶과 죽음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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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17일 안식일
일몰:오후 5시 39분
기억절 :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잠 6:23).
도입)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잠언 기자는 명령과 법을 사용하여 등불과 빛에 비유하였습니다. 명령은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는 모든 특별한 명령들을 가리키며 마땅히 해야 할 명령들과 하지 말아야 할 금지들을 말합니다. 법은 하나님의 율례를 총칭하는 것이고 훈계는 영혼을 훈련시켜 성숙한 성품을 도덕적으로 승화시키는 책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명령과 법은 마치 등불과 법의 관계처럼 전자는 특수한 것이요, 후자는 일반적인 것입니다. “명령”과 “법”은 다 같이 양심을 비춰주며 생명의 길을 걷게 합니다. 시 119:105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 이다. 라고 했습니다. 즉 그것들이 믿음과 생명의 참된 길을 보여주리란 것입니다. “명령”과 “법”은 어떤 특수한 교훈이 아닌 하나님의 전 계시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대저 명령은 왜 등불일까요? 분명히 이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등불은 우리에게 갈 길은 보여줘서 미지의 세계, 학자에게 믿음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고, 진리의 말씀을 따라가게 해 주는 나침반의 역할이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종교는 빛의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빛이 우리에게 새로움을 부여 해 주듯 빛의 사명은 우리의 행실을 올바른 곳으로 인도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어두운 곳이라 할지라도 빛을 비추면 환해지고 우리가 순종하는 빛 가운데 깨닫고 목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빛은 창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숨긴 것을 드러나게 합니다.
연구 범위 : 마 5:21~30, 잠 6:21, 7:3, 잠 6:23, 7:2, 잠 6:24, 잠 6:30~31, 잠 7:26~27.
엄마는 두 형제를 집에 두고 외출하면서 방금 구운 케이크를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형제의 다짐을 받기 위해 말을 안 들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으름장까지 놓았다.
그러나 엄마가 집을 나선 지 몇 분이 지나지 않아 형제는 케이크를 먹어치우기로 결심했다. “죽고 사는 문제도 아닌데 설마 엄마가 우리를 죽이기야 하겠어. 맛있게 먹자고!”
그러나 잠언 속의 스승이 다루는 문제는 정말 삶과 죽음에 관한 문제이다. 그의 어조는 강경하고 때로는 직설적이다. 물론 예수님도 영원한 생명과 죽음의 문제에 관해서는 상당히 강한 언어를 사용하셨다(마 5:21~30).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궁극적이고 영원한 운명이 현재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따라서 우리는 잠언에 나타난 강한 어조의 긴박성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적용 질문에 꼭 자신의 생각이나 결심을 적고 실천하십시오.
안교 활동반과 교과 토의
※ 학습 목표
➊ 깨닫기 :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것이 궁극적인 생존에 필요함을 깨닫는다.
➋ 느끼기 :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알려주시는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한다.
➌ 행하기 : 영감의 기록에 나타난 하나님의 명령을 수용하고 더욱 그분의 뜻을 알기를 갈망한다.
Part 1. 인사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 리더
서로 인사를 나누고 손님을 환영해 줍니다.
출석과 공부를 확인하고 안교헌금을 걷습니다.
결석자와 구도자에 대한 보고를 듣고 방문 계획을 세웁니다.
Part 2. 나눔 안교 교사 또는 소그룹 리더(A나 B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A. ❶ 각자가 항상 소지하고 있는 물건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❷ 잠언에서 율법을 항상 목과 손가락에 매라는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❸ 율법을 생명의 등불로 여기는 인생은 어떤 모습일까요?
❹ 우리가 율법의 원칙을 삶 속 깊이 받아들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B. ❶ 겉과 달리 내용물이 매우 실망스러웠던 물건을 구입한 경험이 있습니까?
❷ 온갖 죄를 저지르는 죄인보다 은밀한 죄 하나를 품고 있는 신앙인이 더 위험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❸ 죄에 빠진 사람을 도수장에 끌려가는 소나 그물에 걸린 새 또는 음녀에게 사로잡힌 남자로 비유하는 말씀에서 우리가 배워야 하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❹ 치명적인 죄의 유혹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각자 어떤 영적인 결심이 필요할까요?
결론 :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그분의 삶의 원칙들을 애정을 다해 가르치십니다.
Part 3. 실천 안교 반장 또는 소그룹(예비) 리더
❶ 구도자 명단에 적힌 사람과 기도 제목에 대하여 반원들에게 소개합니다.
❷ 2월에 친교를 위한 활동을 계획합니다(2월 14일 또는 15일 예정).
❸ 구도자를 위해 그리고 안교반(소그룹)의 연합을 위해 기도합니다.
첫째날(일) 1월 11일 우리의 삶 속에 존재하는 법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이것을 네 손가락에 매며 이것을 네 마음판에 새기라”(잠 6:21, 7:3).
교사강해 1)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새겨야 합니까? 머리입니까? 마음입니까? 마음입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에 새기지 않고 마음에 새기라 하십니까? 신구약 성경 어디에도 머리에 새기라는 구절이 없고 마음에 새기라고 말씀합니다.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증거한 모든 말을 너희 마음에 두고 너희 자녀에게 명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신32:46). ”그것을 항상 네 마음에 새기며 네 목에 매라“(잠6:21). 왜 하나님은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고 하셨습니까? 말씀을 머리(IQ)로 만 알지 말고 마음(EQ)으로 깨닫는 즉, 과거 모세가 시내산에서 말씀을 받았을 때의 감동을 현재처럼 체험하며 읽으라는 뜻입니다. 잠언에서 “목에 매라”는 것은 마음에 새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즉 네가 마음을 다해 섬기고 있는 하나님을 외적으로도 알 수 있게 표식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을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의 마음이 다른 곳으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그 말씀들이 마음의 자세를 결정할 때 힘을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사용하시기 좋은 상태로 마음이 연단될 때 상황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로 우리를 이끄시기 전까지는 참 경건의 뿌리이며 신앙의 내용인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드러나는 자발적인 복종, 그러한 순전한 복종은 결코 생기지 않습니다.
잠 6:21과 7:3을 읽어 보라. 어떻게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해야 할지에 관하여 이 본문에서 사용하는 신체 용어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앞선 과에서 보았듯이 잠언에서 마음은 감정과 사고의 자리이다. 율법을 우리 마음에 매라는 스승의 말은(잠 6:21) 항상 율법과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라는 의미이다. 우리가 율법과의 관계를 느슨하게 해도 되는 순간은 없다. 왜냐하면 율법은 죄가 무엇인지 규정하기 때문이다(잠 7:7). 심지어 스승은 하나님이 십계명을 돌판에 기록하셨던 것처럼(출 24:12) 율법이 마음판에 기록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잠 7:3).
율법을 마음에 새기라는 말은 율법이 단지 우리에게 부과된 외적인 규범이 아니라는 뜻이다. 율법은 우리의 동기와 은밀한 목적을 관통해서 내적 자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이는 바울이 약속했던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 곧 “영광의 소망”(골 1:27)이 우리의 삶에 실현되어야 한다는 다른 방식의 표현이다.
율법을 목에 매라는 말씀은 율법을 가까이 두라는 뜻이다. 고대의 백성들은 귀중품을 목에 둘러매곤 했다. 목은 호흡과 생명이 가능하도록 허파까지 이어진 공기의 이동 경로로서 ‘생명’을 뜻하는 히브리어 ‘네페쉬(영혼)’가 ‘목’과 ‘호흡’을 의미하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연상시킨다.
율법을 손가락에 매라는 말씀은 율법을 행위의 영역으로 가져가라는 뜻이다. 스승은 가장 복잡하고 정교한 행위들을 암시하기 위해 손가락을 강조한다. 율법은 어떤 큰 결정뿐 아니라 작은 결정에까지 영향을 미쳐야 한다(눅 16:10 참고).
교훈 : 우리는 귀중품을 목과 손가락에 매는 것처럼 율법을 삶의 중요한 원칙으로 마음에 새기고 우리의 생활과 행동 속에서 그 의미를 간직해야 한다.
부가적용)
신앙인들에게 지혜의 말씀을 마음 판에 새기는 것 보다 더 중요한 신앙 승리의 방편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시편 기자도 범죄 하지 않고자 주의 말씀을 마음속에 두었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말씀을 마음속에 두고 늘 그 말씀을 묵상하며 그 말씀을 따라 살수가 있겠습니까? 성경 암송이 그 대답이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성경 암송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 판에 지워지지 않도록 새기게 되면 우리들의 생각이나 우리가 배우는 모든 지식 그리고 우리들이 행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늘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으로 우리들의 앞에 두고 비추어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눈동자처럼, 손가락에 매며, 마음판에 새겨서 간직하게 되면 여러 모습의 죄악들이 이 세상의 여러 모습의 음녀(淫女)로서 나타나서 여러 가지 고운 말로 혹하게 하고 미혹하고 유혹하여 사망의 방으로 끌고 가는 것을 막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21,25,27) 늘 우리들의 일상생활이나 환경에서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는 음녀의 미혹이나 유혹을 우리들 자신의 지식 혹은 능력, 그리고 우리들의 의지나 힘으로서 물리칠 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하면 결코 백전백패(百戰百敗)할 수밖에 없음을 확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모든 생각, 행동, 그리고 보는 것과 들리는 것 모든 것들에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를 지킬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무기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율법은 그대의 삶 속에 얼마나 가깝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습니까?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성경에서 사용된 이런 신체 용어들은 상징적인 의미가 강하다. 그러나 전통적인 유대교와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에서는 이 표현들이 문자적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로 유대인들이 이마와 손가락에 매는 ‘테필린’, 기독교인들이 목에 거는 십자가, 무슬림(또는 기독교인들)이 손가락에 두르는 묵주가 있다.
| 적용 |
그대가 율법의 원칙을 잊지 않기 위해서 매일 실천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마음에 새겨진 율법 - “돌판에 새겨진 같은 율법이 성령에 의하여 마음판에 기록된다. 자신의 의로움을 세우려 하는 대신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 마음에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는 생애를 살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의 임재로써 우리는 그분께서 행하신 대로 행할 수 있다”(부조와 선지자, 372).
기도
아버지, 율법의 소중한 원칙을 까마득히 잊고 살아가는 우리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오직 말씀과 기도만이 아버지의 뜻을 마음에 담고 살아가는 방법임을 깨닫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먼저 기도와 말씀을 붙잡는 제가 되게 해 주시옵소서.
둘째날(월) 1월 12일 빛과 생명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잠 6:23, 잠 7:2).
교사강해 2)
우리들의 몸에서 가장 예민하고 늘 가장 깨끗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부위가 바로 눈동자일 것입니다. 눈동자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외부의 접촉에서 늘 눈을 깜박이며 보호하고 있으며, 아무리 적은 티라도 들어가게 되면 이를 견디기 힘들어 눈물을 흘리거나 눈을 깜박거려서 자정(自淨)을 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의 잘못된 가르침이나 철학, 혹은 종교, TV, 컴퓨터, 우리를 미혹하는 것 등이 우리를 미혹하거나, 더러운 죄악들이 우리의 마음을 더럽히게 될 때에 오직 유일하게 끊임없이 자정하고 우리를 보호하는 능력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들의 손가락에 매게 되면 우리들이 하는 모든 행동이나 몸가짐에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나게 되고 기억하게 됨으로 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우리들이 많은 이 세상의 유혹들을 물리칠 수가 있게 될 것입니다(:5). 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지키게 하시려고 하십니까? 우리의 매일의 삶을 스스로 바라볼 때 우리가 얼마나 쉽게 하나님을 잊고 세상의 유혹에 무너지는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잠 6:23을 읽어 보라. 어떻게 율법이 ‘빛’과 관련이 있는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 또는 율법은 빛으로 비유되어 왔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 히브리식 사고방식에서 ‘율법’의 개념과 ‘빛’의 개념은 서로 관련이 깊다. 등불이 우리가 갈 길을 비춰주는 것처럼 율법은 우리가 경로를 지킬 수 있게 해 준다. 간혹 변명과 개인적인 편의가 율법을 무시하도록 우리를 유혹하지만 율법은 우리가 도덕적인 결정을 내려야 할 때에 무엇이 옳은 결정인지 깨닫게 한다.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는 그럴듯한 핑계거리가 있었지만 그것을 따르기로 결심했던 성경의 인물들은 누구인가? 어떤 경우에 믿음을 지키기로 한 그들의 결심이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잘못된 것처럼 보였는가?
잠 6:23과 함께 7:2을 읽어 보라. 율법은 왜 생명과 관련이 있는가?
타락 이후에 우리는 율법에서 영생의 희망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나 율법과 그것이 제시하는 원칙들에 대한 순종은 여전히 삶과 신앙의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한다(마 19:17, 계 14:12). 우리는 하나님이 수천 년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8:4)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분께 순종한다. 하나님의 법은 생명과 관련이 있다. 이유는 단순하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시기 때문이다. 이 원리는 진정한 신앙을 제시한다. 즉 우리는 영생을 위하여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듯이 현재의 삶을 위해서도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신뢰한다.
교훈 : 우리는 율법을 우리 삶의 길을 밝혀주는 빛과 등불로 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소망해야 한다.
부가적용)
눈꺼풀이 닫히는 것을 각막반사라고 하는데 반사작용은 사람이 의식하기 전에 순간적이면서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신체현상입니다. 우리 눈에 아주 적은 티나 먼지가 들어가도 눈물이 나와 밀어내며 이를 빼내기 위해 손이 움직입니다. 사람의 눈이 얼마나 귀하면 하나님이 이렇게 섭리하셨겠습니까? 만일 나에게 죄가 들어오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조그만 티끌이 눈에 들어와도 눈물이 밀어내며 용납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선한 양심으로 죄를 밀어내고 받아들이지 말아야 함을 말씀합니다. 죗된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미 내 안에 존재하고 있는 죄를 빼내는 작업이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보호하며 지켜야 합니다. 7장 4절에 “지혜에게 너는 내 누이라 하며 명철에게 너는 내 친족이라 하라”고 하였습니다. 남자에게 누이는 여동생이나 누나를 말합니다. 참으로 가까우면서도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있어 지혜란 사랑스럽고 향기로우며 배우고자 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누이에 비유한 것은 끊어질 수가 없는 것으로 끈끈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것을 나타냅니다. 지혜는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며 삶을 윤택하고 부유하게 만듭니다. 사랑스럽고 향기로우면서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지혜가 있었기에 정확한 판결을 해 줄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면 명철이 왜 친족이라고 한 것일까요? 친족은 가까우면서도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가족이나 친족은 사랑을 함께 나누며 울타리가 되어줄 뿐 아니라 자손 대대로 이어져 가는 공동체입니다. 영적으로 명철은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친족과 같은 것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하나님의 율법과 신앙의 원칙은 그대의 진로와 인생에 얼마나 중요한 기준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은 종종 세상의 자녀들에게는 없는 고민에 빠집니다. ‘성공’과 ‘신앙’이 각각 다른 길을 제시할 때입니다. 그런데 ‘성공’은 ‘신앙’을 포기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단지 잠깐 양보하라고 할 뿐입니다. 이 잠깐의 양보가 크게 보이지 않는 순간 우리의 길을 비춰주는 율법의 빛은 약해지고 우리는 생명의 길에서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일시적이고 사소한 일일지라도 신앙의 원칙을 양보하도록 요구하는 결정을 단호하게 거절해야 합니다.
| 적용 |
그대가 종종 타협하게 되는 신앙 원칙을 앞으로 어떻게 지키기로 결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하나님의 빛과 생명 - “의는 거룩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요한일서 4장 16절)시다. 의는 하나님의 율법과 일치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우’(시편 119편 172절)며,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로마서 13장 10절)기 때문이다. 의는 사랑이며, 사랑은 하나님의 빛과 생명이다. 하나님의 의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을 받아들임으로써 의를 얻게 된다”(산상보훈, 18).
기도
아버지의 법이 제 마음속에 밝은 등불처럼 빛나기를 원합니다. 그 빛과 그 불을 끄려는 어떤 유혹도 용인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열린 생명의 길을 끝까지 걸을 수 있도록 그 등불이 더욱 밝게 빛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셋째날(화) 1월 13일 유혹과의 싸움
“이것이 너를 지켜 악한 여인에게, 이방 여인의 혀로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하리라”(잠 6:24).
교사강해 3)
부모의 명령은 하나님의 법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곧 하나님의 법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떠나지 않고, 항상 마음에 새기며 목에 매고 다니면 하나님의 법이 인도하고, 잘 때에 보호하고, 깰 때에 말하기 때문에 음녀의 호리는 말에 빠지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은 비단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항상 의식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에 음행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게 됩니다. <악한 여인>, <이방여인>이란 무엇으로 보나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이성을 뜻합니다. 그럼에도 단지 겉모습만의 아름다움에 빠져 물불을 안 가리고 덤비는 일이 없도록 미리 잘 단속하라는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젊은이들이 이성문제로 시험에 들어 모진 상처를 입고 고뇌하고 있습니다.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26절)한다고 합니다. 당신의 자녀가 잘못된 이성에 빠져 생명을 사냥당하는 비극이 없도록 어려서부터 관심과 애정으로 돌보며 위해서 기도하십시오. 아비의 명령과 어미의 법이 이성에 관한 바른 이해와 안목을 넓히도록 보다 적극적으로 지도하십시오.
앞서 보았듯이 잠 6:23의 기자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 빛과 생명을 하나님의 율법에 직결시킨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빛과 생명의 법이 어떻게 우리에게 강력한 영적 보호를 제공하는지 확실한 실례를 보여준다.
잠 6:24은 우리에게 무엇을 경고하고 있는가? 이 말씀은 명백한 것 이외에 어떤 미세한 경고를 포함하는가?
신앙인이 시험을 받을 때 가장 큰 유혹거리는 그 죄악을 정당화시킬 신앙적 이유를 찾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용하여 잘못된 행위를 합리화시키는 것은 끔찍한 신성모독의 형태일 뿐 아니라 엄청난 기만이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신다.”고 말하면 그대는 뭐라고 답하겠는가? 이런 일은 간음의 상황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사람이 내가 함께해야 할 사람임을 보여주셨다.” 만약 이것이 그들의 믿음이라면 누가 무엇으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보여주신 것을 단념시킬 수 있겠는가?
사람을 유혹하는 것은 유혹자의 신체적인 아름다움만이 아니다. 그는 비위를 맞추는 말로 상대를 함정으로 유인한다. 남녀들이 간사하고 매혹적인 말, 심지어 신앙적인 언어로 장식된 말을 듣고 타협하는 상황에 이를 때가 얼마나 많은가? 잠언의 기자는 이런 속임수에 대해 경고하고 싶은 것이다.
율법은 이렇게 “혀로 호리는 말”에 대한 최고의 해독제이다. 오직 율법의 명령과 순종의 의무만이 우리로 하여금 너무도 진실 되고 아름답게 들리는 유혹의 언어에 저항할 수 있도록 돕는다. 유혹자는 그대의 용모뿐 아니라 지혜와 현명함을 보고 자신의 영적 필요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이없고 위험천만하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죄를 정당화시키려 할 것이다.
교훈 : 우리가 신체적인 유혹뿐 아니라 죄를 합리화하기 위해 신앙의 언어로 위장된 유혹들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율법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해야 한다.
부가적용)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생활과 영적 생활이 별개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간음하는 자는 씻을 수 없는 ‘상함’, ‘능욕’, ‘부끄러움’을 당하게 됩니다. 쾌락은 순간적이지만 그에 대한 대가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큽니다. 도적질은 7배의 배상으로 해결할 수 있지만 간음은 어떤 보상이나 선물을 줄지라도 해결될 수 없고 분노와 복수만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간음은 도적질보다도 더 큰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간음은 혀로 호리는 말, 상대방의 아름다움과 눈꺼풀, 자신의 육체적 주림 때문에 저지릅니다. 간음은 우리에게 한 조각 떡만 남기고 귀한 생명을 사냥합니다. 이는 옷을 불태우고 숯불에 발을 데게 하고 자기 영혼을 망치는 짓입니다. 간음은 상함과 능욕을 받게 하고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만듭니다. 간음을 저지르면 상대방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상처와 원한을 남기고 자신은 용서 받지 못할 분노의 대상이 되어버립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미움이 됩니다. 주님이 싫어하시는 이 모든 것을 하지 않을 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비의 명령과 어미의 법, 곧 주님의 명령을 떠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을 항상 마음에 새기고 목에 매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이 우리를 인도하고 보호하며 우리 삶의 길동무가 됩니다. 주님의 명령은 등불이요 빛이요 생명길입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그대는 무엇으로부터 유혹을 이길 힘을 얻습니까?
유혹과 씨름하는 사람들은 관심의 방향을 다른 데로 돌림으로 일시적인 효과를 거둡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 방면에서도 유혹과 시험이 찾아옵니다. 결국 방향과 내용만 달라질 뿐 우리는 죄의 세상으로부터 끝없이 공격을 받습니다. 자기수양을 통해 그런 유혹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기도 하지만 타락한 본성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서 기쁨을 얻고 예수님의 사랑으로 충만한 신앙생활을 할 때에 비로소 모든 종류의 유혹에 저항하며 건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적용 |
그대가 종종 유혹에 빠지면서도 합리화시키는 죄는 무엇입니까? 그런 유혹을 견딜 만큼 그대에게 강한 동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영적 생활 또는 활동은 무엇일까요?
영감의 교훈
유혹에 쉽게 빠지는 이유 - “우리 청년들과 성인들이 왜 그토록 유혹과 죄에 쉽게 빠져드는가?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연구하고 명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면 내실이 튼튼해진다. 다시 말해 악을 행하려는 사탄의 유혹에 저항할 영적 능력이 생길 것이다”(청년에게 보내는 기별, 425).
기도
아버지, 제가 여전히 죄의 유혹에 빠지는 것은 아직도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임을 고백합니다. 성령님, 고통이 있을지라도 이 마음을 도려내고 오직 하늘만 바라보기를 원하오니 도와주시옵소서.
넷째날(수) 1월 14일 도둑질하지 말라
“도둑이 만일 주릴 때에 배를 채우려고 도둑질하면 사람이 그를 멸시하지는 아니하려니와 들키면 칠 배를 갚아야 하리니 심지어 자기 집에 있는 것을 다 내주게 되리라”(잠 6:30~31).
교사강해 4)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도적질한 자는 7배, 5배, 4배, 2배의 배상을 해야 하고(출22:1,4,9), 만약 이를 이행하지 못할 경우는 노예로 팔려가야 했습니다(레25:39). 부모의 자녀 교육의 주제 가운데서도 이 부분이야말로 그 어느 시대보다 이 시대에 가장 강조되어야 옳을 듯 합니다. 도둑질이란 결국 물질관, 청지기 의식, 부에 대한 바른 가치관의 결여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따라서 정당하게 근로하여 벌고, 또 수중의 모든 재화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하나님의 소유의 부이며, 나는 단지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바르게 집행해야하는 청지기일 뿐이라는 사실을 부단히 가르치고 의식화해야 합니다. 이런 바른 물질관이 정립되지 않는 한 누구도 도둑질을 피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잠언의 기자는 간음에 대해 경고한 뒤에(잠 6:24~29) 도둑질에 대해 말한다(30~31절). 간음과 도둑질에 대한 두 계명의 관계는 어떻게 한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 다른 계명에 대한 순종에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준다. 하나님의 법을 취사선택하는 타협의 태도는 완전히 율법을 어기는 생활보다 더 위험할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악덕의 요새는 버림받은 죄인이나 비열한 부랑자의 사악한 생활에 있는 것이 아니고, 표면으로는 덕이 있고 존경할 만하고 고상하게 보이지만 생애 가운데 한 가지 죄를 품고 한 가지 악덕에 빠져 있는 사람의 생활이다.… 인생과 진리와 명예에 대한 높은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 중 하나를 고의로 범하는 자는 자기가 받은 고상한 은사들을 죄를 범하게 하는 유혹거리가 되게 한다”(교육, 150).
잠 6:30~31을 읽어 보라. 이 말씀은 궁핍한 사람이 저지른 죄에 대해 어떻게 말하는가?
가난과 궁핍이 도둑질을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도둑질은 그가 주릴지라도 죄가 된다(30절). 물론 굶주린 도둑은 멸시를 받지는 않겠지만 그가 훔친 것의 일곱 배를 갚아야 한다. 이는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도 죄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면 성경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채워줄 의무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그들이 생존을 위해 절도로 내몰리지 않는다(신 15:7~8).
흥미롭게도 주제가 간음에서 절도로 갔다가 다시 간음으로 돌아온다(잠 6:32~35). 두 죄악은 정말 비슷한 점이 많다. 둘 다 다른 사람에게 속한 어떤 것을 불법적으로 취한다.
교훈 : 우리는 어떤 불리한 상황에서도 절도를 정당화해서는 안 되며, 특히 성적 가해는 다른 것으로 보상할 수 없는 심각한 죄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가적용)
먹을 것이 없어 도적질했다면 얼마나 사정이 딱하겠습니까? 하지만 아무리 불쌍한 처지라도 들키면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됩니다. 배가 고파 도적질한 것은 동정을 받을 여지가 있어 멸시를 당하지는 않으나 그래도 죄에 대한 벌을 받습니다. 하물며 통간한 경우에 얼마나 큰 형벌을 받아야 할지를 비교하여 말씀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와 악은 변명이 필요 없이 다 버려야 합니다. 영적으로 7은 완전수입니다. 따라서 칠 배를 갚아야 한다는 것은 상대가 요구하는 대로 다 갚아줘야 할 것을 의미합니다. 죄를 지으면 자기 영혼까지 망하게 될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구분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죄에서 떠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 아직 악의 모양이 있어도 구원은 받을 수 있습니다. 믿기 때문에 스스로 노력하는 믿음의 행진을 할 수 있는 것이며 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제자리에 머물러 있거나 거꾸로 퇴보하는 사람은 구원받기 어렵습니다. 성경은 덥지도 차지도 않은 미지근한 사람은 버림받게 된다고 말씀합니다(계 3:15). 데살로니가전서 5:19에 성령을 소멸치 말라고 했습니다. 성령을 받았을지라도 말씀대로 행하지 않으면 소멸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소멸되면 자동적으로 생명책에서 이름이 지워집니다(출 32:33, 계 3:5). 부부가 타인과 간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죄를 지은 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그 죄를 따지자고 한다면 상함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상함 받는다는 것은 들켰을 때의 과정을 말해줍니다. 들키지 않았어도 죄를 짓고 있기에 그에 따른 어려움과 고통을 겪습니다. 들킬 경우엔 상함과 능욕을 받고 또한 부끄러움을 씻을 수 없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회개하고 돌이켜 이제는 죄 없다고 인정해주실 때에는 모든 것이 회복되겠지만 세상에서는 부끄러움과 수치와 죄로 남습니다.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_
자신에게 ‘작은’ 도둑질의 문제가 없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하지만 절도와 간음의 중대한 차이점은 절도죄가 단지 사물의 손실에 관한 것인 반면 간음죄는 훨씬 중대한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훔친 물건은 보상할 수 있다. 그러나 간음의 경우에는, 특히 어린이가 관련되어 있을 경우에는 그 피해가 절도보다 훨씬 심각할 수 있다.
| 적용 |
그대에게 문제가 되는 “한 가지” 죄를 하나님께 고백해 보십시오.
영감의 교훈
간음하지 말라 - “이 계명은 음란한 행위를 금할 뿐 아니라, 육욕적인 생각과 욕망은 물론 그것들을 자극하는 경향이 있는 어떠한 행위도 금하고 있다. 외부에 나타나는 생활에서뿐 아니라 마음의 은밀한 의도와 감정에까지도 순결이 요구되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의 원대한 의무를 가르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악한 생각이나 눈길도 불법한 행위와 마찬가지로 죄가 된다고 선언하셨다”(부조와 선지자, 308).
기도
아버지, 이 ‘한 가지’ 죄악을 버릴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이 하나의 죄가 제 마음의 둑을 모두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막아 주시옵소서. 순결한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게 하시며 아버지 앞에서 흠 없는 자녀로 설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시옵소서.
다섯째날(목) 1월 15일 죽음의 위협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잠 7:22).
교사강해 5)
성경의 지혜를 대표적으로 알려주는 잠언에는 한 어리석은 젊은이가 음란한 여자에게 유혹을 받아 방탕에 빠지는 생생한 비유를 들어 음란의 위험에 대한 경고를 늦추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평안한 삶과 행복한 가정을 잃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버려짐을 당하며 생명과 영혼을 빼앗기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음란이 주는 파괴력은 다른 것에 비해 엄청나게 큽니다. 왜 그럴까요? 연쇄살인범으로 투옥되어 처형을 기다리는 범죄자의 인터뷰에서 실마리를 찾아보면 그는 청소년시절부터 포르노를 광적으로 탐닉했는데, 포르노에 중독이 되면서 어떤 사악한 실체가 자신에게 들어와 지배하는 것을 느낀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이는 개인적인 느낌에 불과하지만 일반적인 사탄의 수법을 보면 그리 이상한 현상도 아닙니다. 사탄이 사람을 공격하는 무기 중에서 가장 즐겨 사용하는 것이 음란입니다. 세속적인 사람들이 즐겨 내뱉는 말투는 대개 사탄의 전략과 유사합니다. 하나님도 없고 심판도 없습니다. 이 세상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입니다. 먹고 마시며 쾌락을 즐길 수 있다면 마다하지 말아야한다. 죽으면 모든 게 끝이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최고로 즐기며 사는 사람만이 잘사는 사람이 되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도 교회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그들에게 유일한 기쁜 소식은 최고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것들뿐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을 누가 넣어 주었을까요? 성경은 이들이 사탄이라고 증언합니입니다. 사탄은 하나님에게서 자녀들을 빼앗아 멸망으로 갈 동행자를 모으는 중입니다. 견고한 믿음과 성령의 보호하심은 사탄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모습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떼어놓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음란이 주는 쾌락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잔잔한 평안과 즐거움에 비하면 충동적으로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음란한 쾌락은 강도가 훨씬 높습니다. 게다가 욕망을 억제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절제와 오래 참음 같은 어려운 성품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단지 즐거움에 자신을 노출시키면 됩니다. 이같이 쉽게 쾌락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왜 마다하겠습니까? 그렇지만 여기에 빠지고 중독될수록 하나님과 멀어지며 영혼이 파괴됩니다. 사탄이 노리는 궁극적인 목적입니다. 사탄에게 이보다 효과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어둠속에서 은밀하게 접근하여 음란의 쾌락을 맛보여주며 어리석은 영혼을 사냥하는 것입니다. 음란물을 멀리하십시오. 음란의 덫에 걸리지 않는 방법은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습니다. 음란물을 경계하고 멀리 하면 됩니다. 그렇지만 이들의 유혹은 강력하며 결코 포기할 줄을 모릅니다. 더구나 우리 주변 가까이에 은밀하게 자리 잡고 있다가 우리의 경계를 흐트러뜨리는 틈을 호심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잘 지켜왔다고 하더라도 오늘 언제 공격당할지 모릅니다. 즐거움을 추구하는 성적인 본능은 천국에 가는 그날까지 우리의 몸속에 내재하고 있기에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은 언제라도 이들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치열한 영적인 싸움터에 있다는 것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동안 잘 해왔다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일이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유혹하는 자에게 죽은 자가 허다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새가 빨리 그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유혹에 걸려들면 죽습니다. 살아있어도 죽은 것입니다. 살아있다면 유혹을 이겨내야 합니다. 청년이 유혹을 이기려면 오직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구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평소에 경험하고 있다면 죄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까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과의 관계를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죄를 지을 때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것을 염두에 두는데 보통 그것은 죄로 인해 즉각적으로 얻을 수 있는 만족과 쾌락이다. 심지어 대중문화는 종종 간음과 죄악을 찬양하기까지 한다. 반면 잠언은 죄를 올바른 시각에서 바라본다. 나중에 바울은 그와 동일한 관점에서 “죄의 삯은 사망”(롬 6:23)이라고 말했다.
잠 7:22~23을 읽어 보라. 무엇이 간음을 행하는 자로 하여금 죽음의 위협에 취약하게 하는가?
‘그를 따라가는’ 자는 자신의 개성과 의지를 잃은 자로 묘사된다. 그는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한다. “곧”이라는 말은 그가 자신에게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는 도수장에 끌려가는 소와 벌을 받기 위해 매인 미련한 자와 그물에 잡히는 새에 비유되었다. 그것들은 다 자신의 생명이 위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잠 7:26~27을 읽어 보라. 방탕한 여인이 그토록 치명적인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여인은 단순한 간부(奸婦) 이상인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지혜와 정반대의 가치를 대변한다. 솔로몬은 이 은유를 사용하여 자신의 문하생들에게 모든 형태의 죄악을 경고한다. 이 여자는 단지 상해를 입힐 뿐 아니라 죽이기까지 한다. 그녀의 힘은 강인한 남자들도 죽일 만큼 강력하다. 그녀는 매우 치명적인 위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우리 앞에 있었던 다른 남자들, 심지어 우리보다 강인한 자들도 그녀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기서 사용된 언어들은 잠언의 저자가 보편적인 인류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또한 여기서 말하는 ‘스올’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지옥’이 아니라 무덤을 가리킨다.)
교훈 :간음의 유혹에 이끌려 파멸에 이르는 어리석음을 피해야 하듯이 우리는 모든 죄악이 내포하는 치명적인 위험과 심각성을 간과하지 말아야 한다.
부가적용)
우리가 죄에 대해 민감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에 대한 지나친 과신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나의 힘으로 얼마든지 유혹과 시험을 이길 수 있고 견딜 수 있다는 과신입니다. 예를 들어 많은 신앙인들이 가장 쉽게 무너지는 때가 소위 은혜를 많이 받았을 때입니다.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래서 사단이 속삭이는 음성, “그래, 이젠 너의 힘으로 살아야지. 하나님이 그렇게 은혜를 베푸셨는데, 아직도 하나님을 의지하니?”라는 속삭임에 우리는 쉽게 넘어갑니다. 우리는 단 한 순간이라도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바울이든 베드로든 관계없이 예수를 의지하지 않을 때, 자신의 힘으로 하려 할 때, 바로 그때 절망적인 상황을 만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고,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나, 실제는 마치 새가 빨리 날라 그물로 들어가면서도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잠7:23)과 동일한 것입니다. 기억해야 합니다. 죄에 민감하지 못하고 반복하는 우리들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필경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법칙입니다.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필경은 화살이 그 간을 뚫게 되리라 ”(잠7:22-23)
나의 삶 속으로
| 묵상 |
영적으로 위험한 상황에 이른다면 그대는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을까요?
(왼쪽 페이지에 이어서) 요컨대 죄는 그것이 간음이든 다른 무엇이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두에게 주기를 바라시는 영생의 정반대 즉 멸망으로 인도한다. 우리가 이 과의 서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잠언의 어조는 강경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것은 정말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 적용 |
그대는 어떤 방어벽을 통하여 치명적인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로 결심하겠습니까?
영감의 교훈
널리 자행되는 범죄 - “이처럼 타락과 부패의 시대에 존재하는 중한 범죄들 중 하나가 간음이다. 이 수치스러운 죄는 우려를 자아낼 정도로 널리 자행되고 있다. 안식일과 결혼 제도는 거룩하고 신성하게 보존되도록 에덴에서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다.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이 두 제도 모두 악행을 범하기로 굳게 마음을 정한 남녀들에 의해 등한시되고 무시되어 오고 있다”(성적 행실과 간음과 이혼에 관한 권면, 98).
기도
아버지, 죄의 유혹이 우리의 의지와 이성적 노력으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임을 고백합니다. 그 길에서 멀리 서고 그 유혹의 통로를 차단하며 생명을 지키는 각오로 우리의 마음문을 지킬 수 있도록 제게 신령한 의지와 지혜를 주시옵소서.
여섯째날(금) 1월 16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사탄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만일 자기에게 최상권을 준다면 세상의 나라들을 주겠다고 제안한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함으로 하늘을 잃어버린다. 죄를 짓기보다는 죽는 것이 더 낫고, 속이는 것보다 궁핍해지는 것이 더 낫고, 거짓말하기보다 굶는 것이 더 낫다”(교회증언 4권, 495).
“죄로 영혼을 더럽히기보다는 차라리 어떤 종류의 고난일지라도 궁핍과 비난, 친구들과의 분리를 택하라. 불명예나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기보다는 죽음을 택하겠다는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표어가 되어야 한다. 개혁자라고 공언하며 가장 엄숙하고 순결하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간직하고 있노라고 공언하는 한 백성으로서 우리는 표준을 현시대에 있는 것보다 더 높여야 한다”(교회증언 5권, 147).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➊ 어떻게 하면 우리가 광신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죄의 심각성을 진지하게 여길 수 있을까요? 동시에 어떻게 하면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법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➋ 출 20:1~17을 읽어 보십시오. 모든 십계명은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한 계명을 공공연히 어기면 다른 계명들도 범하기 쉬운 이유는 무엇입니까?(약 2:11 참고) 우리는 한 계명에 대한 위반이 다른 계명에 대한 위반으로 이어지는 예를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➌ 사람들이 신앙을 빌미로 잘못된 행위를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해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특히 우리가 ‘사랑’을 선악의 궁극적인 기준으로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면 그렇게 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사랑’을 구실로 저지르는 모든 악행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다면 어떻게 율법이 죄로 이끌리기 쉬운 사람들(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을 계속 보호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까요?
➍ 우리는 어떻게 성경의 상징을 실재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까? 예를 들어 우리는 잠언이 말하는 ‘간음’을 어떻게 오해할 수 있습니까? 어떤 전통들이 그것이 상징하고 있는 영적 진리 대신 다른 것으로 곡해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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