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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의 유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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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8.12.02 11:26 조회수 3,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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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그리스도의 속죄 희생의 유익들

12월 13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14분)


도입)

일본의 한 기업체에서는 욕을 들어주는 화풀이 전화를 개설, 직원들의 정신적 압박감을 덜어 줘 작업능률을 향상시켰으며 미국에서는 상당한 액수의 돈을 받고 무슨 말이든 5분씩 들어주겠다고 광고했더니 주문이 쇄도했다는 일화가 있다.억울함이나 답답함이 있을 때 누군가에게 털어놓으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것처럼 허심탄회한 대화는 치유의 기능이 있으므로 가정이나 직장 등 공동체에는 대화의 자리가 비상구처럼 늘 열려 있어야만 한다.특히 성도에게는 영혼의 호흡이라는 축복된 기도의 자리가 있다. 삶의 비밀스런 이야기들을 그분 앞에 털어놓으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 받을 수도 있고 넉넉한 마음가짐도 배울 수 있다. 하나님 앞에서든 사람 앞에서든 스스럼없이 잘잘못을 고백하여 늘 투명한 마음가짐을 유지하는 것이 건강한 성도의 모습이다.영육의 건강을 위해서도 기도는 성도의 특권이요 축복된 자리임에 틀림없다.우리의 답답함과 괴로움과 슬픔과 죄에 대하여 들어주시고  해결해 주시는 우리의 중보자가 계시다. 그분을 알고 배우는 기쁨을 누리시기를 바란다. 성경의 핵심은 죽음이, 죽음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우리가 말하는 육체적 죽음은 사실은 또 하나의 시작일 뿐이다. 우리는 죽은 후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죽음이 인생의 끝이 아니고 죽음 후에는 심판이 있으며, 그 심판은 살았을 때의 모든 것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할 것이다. 하나님도 죽음도 심판도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죄와 악을 무수히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아니 그 반대로 죄와 악을 저지르기 위해 하나님이나 죽음과 심판을 믿지 않으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은 우리의 죄를 감당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속하셨다는 것이다. 대속이라는 말은 대신 갚으셨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단에게 지불된 속전(贖錢)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인류를 마귀로부터 석방시킬 때 일정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마귀는 예수의 생명을 요구했다. 그래서 예수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마귀에게 값을 지불했다. 바울사도는 너희로 감독자로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행20:28)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 하신 후 다른 곳으로 없어지신 게 아니다. 예수님은 다른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가셨다. 그곳이 원래 주님이 계셨던 곳이기 때문이다. 하늘에서의 그분의 사명은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일이다. 아직도 우리가 하늘에 가지 못했기 때문에 그분은 우리를 하늘로 이끌기 위해 그의 일을 그치지 않고 하고 계신다. 주님의 이와 같은 중보사역을 믿지 않고 주님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성경의 진리는 죽음이 있고 죽음 후에는 하나님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기억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연구범위: 롬 8:34-39, 고전 15:16-18, 엡 1:3, 골 1:16-17, 히 7:25, 벧전 3:21-22, 요일 1:9.


중심 사상: 하늘 성소에서 행해지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은 그분의 구속 사역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부분임을 확인한다.


안식일 오후

하늘 성소에서 행해지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 사역은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행하신 일을 무효로 만들지 않는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풍성한 은혜의 선물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신자들은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하늘 성소 사역을 통하여, 십자가로부터 주어진 구원의 충만한 복을 받게 된다. 십자가의 모든 은총은, 우리가 그분의 속죄의 희생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것이 된다.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사 45:22).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우리에게 주는 기별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주어진 구원은 그분의 중보 사역을 통해 우리에게 유효하게 된다. 이번 주에 우리는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의 사역으로부터 어떤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 탐구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일요일(12월 7일)

부활과 승천(고전 15:16-18)


도입)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리스도 사역의 온전함에 인을 치는 가장 커다란 가시적인 보증이다. 그것은 "다 이루었다"라는 십자가로부터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응답이다. 예수님께서 침례 받으실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눈부신 영광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마 3:17)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비록 그 음성을 들을 수는 없지만, 그분께서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실 때에도 예수님의 탁월함뿐만 아니라 독생자가 행한 사역의 온전함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로 말씀하셨다. 부활은 십자가의 속죄에 대하여 전혀 아무것도 더하지 않았다. 그 온전함에 더 이상 아무것도 더할 수 없으며 그보다 더 큰 온전함이 있을 수 없음을 선언한 것이며 이미 그것의 완벽함은 온전히 선포되었다. 예수님의 승천은 증거를 더하여 준 것이다. 특별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는 사실이 더욱 그러하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죄의 용서도, 구원도, 영생의 소망도 없으므로, 부활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1. 고린도전서 15:16-18에서 바울은 속죄와 예수님의 부활을 얼마나 밀접하게 연관시키고 있습니까?

답: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지 못하셨다면, 그분의 죽음은 속죄의 능력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단 하나의 사건으로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십자가와 부활은 구속 사역에 있어서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중요한 두 부분이다.


2.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과 중보 사역 사이에는 어떤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까?(롬 8:34-39, 벧전 3:21-22)

답:

예수께서는 영광스럽게 된 인성을 취하시고 승천하셨다. 그리하여 그분은 인류에게 하늘 문을 열어 주셨다. 그분의 부활과 승천은, 첫째로 그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요 17:4-5, 19:30).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하나님과 그분을 믿는 자들을 영원히 연합시키셨다. 우주의 어떤 세력도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장벽을 제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백성에게 한없이 흘러갈 것이다. 셋째, 그리스도의 승천은 악의 세력에 대한 그분의 영원한 승리를 증언해 준다. 그분께서는 승천하신 후에 하나님 우편에 앉으심으로 그분과 함께 우주의 통치자가 되셨다.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벧전 3:22, 참조 히 10:12-13). 그분께서는 원수들이 당신의 지배 아래 놓일 때까지 아버지와 함께 계실 것이다. 그런 다음에 그분께서는 당신을 기다리는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히 9:28). 이 사건은 구원의 사역에 있어서 절정이 될 것이다.(빌 2:10-11, 계 17:14)


교훈: 인류를 구속하기 위한 속죄 사역에는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뿐 아니라, 그분의 부활과 승천, 그리고 그분의 중보사역이 모두 포함된다.


부가적용)

성경적 의미로 '복음'이란 말은 사도들의 설교인 기쁜 소식을 말한다. 초대 교회의 전도 (Kerygma, 케리그마)에는 메시야이신 예수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 및 승천, 성령 강림, 예수의 재림, 회개와 믿음으로 얻게 되는 구원의 확신, 그리고 성령의 은사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스데반, 베드로, 바울 등이 전한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다. 이 복음은 예루살렘, 안디옥, 에베소, 고린도, 로마와 그 변경 여러 곳에 전해진 가장 기본적인 기독교의 메시지이며 구원의 기쁜 소식이다. 오늘도 이 복음을 확신하고 이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 일에 직접적으로 또는 간접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선교 사역에 협력하는 것이다. 인간은 죄로 인해 구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구약 성경은 구속의 예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보내어 이 구속의 예언을 들을 수 있게 해주셨다.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셨다"(갈 4:4).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인간의 삶에 동참하셨으며,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대속의 역사를 이루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을 통하여 그가 영광의 주가 되심을 알려주셨다. 예수께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여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대속을 성취하셨다. 부활과 더블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적 승리는 복음의 핵심적 내용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이 발용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세상에는 어떤 교회도, 어떤 선교 운동도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바이어하우스(Peter Beyerhaus)가 예수님의 부활을 선교의 기초로 말한 것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은 죄와 사망이 정복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모든 족속들에게 침투해 들어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명령을 받게 되었다(마 28:18-; 막16:15; 눅24:44-49; 요20:21-23; 행1:8). 예수님의 승천은 그리스도의 우주적 통치가 시작된 것을 의미한다. 그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 높임을 받으셨다(빌2:8-11). 영광의 위에 앉으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보내 주셔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능력 있게 전파하도록 제자들을 성령의 은사와 능력으로 무장시켜 주신 것이다. 사도행전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과정을 알려주는 선교 역사의 첫 장이라 할 수 있다.


월요일(12월 8일)

그리스도의 중보와 속죄(히 7:25)


도입)

중재란 중재하고, 사이에 들어가며, 다른 사람을 대신하여 탄원하며, 한쪽을 다른 쪽에게 대표하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그리스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다시 보여 주시기’위해 오셨다. 그분은 중보자, 혹은 중재자가 되셔서 인간에게 하나님을 다시 보여 주시고, 하나님과 인간을 중재하셨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요 1:18)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 내가 너희를 위하여 아버지께 구하겠다 하는 말이 아니니”(요 16:26)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중보하고 계신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의미이다. 중보기도는 몸된 교회를 통한 예수님의 사역의 확장이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서서 세상을 그분과 화목 시키기도 하고, 사단과 인간 사이에 서서 갈보리의 승리를 집행하기도 한다.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대표자란 “보냄을 받은”사람이다. 보냄을 받은 자들은 보낸 자를 대표하고 있는 한, 권위를 가진다. 예수님은 아버지로부터 보내심을 받았으며, 그분이 모든 일을 행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을 보내신 아버지께서 하신 것이었다(요 14: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권위는 보냄을 받은 것, 곧 예수님을 대표하는 데서 나온다. 우리가 그런 자격으로 일하는 한,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위 안에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우리가 실제로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분이 하시는 것이다. 나의 중보기도는 이미 성취된 그리스도의 중보사역을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그분의 사역이 나의 기도에 능력을 부여하고, 나의 기도는 그분의 사역을 현실화시킨다.


1. 속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과 하늘 성소에서의 중보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히 7:25, 요일 1:9, 2:1-2, 4:10)

답: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중보를 가능하게 하였다. 그리스도의 중보는, 하늘의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와 죄책(罪責)을 잊지 않으셨음을 나타낸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분의 중보 사역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인간은 여전히 죄와 죄책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다. 그리하여 구주께서는 구원의 계획에 있어 필수불가결한 역할인 중보자의 자격으로 아버지 앞에 서시게 되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결코 그분의 속죄의 희생과 분리될 수 없다.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이 제공되었다 하더라도 용서의 능력이 회심하는 자들에게 지속적으로 역사해야 하는데, 그 용서는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다(엡 4:32). 그러나 인간의 마음속에 회개가 일어나게 하는 분도 또한 그리스도이시다(행 5:31).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은 신자들이 회심한 후에 범한 죄에 대해서도 여전히 제공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회심한 후에도 죄로 인해 괴로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를 위하여,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대표하는 대언자가 있으며 그를 통해 우리가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요일 2:1-2)

히브리서 2:17에서 "죄를 구속하다"라는 동사가 현재 시제로 되어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화목케 하는 사역이 그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봉사를 통해 지금 계속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십자가를 통해 만민을 위한 구원을 제공하신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성소에서의 중보 사역을 통하여 당신을 믿는 자들에게 십자가의 은총을 베풀어 주신다.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중보가 없다면 십자가에서의 속죄의 능력이 죄인들에게 유효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보는 십자가에 근거하고 있다. 중보는 단지 갈바리의 부가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능력을 확증해주며, 우리의 희생 제물이신 그리스도의 깊고도 영원한 속죄의 능력을 드러내 준다.


교훈: 십자가에서 이루신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능력도 그분의 중보가 없다면 우리에게 적용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분의 중보 사역은 대단히 중요하다.


부가적용)

이스라엘 제사 가운데는 속죄의 성격을 가진 제사도 있고 헌신의 성격을 가진 제사도 있고, 감사의 성격을 강하게 띠는 제사도 있다. 속죄의 성격을 가진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목의 정신을 나타내며 그것이 감사를 포함한 내용으로 화목의 제사가 별도로 시행되었다. 이러한 속죄적 제사는 사실상 그 실체이신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하여 성취되었으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단 번에 드리신 희생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의 축복을 이미 영원하게 누리게 된 것이다. 특히 구약시대에는 이러한 제사에 있어서 반드시 중보자의 역할이 필요하였다. 그가 대제사장인데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용서를 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진정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런 경우 중보의 역할을 했던 모세는,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일시적 중보의 역할을 한 그림자적 사역자이다. 참 실체의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와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더 좋은 중보자, 새 언약의 중보자라고 하는 말씀은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이루어진 불완전하고, 형식적이고, 모형적인 구약의 제사장이나 여러 제사들보다 완전하고 영원한 실체 의 중보자였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중보자로 계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대속자와 보증인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셨으며 어느 누구도 소홀히 여기지 않으신다. 그분은 인류가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된 것을 보시고 그냥 계실 수가 없어서 그들을 위하여 당신의 생명을 버리셨으며,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동정과 측은한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다. 그분은 떨면서 간구하는 자들을 일으켜 세우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신다. 그분은 자신의 속죄를 통하여 선을 행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사람을 위해 예비하셨으므로 그 능력을 우리를 위해 사용하지 않으실 이유가 없다.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와 슬픔을 그분의 발 앞에 놓을 수 있다.


화요일(12월 9일)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중보(요 16:23-24)


도입)

고전 헬라어에서 ‘매력’(kalov")이라는 말은 가장 고상한 말들 중에 하나였다. 원래 이 말은 형태, 즉 생김새의 아름다움에 언급되었다. 사랑스러운 사람이나 어떤 아름다운 사물에 적용되었다. 이 세상을 살아갔던 여러 시대의 그리스도인들 치고 ‘예수의 매력’ 에 이끌림을 당하지 아니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예수에게 있었던 매력은 실로 그 어떤 경우에도 그 광채를 상실한 적이 없었다. 예수에게 있었던 매력은 전인적이었다. 그것은 그가 참 하나님이 되시고, 참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가 되셨다는 이 사실에 있다. 디모데전서 2장 5절 중에 ‘중보자’(仲保者)란 말이 나온다. 히브리서 8장 6절, 9장 15절, 12장 24절에도 계속해서 사용된 단어이다. ‘중보자’란 말 ‘ 메시테스’(mesivth")는 ‘중간의’(middle), ‘가운데’의 뜻을 가진 ‘메소스’(mevso")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 말의 고전적 용법이나 사례는 헬라와 로마의 경우들에서 기인되었다.

1. 그것은 중재자, 조정자를 의미하였다.

예컨대 헬라의 아테네는 10지파에서 각각 선출된 4인으로 구성된 40인회(The Forty)라고 불리는 단체가 있었다. 이 40인회는 60세가 된 아테네의 시민으로 구성되었는데, 여기에 선택이 되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 40인회는 아테네 시민 사회에서 어떤 분쟁사건이 생기면 저들 가운데서 중재자나 조정자를 세워 불화된 사이를 화해시키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로마의 경우 중재인(arbitrator) 이라 불리는 단체가 있었다. 사건이 순전히 법률문제이거나 그와 동등한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두 당사자 사이에 끼어들어 중재역할을 하는 사람들의 단 체였다.

2. 그것은 보증인이나 후원자를 의미하였다.

법정에서 부채에 대하여 다른 사람의 출두를 보증하는 사람이나, 은행에서 돈을 대부할 때 세우 는 보증인을 ‘메시테스’(mesivth")라고 하였다.

3. 양국 간에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조약을 체결하는 경우, 쌍방간의 우정을 회복하기 위하여 가운데 서 화목을 도모하는 사람을 ‘메시테스’라고 불렀다.

이런 경우 ‘메시테스’는 양쪽 모두의 만족을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어야 했다. 이러한 어원적 용례를 가진 ‘메시테스’(mesivth"), 곧 중보자를 성령은 예수에게 적용하여 사용하였다.


1. 다음 구절들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로서 하늘에서 무엇을 행하고 계신다고 말해 줍니까?(요 16:23-24, 행 5:31, 엡 1:3, 2:18, 히 1:2, 4:16, 13:20-21)

답: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분리할 수 없듯이, 부활 후 그분의 왕으로서의 사역과 대제사장으로서의 사역도 분리할 수 없다. 부활의 진정한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한 희생 제물로서 십자가에서 그 사명을 완수하셨으며, 이제 하늘 성소에서 왕과 제사장으로서 일하고 계신다. 낮은 신분에서 높은 신분으로 옮겨간 것은 구속자로서의 그분의 사역이 진전되었음을 가리킨다. 이 사실은 그분의 대속적 죽음의 참된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으며(히 10:12), 그 은혜를 더 풍성히 드러내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대제사장이 되신 후에 즉시 당신의 중보 사역을 시작하셨으며, 이것은 직접적으로 교회에 영향을 미쳤다. 중보 사역의 결과로서 “세상에서 애쓰고 수고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받으시는 바' 된다(엡 1:6). 그들은 하늘 천사들과 타락하지 않은 세계의 대표자들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듣게 된다”(시대의 소망, 834).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 하늘로부터 내려진 이와 같은 칭의의 선언에는 즉각적인 성령의 부으심이 수반되었다. 예수께서는 다른 보혜사를 보내주시기를 아버지께 구하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셨다(요 14:16-17). 오순절에 베드로는 성령의 부으심을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의 시작으로 해석하였다.(행 2:33)

좋은 소식은, 예수께서 당신의 백성을 위해 여전히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행 3:21)고 말하였다.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들이 성취된 후에야 아버지 앞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은 종료될 것이다. 궁극적인 회복은 아직 미래에 속해 있으며,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그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우리는 여전히 그분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있는 구원의 역사 안에 살고 있다. 이 두 사건 사이의 시간은 그분의 중보와 교회의 사명 성취로 채워진다.


교훈: 예수께서 하늘에서 중보 사역을 시작하신 증거로 오순절 성령 충만을 허락하셨다. 그분께서는 지금도 우리를 위해 당신의 중보 사역을 계속하신다.


부가적용)

히브리서 7장 25절을 통해서, 지금도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그의 백성들 개개인을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에 대하여 알아보자.

  1. 그리스도의 간구(중보) 사역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임재를 체험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종류의 궁핍과 시험, 연약함과 죄, 그리고 시련 속에서도 그의 도우시는 은혜를 체험하게 된다.

  2. 그리스도의 간구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오는 자는 온전한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된다. 대제사장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우리의 구원에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을 통한 그의 은혜와 자비, 그리고 도움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될 것이고, 죄와 사단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으며, 궁극적으로는 정죄를 당하게 될 것이다.

  3.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고백하고 버리기를 거부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로부터 떠나는 자들을 위하여 중보 하시지는 않는다. 완전한 구원을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오는 자를 위한 것이다. 고의로 죄를 짓고 하나님을 찾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피난처는 없다(히 10:21-31).

  4. 그리스도의 간구 사역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늘에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어떠한 천사나 성인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거나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드리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이러한 행위는 비성경적인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개개인을 위하여 지금도 중보하고 계신 유일한 중보자이시다.


수요일(12월 10일)

그리스도의 중보와 만물의 보존(요 3:35)


도입)

“우리는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이유가 있어서 이 세상을 설계하셨기 때문에 진짜 그의 뜻 가운데 많은 부분이 인간의 태도와 행동에 따라 좌우되도록 하셨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그분은 역사에 영향을 미칠 만한 결정들을 인간이 내릴 수 있도록 허용하신다…. 인간의 무활동이 그리스도의 속죄를 무효화시키지는 못하지만, 그리스도의 속죄를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소용없게 만들 수는 있다.”-피터 와그너

예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에 대하여 우리의 중보자(메시테스, mesivth")가 되셨다. 예수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화목사역의 중보자가 되셨다. 어떤 중보자인가? 디모데전서 2장 5절에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하였다. 이 말씀 속에는 첫째로, 예수는 완전하신 하나님이시요, 또한 완전하신 사람이라고 하는 뜻이 담겨 있다. 둘째로, 예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셋째로, 예수는 또한 유일하신 중보자라는 사실을 담고 있는 말씀이다. 예수만 이 우리의 중보자라는 사실이다. 중보자라고 하는 말은 예수 외에는 전혀 적용할 수 없다는 말이다. 사실상 구약에는 ‘중보자’란 말이 없다. 예수만이 유일무이의 중보자라고 하였다. 사도행전 4장 12절에 예수만이 유일의 구원자라고 하였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만이 유일한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라고 하였다. 예수는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막힌 담을 십자가로 헐어버리고, 하나님과 사람을 화목 시키기 위하여 중보자가 되셨다 (엡 2:16). 그러기 위하여 하나님이신 그가(요 1:1) 사람으로 성육하였다(요 1:14).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가 되셨다. 오직 한분뿐이신 중보자가 되셨다고 하였다.


1. 하늘 성소에서의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천연계에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요 3:35, 골 1:16-17, 히 1:3)

답:

만약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아버지 앞에서의 중보가 없었더라면 땅은 아마도 화성처럼 황폐해졌을 것이다. 죄는 천연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천연계는 죄의 파괴적 속성을 보여주는 현장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천연계를 버리지 않으셨다. “여호와께서는 만유를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9)라고 시편 기자는 노래하였다.

죄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죄로 오염되긴 하였으나 당신의 피조물들을 구하기로 사랑의 결정을 내리셨다.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행 17:28)고 하였다. 우리의 생명이 보존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이 작용하는 어떤 자동적인 법칙의 결과가 아니다. “인간의 물리적인 조직은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으나, 그것은 시계처럼 작동시켜 놓기만 하면 스스로 움직이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심장과 맥박이 계속 뛰고, 호흡이 계속적으로 이어지지만, 전 존재는 하나님의 주관 아래 있다. … 모든 맥박과 호흡마다 아담의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신 분의 영감, 곧 영존하시는 하나님, 위대하신 자존자의 영감이 스며있다”(엘렌 G. 화잇, 의료봉사, 9). 비록 죄인들은 죽어 마땅하지만 그들의 자연적 생명은 하나님의 은혜로 보존되며, 그것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교도들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은)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행 14:17)고 하였다. 그분은 “가축을 위한 풀과 사람의 소용을 위한 채소를 자라게 하시며 땅에서 식물이 나게 하”신다(시 104:14). 이 모든 일은 피조물들에게 참으로 과분한 일로서,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사랑스런 은총의 표현이다(마 5:45, 눅 6:35).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분을 섬기는 자들에게 한이 없다.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미친다.


교훈: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보호를 받아 그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드리자.


부가적용)

죄는  1+1=2라는 합리적인 가설을 만들어 오직 유일한 답만을 제시함으로 하늘이 주신 충만의 풍요를 가두어 버렸다. 과학이란 천연계 가운데 나타난 하나님 세계의 놀라운 사랑의 경이에 대한 검증적 발견에 지나지 않으며 진리에 접근하는 진정한 과학은 성경의 모든 진리를 정확하게 증거한다. 물리학의 아버지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은(E=MC2) 모든 물질의 근본은 하나이며 빛으로 시작된다는 창조의 과학은 생명에 대한 진화론의 허구를 정면으로 배척한 인간역사의 놀라운 발견이며, 인간이 발견한 물질의 최소 단위인 “쿼크”에 에너지를 가하면 모두 빛으로 환원됨을 보면 성경의 창조기록이 얼마나 과학적이며 정확한 사실인지를 알 수 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창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손에서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만물을 지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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