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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성령의 열매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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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12.31 16:44 조회수 6,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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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과 성령의 열매인 사랑

1월 9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31분)


도입)

빛 속에는 일곱 가지 무지개 색깔이 들어있다. 빨.주.노.초.파.남.보 성령 속에는 9가지 열매가 들어있다. 사랑, 희락,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이다. 독약이 몸에 들어가면 독약 중세가 나타난다. 보약을 먹으면 보약의 효과가 나타난다. 그런데 성령이 임재하시면 9가지 열매를 맺히게 된다. 사랑은 기독교의 기본정신이다. 성부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사랑은 기독교의 최고 봉우리이다. 벧후 1장에 나오는 신의 성품까지 자라가는 최고봉이 바로 사랑의 단계이다. 사랑은 모든 신앙 활동의 원동력이다. 잘했냐 못했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느냐가 더 중요하다. 사랑으로 그 사람의 신앙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길이를 측정할 수 있다.


기억절
: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

연구범위: 신 6:5, 마 5:43~48, 7:12, 22:39, 눅 10:25~37, 고전 13:4~7.

안식일 오후

바울이 성령의 열매인 품성의 특성들을 나열할 때 사랑으로부터 시작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사랑은 그리스도인 덕성의 최고봉인데 이는 사랑이 하나님의 본성을 가장 잘 나타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유지하시며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독생자를 보내신 근본 동기는 사랑이었다.

요한은 단순하고도 분명한 어조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16)고 말한다. 사랑은 그분의 품성의 핵심이기 때문에 그것은 또한 우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요일 4:16)

불행하게도 오늘날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나도 무의미하게 남발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사랑스러운 날씨” “우리 강아지를 너무 사랑해”라는 표현을 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인 참된 사랑(참조 고전 13장)과 비교될 수 없다. 진정한 사랑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전 존재와 우리의 삶의 방식과 다른 이들과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사랑의 성분은 한 덩어리이지 메뉴에서 우리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내고 나머지는 제외시키는 그런 것이 아니다.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참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일요일(1월 3일)

사랑의 여러 측면들(신 6:5)


도입)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한 말씀에는 ‘나’와 ‘이웃’의 구별됨이 없다란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나’와 ‘이웃’이나 똑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것이 ‘이웃사랑’보다 더 짙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사랑을 ‘나’를 구별된 위치에 두지 않는다. 세상에서는 편애를 사랑으로 말하기 쉽다. 남보다 더 사랑함으로 ‘사랑’을 보인다는 것이다. 남들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을 특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사랑에 편중을 둔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사랑을 떠난 것이다. ‘원수를 극단적으로 미워하는’ 삶을 말하는 것은 감정적인 것이다. 그래서, 원수를 향하여서는 사랑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라 하더라도 사랑이 가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출발한 사랑은 원수를 사랑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으로 부터 오는 사랑은 원수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 없다. 사람으로 출발한 사랑은 원수가 큰 장벽이 되어 넘어갈 수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 사이에 맺힌 원수된 벽을 무너뜨리는 힘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원수라 하더라도 제한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랑 안에는 어떠한 벽도 만들 수 없다란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보면, 이 하나님의 사랑은 펴져나가는 선교의 역사를 이룬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의 벽이나 사랑의 편중을 넘어선 것이다. 이 사랑 안에서는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하는 사람도 없고, 사람에 따라 가리는 편애도 없다. 그래서, 이 사랑이 미치지 않은 데가 없으며,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이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증거 하는 것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마 22:37~39, 참조 신 6:5)

다른 서적들도 마찬가지지만, 성경은 번역본들마다 용어가 조금씩 다르게 번역되었다. 예를 들면 “작은 새”라고 번역한 것도 있고, “조그마한 새” 또는 “쪼끄만 새”로 번역한 곳도 있다. 이 모든 표현은 틀렸다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를 공부할 때에 그 단어의 원어적 의미를 살피는 것은 도움이 될 것이다. 신명기 6:5에 나오는 ‘사랑’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아하브타(ahabta)인데, 이는 근본적으로 느낌과 감정으로 나타나는 사랑이라기보다는 의지와 마음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사랑을 가리킨다. 그것은 지고한 사랑으로서, 우리 마음에 어떤 느낌이 들든 간에 옳고 고상한 일을 행하도록 동기를 부여해 준다. 예수께서 사랑을 가장 큰 계명으로 언급하셨듯이, 그것은 가장 고상하고 순결하며 지극히 높은 형태의 자아희생이며, 각 사람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져야 할 사랑이다.

유대인들은 온 마음과 목숨과 뜻을 다해(막 12:30에는 “힘을 다해”가 추가됨)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첫째 되는 계명임을 알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 인간 존재의 네 가지 측면을 지적하신 것이다. 그분께서는 “너의 전 존재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1. 마태복음 7:12, 22:39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전체적인 사랑의 개념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답: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은 온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이 “둘째 되는 계명”에 언급된 사랑도 “첫째 되는 계명”의 것과 동일한 것이다. 그것은 뜻과 의도가 내포된 행동하는 사랑이다. 우리의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는 것은 자신의 몸을 돌보듯 다른 사람을 보살피라는 의미이다.


교훈: 사랑에는 여러 측면이 있는데,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에 다 포함되어 있다.


부가적용)

사랑의 행동을 나타내는 성경구절 중에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가장 으뜸이라고 생각한다(눅 10:25-38).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미치는 사랑이다.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나 이웃이나 심지어는 우리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지구 저쪽의 사람에 이르기까지 그러하다. 그 사랑은 우리가 사랑하기 쉬운 상대만이 아니라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행해진다. 그 사랑은 우리를 슬프게 하거나 괴롭게 하는 사람에게까지 행해진다. 남편이 신실하지 못하여 다른 여인을 사랑하므로 고통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 젊은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해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로 작정을 하였는데 이 중에는 그녀의 남편을 빼앗아 간 여인에 대한 사랑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가 되자 그녀는 그 여인에게 장미 한 송이와 함께 카드를 보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사랑이 내게 있으므로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가페 사랑이고 성령의 열매인 것이다. 사랑의 명령은 조건이 아니다. 우리가 사랑을 느끼거나 그렇지 못하거나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참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거듭나는 첫째 표식이며 그러므로 성령이 우리 안에 역사하시게 된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사랑은 모든 회중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가장 뚜렷한 표식이다. 셔우드 위트 박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약한 교회와 강한 교회, 큰 교회와 작은 교회를 지적하는 방법을 나는 배웠다. 그러한 분류는 실제적이 아니다. 오직 사랑하는 교회와 사랑하지 않는 교회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사람을 사랑한다고 말하기는 쉬운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군중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보기가 힘이 드는 것도 사실이며 병이 든 사람이나 절망에 빠진 사람의 유일한 소망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한 사랑을 그들에게 줌으로만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까지 전해져야 한다.


월요일(1월 4일)

“사랑은 … 하며”(고전 13:4~8)


도입)

진정한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이유로, 첫째, 진정한 사랑이 뭔지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랑이 뭔지 안다고 해도 그것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에로스의 사랑, 아가페의 사랑의 차이점,

에로스의 사랑은 가치를 추구하는 사랑이고,

아가페의 사랑은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이다.

에로스의 사랑의 중심은 나 자신에게 있고,

아가페의 사랑의 중심은 상대방의 유익에 있다.

에로스는 어떤 가치를 가진 대상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행위 즉 자기 만족. 에로스 사랑은 거기에서 더 이상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게 되면 버릴 수도 있는게 바로 에로스의 사랑이다. 아가페의 사랑은 사실은 가치가 없는데, 기치 있다고 인정하고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8)

사랑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그것을 정의하는 것이 우선적인 단계일 것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그 다음 단계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성경에 표현된 사랑의 원칙들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지를 면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1. 고린도전서 13:4~8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을 통해 사랑의 여러 가지 의미들을 살펴보십시오. 이러한 원칙들을 우리 가정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답: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사랑의 속성들을 계속 실천한다면 우리의 가정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해 보라. 가족들이 서로서로 긍정적인 지지를 해주는 그런 환경에서 사는 축복을 생각해 보라. 아마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 자신이 먼저 이러한 원칙들을 적용한다면 그 영향력이 얼마나 힘 있게 다른 이들에게 전달되는지 보게 될 것이다. 아무도 사랑에 대해서는 반박하지 못한다. 사랑은 모든 창조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신학이나 생활방식이나 신조나 믿음 등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예수께서 세상에 보여주신 무조건적인 사랑을 그분의 은혜를 힘입어 나타낼 수 있다면 아무도 감히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교훈: 우리가 무조건적인 사랑을 다른 이들에게 베풀 때에 거기에는 강력한 영향력이 나타난다. 아무도 무아적인 사랑에 대해서는 반박할 수 없다.


부가적용)

고전 13장 1절과 3절에 '사랑이 없으면' 이란 가정법의 구절이 세 번이 나온다. 이것은 1문단속에 3가지의 신학적 논리가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것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도 충분히 신학적 논리들을 충복 시킬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1문단을 효과적으로 살펴보기 위하여 1문단속에 나타난 언어의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1절에서 "--가 되고", 2절의 "---아무것도 아니요", 3절에서 "-- 없느니라" 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 무엇을 주면 우리에게 나타나는 결과를 설명하고 있다. 1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이 되고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이는 당신이 하는 말은 아무 효력도 없다 라는 의미이다. 인간의 삶의 방법은 제일 먼저 언어로 시작되고 표현된다. 언어를 통하여 자신의 의견과 필요를 말하게 되고 말로서 비로서 인격이 부여된다. 또한 언어가 서로 통한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통로로서 같은 언어로서 서로 일체감을 갖는다. 그리스도인들의 언어는 분명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 이로서 우리는 서로가 그리스도임을 알고 그 속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살아 있음을 알게 된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사랑의 말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우리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 속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기 때문이다.


화요일(1월 5일)

“사랑은 … 아니하며”(고전 13:4~8)


도입)

적십자의 구호가운데 하나가 “사랑은 동사다”라는 것이다. 성경은 사랑은 행함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랑은 오래참고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즉 두 가지로 정의할 수 있다. 사랑은 하며와 하지 아니하며! 즉 사랑은 동사이다. 해야 할 것을 하며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은 명사보다 동사를 사랑한다. “나의 움직임이 끝날 때 나는 깊은 사람(辭林) 속에서 그러기에 핏기 없는 명사가 되고 만다...”라는 글이 있다. 다형 김현승 시인의 ‘인간의 의미’ 일절이다. “회개로 맛을 내지 않는 믿음은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아니다.”-찰스 스펄전-의 말이다. 우리의 믿음을 회개로 그리고 행동하는 사랑으로 맛을 내자.

다시 고린도전서 13:4~8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다른 관점에서 이 구절들을 살펴보자. 사랑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보라. 비록 이러한 진술들이 부정적인 형태로 나타나 있지만 사실은 사랑의 긍정적인 속성의 다른 측면인 것이다.

1. 고린도전서 13:4~8에 나타난 ‘부정적인’ 특성들을 살펴보고, 거기서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 적어보십시오. 또한 그렇게 하면서 나는 과연 사랑의 이러한 면들을 얼마나 잘 실천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부족한 부분을 향상시킬 수 있을까요?

투기하지 아니하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랑하지 아니하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교만하지 아니하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성내지 아니하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사랑장(고전 13장)에 세세히 묘사된 사랑의 의미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사랑의 화신(化身)이신 하늘 아버지의 품성을 인식하게 된다. 또한 세상에 널리 통용되고 있는 사랑이라는 말이 그분의 사랑을 바르게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교훈: 고린도전서 13장에 자세히 묘사된 사랑의 속성들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하늘 아버지의 품성의 면면들을 인식하게 된다. 우리도 그분의 모습을 닮아가자.


부가적용)

우리의 본성은 이기적인 데 반하여, 사랑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는 희생적인 삶임을 알 수 있다. 사랑이 살아남으려면 희생, 곧 자기희생이라는 먹이가 있어야 한다. 희생이라는 먹이를 먹고 자라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수요일(1월 6일)

사랑의 시금석(마 5:43~48)


도입)

성경은 온갖 갈등을 잠재울 수 있는 강력한 원리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이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은 세리도 하고 이방인들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심판을 주님께 맡기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오른뺨을 치거든 왼뺨을 돌려대는 일이며, 자기를 핍박하고 저주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 지도자와 대통령이 아무리 밉고 싫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증오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세상과 사회 곳곳에 미움과 증오 그리고 적개심이 산재해 있다. 성경은 이 미움과 증오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오직 원수를 사랑하는 큰 사랑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그리고 이 사랑은 사랑의 화신인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아는 것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이며, 서로 사랑하라고 명하신 주님의 명령을 본받아 사랑의 연습을 지속적으로 행한 제자들에 의해 실천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 때문에 주의 제자들은 증오의 사회를 변화시킬 세상의 소금과 빛인 것이다.


1. 마태복음 5:43~48을 읽고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자신의 말로 적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사랑에 관해 하신 말씀의 요점은 무엇입니까?

답:

만일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면, 원수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다. 만약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람만 원수라고 정의한다면 이 본문의 말씀은 나에게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최근에 나의 목숨을 위협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수란 반대자, 적수, 경쟁자, 도전자, 다투는 자 등으로 정의될 수 있다. 원수는 나를 미워하거나 나를 핍박하는 사람이다. 심지어 배우자나 가족들 중에도 원수가 있을 수 있다. 가족이 나를 사랑하기는커녕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기 위해 기회를 엿보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일이 생겼을 때 우리는 보복하려 하거나 옹졸하게 대하기가 쉽다.

때때로 직장에서 다툼을 경험하거나, 수년 동안 함께 일해오던 사람이 나를 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극정성으로 돌보던 사람이 원수로 변할 수 있고, 심지어 교회 안의 어떤 사람도 원수가 될 수 있다.

예수께서 언급하신 원수는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보복하고자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모든 사람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할 필요가 있다.

2. 잠언 15:1, 25:21, 베드로전서 3:9을 읽으십시오. 이 본문들은 사랑에 관한 중요한 원칙을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답:


교훈: 참된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뿐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의 최종적인 시금석이라 할 수 있다.


부가적용)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아이가 밖에 나갔다가 엉엉 울고 들어왔다. 그는 이유를 물어도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울기만 했다. 그 아이는 다음 날 학교에도 갈 수 없을 만큼 아파서 누워있었다. 그러자 이 소식을 들은 학교에서 선생님이 문병을 왔다. 학교 선생님은 그 아이가 무슨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래서 모든 사람을 나가게 하고 그 아이와 단둘이서 이야기를 했다. 그 아이는 선생님과 단 둘이 있게 되자, 자기의 속마음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선생님 저는 이 집 아들이 아닙니다. 동네 어른들이 그러는데 나는 다리 밑에서 주워 온 아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엉엉 울었다. 선생님을 통해서 이 사실을 들은 그 아이의 부모는 "너는 내 아들이 맞다!"고 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그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자 선생님은 그 아이에게 있어서 부모와 가장 닮은 곳이 어디냐? 고 물었다. 그 아버지는 자기 등에 큰 점이 아들에게도 있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선생님은 그 아이와 아버지의 등을 벗기고 둘 다 큰 점이 있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때서야 아이는 부모를 믿고 자리에서 일어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자녀는 부모를 닮는 것을 원하며, 또 자녀는 부모를 닮는 것이 마땅하다. 자녀가 아무 곳도 부모를 닮지 않는다면 이 일은 비극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와 같이 너희도 온전케 되라!"고 하신 이유이다. 주님은 성도들이 원수를 사랑함으로 사랑의 하나님과 같이 온전케 되기를 원하셨다. 기독교인은 창공을 나는 독수리이지 날개가 찢어진 닭이 아니다.


목요일(1월 7일)

행동하는 사랑(눅 10:25~37)


도입)

‘인자를 사랑하라’는 말은 예수님(人子)을 사랑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비(仁慈)를 행하기를 즐겨하라는 뜻이다. 인자(仁慈)는 자비(mercy)를 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자비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예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선포했다. “...학대받는 자를 도와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는 것(사1:17)”이다. 그러므로 자비란 약자 편에 서서 약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다.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균형을 촉구하며 선의 열매가 나타나도록 행동하는 것이 바로 자비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삶을 원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라는 것은 불쌍해서 안됐다고 측은하게 여기는 감정적인 연민이나 동정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진정한 자비란 감정이나 측은지심에 머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도움의 형태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사랑한다면서 그 사랑을 행함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그것은 말뿐인 사랑으로 끝나고 만다. 그럴 때 그 사랑은 의심받게 되며 결코 사랑이라고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된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면서 아무리 말 한마디의 중요성을 강조한다고 할지라도 말로만 하는 사랑은 결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 사랑한다면서 그 사랑을 행동으로 전혀 나타내지 않는다면 상대방이 그것을 어떻게 사랑이라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말로만 하는 사랑이 사랑인가? 주님은 말로만 하는 사랑을 가르치신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그러므로 삶에 균형을 이루려는 모습,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모습, 억울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공평을 기하는 노력 등이 실제로 어떤 도움의 형태가 되어 나타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비를 시행하는 사랑의 삶이 되는 것이다. 자비란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실제적인 도움으로 나타나 시행될 때 비로소 그 가치가 드러나게 되는 덕목이기 때문이다.

어느 신학대학 교수가 좀 특별한 방식으로 설교법 강의를 이끌어 갔다. 그는 모든 학생들로 하여금 선한 사마리아인에 관한 설교를 준비하게 하였다. 매시간 강의실을 옮겨 다니면서 그들로 하여금 사랑과 동정에 대해 설교하게 하였다. 강의와 강의 사이에는 아주 짧은 시간만이 주어졌기 때문에 학생들은 강의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뛰어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이 학생 설교자들은 강의실로 가는 복도에서 걸인과 마주쳐야 했는데, 이 교수가 일부러 배치해 놓은 사람이었다.

그 결과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학생 설교자들 중에 가던 길을 멈추고 그 걸인을 도와 준 사람은 극히 적었는데, 특히 시간에 쫓겨 달려가던 학생들은 더욱 그러하였다.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해 설교하기 위해 달려가는 동안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 비유의 핵심인 걸인을 돕지 않고 지나치고 말았던 것이다!

1. 어제 교과에서 우리는 누가 우리의 원수인가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에 대해 공부해 봅시다. 누가복음 10:25~37에서 예수께서는 누가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이 비유는 참된 사랑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의 대답으로 주어졌습니다. 이 비유를 읽으면서, 왜 예수께서는 특별히 종교 지도자들까지도 ‘나쁜 사람’으로 묘사하셨는지 자문해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까?

답:

다음의 글을 숙고해 보라. “내가 굶주릴 때에 너희는 박애클럽을 만들어 토론했고,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너희는 범죄율의 증가에 대해 불평했으며, 내가 헐벗었을 때에 너희는 나의 모습을 보며 도덕성을 논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너희는 건강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했으며, 내가 거처를 잃었을 때 너희는 하나님의 사랑의 피난처에 대해 설교했더구나. 너희는 너무 거룩하고 하나님과 너무 가까웠으나, 나는 여전히 굶주리고 외롭고 춥고 고통스러웠다. 너희와는 상관없는 일이냐?”


교훈: 사랑은 이론이나 신조가 아니고 몸소 실천하는 행동이어야 한다. 행동이 없이 말로만 하는 사랑은 열매 없이 잎만 무성한 과일나무와 같다.


부가적용)

진짜 사랑이란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신 주님이 교훈 중에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자비’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자비의 백미’를 이루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말로만 하는 사랑과 자비는 결코 진정한 사랑과 자비일 수 없다며 정곡을 찌르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다 빼앗겼다. 뿐만 아니라 강도들에게 뭇매를 맞아 거의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일을 당한 그의 곁을 제사장이 지나게 되었는데 그는 그를 돕지 않고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선별된 족속이라는 어떤 레위인도 그와 똑같이 죽어가는 그의 곁을 그대로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유대인들로부터 차별을 당하며 사는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죽어가는 그를 불쌍히 여겨 응급조치를 한 후 그의 경비를 들여가면서 잘 돌보아 줄 것을 부탁하고 그의 일을 위하여 떠났다. 여기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자비라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불쌍하다고 여기는 마음에서 나오는 연민, 동정심이 겉으로 나타나므로 실제로 돕는 행동이 시행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자비를 행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음”이 곧 “인자(仁慈))를 사랑하는 일”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자비란 약자의 처지를 불쌍하게 여기는 동정이나 감정적인 연민이 그를 실제로 돕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는 것임을 잘 알 수 있다.


금요일(1월 8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과학자인 아서 제이욘스(Arthur Zajonc)는 상자 안을 빛으로 가득 채우고, 그 내부 표면은 그 빛이 전혀 반사되지 않도록 장치하였다. 상자 내부에는 오직 빛만이 있었다. 만일 상자 내부에 있는 빛을 들여다본다면 무엇이 보일까? 오직 빛 자체만 존재하는 그 상태는 어떤 모습일까?

완전한 흑암, 즉 텅 빈 공간에 어둠만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어떤 물체에 반사되지 않는 한 그 빛은 보이지 않는다.

제이종크는 막대기를 상자 안의 어둠 속으로 밀어 넣었다. 옆면으로부터 들어간 그 막대기에 빛이 나기 시작했다. 마치 가는 빛줄기가 그 막대기를 비추는 듯이 보였을 뿐, 상자 내부는 온통 빛으로 가득 차 있었음에도 다른 곳은 전혀 빛나지 않았다. 오직 막대기에서 반사되는 빛만 볼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그 빛은 어둠이었다.

지구로 쏟아지는 태양빛은 날씨와 시간대에 따라 푸른색, 회색, 붉은색 등 여러 색깔로 나타난다. 달에서는 아무리 많은 태양빛이 비쳐도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제이종크의 상자처럼 극히 제한된 빛만이 반사될 뿐이다. 왜냐하면 달에는 태양빛을 반사할 만한 공기나 습기가 없고 가스나 증기가 없기 때문에 화려한 빛깔을 낼 수 없는 것이다. 요점은 무엇인가? 반사하는 물체가 없다면 빛은 완전한 어둠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빛의 속성에 관한 위의 글을 읽고 무엇을 느꼈습니까? 우리는 이 글에서 어떤 영적 교훈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까?(참조 요일 1:5, 2:9~11, 4:8, 눅 11:35)

2. 원수를 사랑하는 것에 관해 좀 더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께서는 원수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눅 23:34). 원수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그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옵니까? 어떻게 하면 원수에 대해 저주하는 대신 기도하는 태도를 배양할 수 있을까요?

3.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은 무엇이며,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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