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수-鄕愁.-Nostalgia [시: 정지용, 노래:조용남 이승미 이동원 박인수 임태경 유열 정재혁 김유중 박홍섭 애미리] [동영상과 가사] >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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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鄕愁.-Nostalgia [시: 정지용, 노래:조용남 이승미 이동원 박인수 임태경 유열 정재혁 김유중 박홍섭 애미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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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수-鄕愁-Nostalg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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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용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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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 시는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바다에 춤추는 밤 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정지용 鄭芝溶 



[1902.5.15~1950.9.25] 


시인 정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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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옥천(沃川) 출생. 


서울 휘문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귀국 후 모교의 교사,


8·15광복 후 이화여자전문 교수와 경향신문사(京鄕新聞社) 편집국장을 지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순수시인이었으나, 


광복 후 좌익 문학단체에 관계하다가 전향, 



보도연맹(輔導聯盟)에 가입하였으며,


6·25전쟁 때 북한공산군에 끌려간 후 사망했다. 



1933년 《가톨릭 청년》의 편집고문으로 있을 때, 


이상(李箱)의 시를 실어 그를 시단에 등장시켰으며,



1939년 《문장(文章)》을 통해 조지훈(趙芝薰)·박두진(朴斗鎭)·박목월(朴木月)의 


청록파(靑鹿派)를 등장시켰다. 



섬세하고 독특한 언어를 구사하여 


대상을 선명히 묘사, 



한국 현대시의 


신경지를 열었다. 



작품으로, 시 《향수(鄕愁)》 《압천(鴨川)》


이른봄 아침》 《바다》 등과, 



시집 《정지용 시집》이 있다. 




출처 :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 


시대에 갇힌 천재시인- 정지용 
방송일시 : 2005년 3월 11일 (금) 밤 10시 1TV 
담당연출 : 김기용 PD 
출처: 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manhistory/vod/1345249_968.html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월북인가 납북인가?- 천재시인의 실종
'향수'라는 시로 잘 알려진 정지용은 1988년 해금되기 전까지 우리의 공식적인 문학사에서 지워졌던 인물이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 극에 달했던 1930년대, 정지용은 우리 시문학사의 근본적 흐름을 바꿔놓은 현대시를 발표하며 천재의 등장을 알렸다. 그러나 1930년대부터 해방전후까지 문단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던 정지용은 한국전쟁 초기, 홀연히 사라진다. 독재정권은 사라진 정지용을 월북작가로 규정, 그의 작품을 읽거나 가르치는 일은 금지되었다. 심지어 그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그러나 지난 2001년, 3차 이산가족 상봉현장 때 북한에 있던 정지용의 셋째아들은 상봉 대상자에 정지용을 포함시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정지용의 두 아들 모두 아버지의 생사를 물었다. 월북했다는 정지용의 흔적인 북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천재시인이라는 영광과 의문의 실종이라는 비운을 모두 경험한 시인, 정지용. 그의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증언하는가? 

조선의 천재시인, 정지용 
1935년 '정지용 시집'이 발간되자 수많은 사람들의 극찬이 쏟아졌다. 당대의 문단은 정지용에 의해 조선의 현대시가 비로소 시작되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가 자신의 시속에서 보여준 우리말의 아름다움, 표현의 참신성, 소재의 현대성 등은 수많은 추종자를 양산했으며 그를 1930년대 이후 조선 문단의 최고 시인으로 올려놓았다. 정지용의 본격적인 시작활동은 김영랑, 박용철과 함께 만든 시문학 동인으로서였다. 이어 1939년 잡지 '문장'을 간행한다. 이를 통해 정지용은 한국 문학사에 큰 업적을 남긴다. 청록파 시인을 비롯하여 걸출한 시인들을 등단시켰다. 

시대의 비극을 함께 한 정지용 
해방 직후 정지용은 카톨릭 재단의 신문사인 '경향신문'의 주간이 되어 날카로운 사회비판을 쏟아놓는다. 불과 1년 간이었지만 시에서는 표현하지 못한 현실인식과 민족의식을 드러내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정지용은 해방이 됐건만 사람들의 굶주리고, 나라의 운명은 갈피를 잡지 못하던 당시의 현실을 과감히 비판했다. 그러나 정지용의 직설적인 논지는 수많은 적을 만든다. 이후 투서와 모함이 이어져 경향신문사를 사임한 정지용은 녹번리에 은둔한다. 그러나 세상은 사라진 그를 두고 좌익이라는 꼬리표를 다는 것은 물론, 월북하였다는 허위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이러한 그의 방황과 6.25 전쟁 중의 행방불명은 그를 월북작가로 분류하게 만드는 빌미가 되었다. 

금지된 이름, 월북작가 
정지용 삶의 마지막 증언자 정구관氏, 그가 들려주는 생생한 증언들 
정지용이 비로소 우리의 공식 문단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은 그의 해금을 위해 동분서주하던 가족들의 피눈물나는 눈물이 숨어있었다. 가족들은 정지용이 해금되기까지 월북작가의 가족으로 낙인찍혀 숨죽여 살아야 했다. 작품의 해금과 명예회복, 모두 가족들이 그 짐을 지어야했다. 비극적인 역사 속에서 그의 시는 반세기동안 어둠에 갇혀있었다. 정지용의 시가 해금된 것은 1988년. 해금 이전 정지용의 삶의 흔적은 비밀에 묻혀있었다. 다행히 해금 이후 뒤늦게서야 한 초등학교 교사에 의해 복원이 이루어졌다. 정지용의 생애를 가장 잘 기억하는 장남 정구관씨. 그는 아버지에 대한 기록을 증언한 이후, 고인이 되었다. 이제 그는 정지용 삶의 마지막 증언자가 되었다.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까 혼자 모든 진실규명의 십자가를 졌던 그를 통해 월북작가로 낙인찍혀 살아온 고통, 정지용에 대한 기억들을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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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에녹 블로그   글쓴이: 에녹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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