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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제 1기 제 1 과 하늘에서의 위기 (하나님 품성 중심의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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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과 하늘에서의 위기



기억절: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계 7:10)



첫째 날(일) 하늘에서의 타락


*도입질문: 루스벨 천사가 사단이 되는 과정을 왜 이사야 선지자나 에스겔 선지자는 바벨론 왕과 두로 왕의 타락으로 설명하고 있을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이사야서 14장에 기록된 바벨론 왕의 몰락과 에스겔 28장에 기록된 두로 왕의 몰락을 많은 주석가들과 재림교회는 루스벨 천사가 사단이 되는 과정으로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바벨론 왕의 타락과 두로 왕의 타락을 사단에게 적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특별히 에스겔 28장은 성경을 기록하는 히브리적 특징인 카이애즘(교차대구법)으로 구성되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에스겔 28:1-10과 28:11-19이 카이애즘 기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절과 11절이 같고, 2절과 12절, 3절과 13절...로 이어지면서 서로 대구적으로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겔28:1-10의 실제 두로 왕이 행한 일들이 11-19절에 기록된 사단이 행한 일과 비교할 때 매우 흡사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은 실제적인 두로 왕이 행한 일들과 두로 왕이 멸망하는 일들을 통해 두로 왕을 지배하고 있었던 사단이 행했던 일들과 사단의 운명을 예언적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같은 논리로 이사야 선지자는 실제적인 바벨론 왕과 바벨론 왕을 지배하고 있던 사단이 동일한 행동과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됨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14장과 에스겔 28장의 기록을 사단에게 적용하는 대부분의 주석가들과 재림교회의 해석이 옳은 것입니다.



둘째 날(월) 이 세상의 임금


*도입질문: 원래 이 세상의 통치자는 누구였고, 누구에게 바뀌었고 왜 바뀌었나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통치자”라는 단어가 좀 거슬립니다. 이 세상에서 사용하는 통치자의 개념이 지배자 혹은 강압적으로 다스리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신 통치자는 하나님의 품성처럼 섬기는 자의 모습입니다.(마20:28)

하나님은 세상을 만드시고 하나님과 사랑으로 연결된 아담에게 하나님이 우주를 지으시고 섬김으로 이 우주를 유지하시는 것처럼 아담에게도 이 지구를 섬김으로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창1:28)


이 지구의 모든 것이 아담을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이 말은 아담 한 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아담을 통해 태어날 모든 인류에게도 적용됩니다. 이 땅에 태어날 모든 사람들이 아담처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할 다스림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깊이 깨닫고 그 사랑 안에 머물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담이 자녀를 낳기 전에 하나님을 떠나 사단의 말을 따름으로 사단의 자녀가 되어버렸다는데 있습니다.(롬6:16) 아담이 사단의 자녀가 되어버림으로 아담을 통해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사단의 자녀가 되어버렸습니다.(요8:44) 그래서 이 세상의 통치자가 아담에게서 사단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 때부터 사단은 통치자의 개념이 섬김에서 지배로 바뀐 채, 이 세상의 통치자가 되었습니다.(욥1:6, 요12:31, 요16:11)

이 세상이 고달프고 힘든 이유는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조건적 사랑으로 지배되고 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만들어진 이기심과 교만의 정신으로 사는 세상이므로 서로의 본성이 서로 충돌을 일으키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이리가 우굴거리는 세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당연히 피곤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마10:16)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매일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에 매일 담대히 나아가야만 힘을 얻게 됩니다.(히4:16)



셋째 날(화) 하늘에서 일어난 전쟁


*도입질문: 하늘에서 일어난 논쟁의 핵심 쟁점이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전쟁으로 표현된 말은 논쟁으로 생각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단이 전쟁을 한다는 것 자체가 성립이 되지 않으며, 창조주 하나님이 가지신 품성으로 생각할 때 무조건적인 사랑은 모든 자들에게 의지의 자유(선택의 자유)를 주어야만 하는데 하나님의 생각과 다른 생각을 한다 할지라도 전쟁하여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생각에 대하여 오래 참으면서 시간을 갖고 각자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논의하고 토의해야만 합니다.(사1:18)


하늘에서 루스벨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품성에 대하여 이해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그것은 피조된 존재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없는 문제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하여 피조물인 루스벨은 자신이 가진 조건적인 사랑으로 이해하고자 할지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 품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단은 하나님이 가지신 능력을 원했지만 하나님이 가지신 무조건적인 사랑인 품성은 원치 않았습니다.(시대의 소망435)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사단의 눈에는 불안해 보였습니다. 그런 사랑을 한다면 하나님을 반역하는 일을 증가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우주의 질서가 파괴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자신의 생각을 천사들에게 펼쳤을 때 수많은 천사들에게 지지를 받았습니다. 모든 천사들도 피조된 자들이어서 사단이 가진 생각과 동일한 생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건적 사랑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무조건적인 사랑은 낭비이며 잘 못된 결과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장 합리적인 생각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천사들이 사단의 입장에 선 것입니다.


사단의 이런 생각은 피조물의 한계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피조된 자들은 창조주의 사랑가 생명을 받아야만 존재하는 존재론적인 한계로 인해 조건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조건적인 입장에서 볼 때에 무조건적인 사랑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으로 당연히 비합리적이며 파괴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루스벨은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자기 지위(피조된 자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유6) 자신의 생명은 스스로 존재하였다라고 믿는 순간, 하나님이 가진 무조건적인 사랑보다는 자신이 생각하는 조건적인 사랑이 더 합리적이라고 확신하였으므로 그는 “자기 처소를 떠”(유6)난 것입니다.


사단과 뜻을 같이 한 다른 천사들도 같은 생각으로 하나님을 떠났고(계12:12) 그것이 바로 사망 즉 범죄였습니다.(벧후2:4)

이런 과정에서도 하나님의 무조건적이며 책임지는 사랑은 사단과 천사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떠나 나간 사실적인 기록(계12:12) 뿐만 아니라, 사단과 천사들이 행한 행동의 결과를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품성적 표현(계12:9, 하나님이 사단과 그 천사들을 내어 쫒아내신 것처럼 표현하심)도 함께 기록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넷째 날(수) 사단이 쫓겨남


*도입질문: 사단은 쫓겨난 것인가? 내려간 것인가?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요한 계시록 12장에는 같은 사건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큰 용이 내어 쫓기니...땅으로 내어 쫓기니 그의 사자들도 저와 함께 내어 쫓기니라....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계12:9-10)

“마귀가 자기 때가 얼마 못 된 줄을 알므로 크게 분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계12:12)


한 편에서는 쫓겨났다고 기록하고 있고, 한 편에서는 내려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글자로 보면 한 편은 틀릴 수밖에 없지만, 서로가 틀리지 않는 이유는 한 편은 사실적으로 묘사한 기록이고 한 편은 하나님의 품성으로 묘사한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사단과 그의 사자들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간 이유는 더 이상 사단의 논리에 현혹되는 존재들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우주거민들에게 자신들의 논리를 펴기 위해 내려간 것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단과 그의 사자들이 행한 모든 일의 결과에 대해서도 그들을 창조하신 창조주의 책임지시는 사랑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들을 쫓아내심으로 쫓겨서 땅으로 내려가신 것처럼 표현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런 표현법은 사랑이라는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틀린 말씀이지만, 사랑이라는 관점 속에서는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시는 사랑의 극치의 표현입니다.


이런 사실적인 표현법과 하나님의 품성적 표현은 성경 여러 곳에서 등장합니다.(대상10:4 과 13-14 요12:39-41과 마13:14-15 등등)



다섯째 날(목) 계속되는 싸움


*도입질문: 사단이 선택한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고 하나님을 떠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즉각적으로 판단하고 처리하지 않으시고 6천 년 간이나 지속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과를 통해 답을 생각해보기


사단이 하나님의 품성을 오해하여 자신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남으로 생명과의 단절을 선택하였을 때 곧바로 하나님께서 그 선택을 인정하셨다면 사단은 창조 전의 상태인 무로 돌아가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사단이 가졌던 오해가 불식되지 못한 채,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오해의 소지가 확실히 종식되지 못함으로 인해 제 2의 사단, 제 3의 사단은 지속적으로 나올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피조된 자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창조되었다는 사실도 받아들이기 어렵고, 피조된 자의 입장에서의 조건적인 사랑으로 창조주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단이 꿈꾸는 조건적 사랑이 실현되는 세상의 모습이 무엇이며, 그렇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어떻게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다시금 생명의 세상으로 회복시키는 지를 온 우주 거민들에게 보여주셔야만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지구가 선과 악의 대 논쟁의 무대가 된 것입니다.(고전4:9)


사단이 지배하는 세상의 모습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삶이 얼마나 비참함을 보여주고,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를 더 주시는 사랑임을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내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우주 거민들은 사단이 가진 조건적 사랑의 비참함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감동으로 이제는 사단의 주장이 거짓임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만이 생명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요12:31-32)


십자가에서 보여 진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는 사단과 그의 사자들은 자신의 행위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으리라는 확신 속에서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자기편에 끌어들여 같은 운명이 되게 하기 위해 사단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하실 것처럼 믿게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게 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기에 이 세상에는 아직도 여전히 고난과 불행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여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품성에 대한 믿음은 이 모든 고난과 불행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 편에 굳게 서게 하는 능력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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