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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국 가곡] 가고파 이은상 시 김동진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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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    


이은상 시   김동진 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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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고향 남쪽바다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꿈엔들 잊으리요~
그 잔잔한~ 고~향바다
지금도 그 물새들
날으리
가고파라 가고파
어릴제 같이 놀던
그 동무들 그리워라
어디간들 잊~으리요
그 뛰놀던 고향 동~무
오늘은 다 무얼 하~는고
보고파라 보~고파

그 물새 그 동무들
고향에 다있는데
나는 왜 어이타가
떠나살게 되었는고
온갖것 다 뿌리치고
돌아갈까 돌~아가
가서 한데얼려
옛날같이 살고~지고
내~ 마음 색동옷 입혀
웃고 웃고 지~내고저
그날 그~ 눈물 없던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가곡은 여기까지 불리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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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나면 모래판에서 가재 거이랑 다름질하고
물들면 뱃장에 누어 별헤다 잠들었지
세상일 모르던 날이 그리워라 그리워 

여기 물어보고 저기나 알아 보나
내 몫엣 즐거움은 아무데도 없는 것을
두고 온 내 보금자리에 되 안기자 되안겨 

처자들 어미되고 동자들 아비된 사이
인생의 가는 길이 나뉘어 이렇구나.
잃어진 내 기쁨의 길이 아까워라 아까워 

일하여 시름없고 단잠들어 죄없은 몸에
그 바다 물소리를 밤낮에 듣는구나
벗들아 너희는 복된 자 다 부러워라 부러워 

옛동무 노젓는 배에 얻어 올라 치를 잡고
한바다 물을 따라 나명들명 살까이나.
맞잡고 그물을 던지며 노래하자 노래해. 

거기 아침은 오고 거기 석양은 져도
찬 얼음 센 바람은 들지 못하는 그 나라로
돌아가 알몸으로 살꺼나 깨끗이도 깨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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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고파" 노래를 회상하면서



김홍주




 

하나의 노래가 국민 모두의 가슴에 영원토록 남게 되는 

노래에는 필연 사연이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그저 흥얼거리기만 하지 

이 노래에 담겨 있는 


깊은 정서와 역사적 배경에는 문외한일 수가 있다.

『가고파』는 김동진 씨가 숭실전문학교 2학년 시절인 만 21세를 맞이하던 


1933년에 작곡한 것이다. 시는 이은상 씨가 1932년 1월 5일에 탈고하여 

1월 8일 동아일보 지상에 발표된 시이다. 


이 가고파는 대한민국 최고의 시로 선정되었고 

작곡한 최고의 우수작으로 국민가곡이 된 노래이기도 하다. 


이 노래의 작곡가인 김동진 씨는 1913년 3월 22일 

평남 안주 태생이고 2009년 7월 31일 향년 96세를 사시고 타계하셨다.





 

김동진 씨는 자신이 학생 시절에 이은상 씨의 시를 보고 

처음에는 이 기사에 현재명 씨가 곡을 부쳤으나 


김동진 씨는 작곡을 하여 본 적이 없었으나 

이 시를 보는 순간 작곡을 하여 보겠다는 욕망을 가졌다고 하였다. 


당시 김동진 씨는 바이올린을 연주하면서 

그것에 모든 정열을 바치고 있던 중이었다. 


작곡에 소질이 있었던지라 중학교 시절에 

이미 그는『봄이 오면』이란 노래를 작곡하여 사람들이 애창을 하였던 적이 있었다.






 

김동진 씨는 이은상 씨의 시의 내용이 너무도 좋아 은근히 

호기심이 생겨 즉흥적으로 작곡을 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 누구고 관심을 갖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자신의 선생인 마두원 씨에『가고파』와 


봄이 오면』의 작곡된 노래를 보여주자 놀라면서 

작곡가가 될 수 있다는 언질을 주시면서 


그후 김동진 씨는 바이올린 연주와 

작곡에 몰두하게 된다.





 

김동진 씨는 이북 평남 안주에서 태어난 고로 

이북에서 생활을 하다가 


1951년 1. 4 후퇴 때에 남한으로 피난 행렬에 끼게 된다. 

그가 이북 출신이라 이 노래는 주로 이북에서 불러지던 노래였다. 


해방 이후에도 이북에서 많이 불러지던 노래였던 차에 

한 번은 어느 성악가가 무대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데 


극장 주인이 돌연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노래 가사 중에 “눈물 없던 때를 찾아가자 찾아가” 라는 가사를 놓고 


그 노래의 내용이 공산주의를 배타하는 내용이라고 해석하여 

못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하마터면 숙청의 대상이 될 뻔하였던 아찔한 순간을 맞았던 김동진 씨였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가고파라는 노래는 북한에서는 없어진 노래가 되어버렸다. 


그러다가 1.4후퇴를 당하여 피난을 하던 중 서울역에 도착하여 

역의 개찰구를 나오려던 때에 검문하는 군인이 


혹시나 공산주의자가 끼어 들어있지 않나 하여 

세밀하게 조사를 하는 통에 몸 둘 바를 모르다가 


순간 기지를 발휘하여 자신이 심포니를 조직하여 

유엔군을 환영하였던 적도 있고 자신이 활동하는 


신분증도 통하지 않았던 지라 그는 감시하는 요원에게

가고파 라는 노래를 아느냐고 물었을 때에 안다고 하자 


자신이 그 노래를 지은 자라고 말하였을 때에 

어서 나가라는 말이 떨어져 어려운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그때에 김동진 씨는 이 노래가 이렇게까지 널리 애용되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되어 예술의 가치를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일이 있는 직후에 부산에서 전남일보 주최로 전라도의 

생산품의 전시회에서 이은상 씨를 만나 감격을 나누었다. 


좋은 시를 써 주셔서 영원한 가곡을 남기게 된 것에 대하여 

감사한 마음을 전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압기였던 당시 이 노래가 널리 알려지게 된 사연 중에는 

1939년 일본 전국 성악 콩쿠르대회에서 수석 입상한 


25세의 테너 이인범은 일본 전역을 순회 공연했다.

그는 가고파를 공연 때마다 레퍼토리에 넣어 불렀다. 


이 노래를 통해 나라 잃은 설움을 달래고 민족혼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던 것이며, 

김동진은 1973년 이인범의 장례식에서 


"가고파 노래와 내가 이 세상에 알려지게 함으로써 

오늘의 내가 있게 해 준 분"이라며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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