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과 빛 가운데 행함: 죄로부터 돌이킴(7/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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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8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5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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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절: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연구범위: 요 3:19, 8:12, 롬 3:10~20, 딤전 1:15, 요일 1:5~2:2.
학습 포인트: 성경에서 하나님을 '빛'이라 칭할 때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요한은 요한일서 앞부분에서 죄의 실체에 관한 어떤 오류를 교정하고자 했는가? 요한은 우리의 삶에 뿌리박은 죄에 대한 치료제로 어떤 약속을 제시했는가? 우리에게는 왜 그러한 약속들이 필요한가?
안식일 오후
1892년에 아주 독특한 현대 예술작품 하나가 전시되었다. 그것은 의자를 향하여 한 자루의 엽총이 고정되어 있는 작품이었다. 그 작품은 그 의자에 앉아서만 감상할 수 있었는데, 직접 그 총알을 들여다보도록 장치되어 있었다. 문제는 그 총이 실제로 장전되어 있었고, 100년 안에 어떤 미정된 순간에 발사되도록 타이머가 맞추어져 있었던 것이다. 놀랍게도 사람들은 언제든지 총이 발사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의자에 앉아 총구를 들여다보기 위해 길게 줄을 섰던 것이다.
운명의 유혹이란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들은 아무런 해를 입지 않고 언제든지 피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면서 죄를 향해 다가간다. 그러나 그 엽총과는 달리 죄는 단호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우리를 죽이고 말 것이다.
이번 주에 요한이 말한 죄의 문제와 예수님 안에서의 해결책에 대해 살펴보자.
핵심본문: 요일 1:8-10
학습 목표
깨닫기: 예수님을 죄에 대한 유일의 해결책으로 받아들인다.
느끼기: 값없이 베풀어 주신 용서에 감사드린다.
행하기: 우리의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함으로써 은혜에 반응한다.
교과 개요
I. 깨닫기: 예수님은 죄의 유일한 해결자이심
A. 요한이 지적한 최고의 자기기만은 무엇인가?(요일 1:8)
B. 요한일서 2장에서 파라클레이토스를 대언자라고 번역했는데, 대언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우리의 대언자라는 사실을 아는 것은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C. 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II. 느끼기: 자유로의 열쇠
A. 어두운 방의 문틈으로 한 줄기의 빛이 들어오는 것을 본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는가? 용서를 경험할 때 어떤 느낌이 드는가?
B. 용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감사의 정신으로 충만하게 되는 비결은 무엇인가?
III. 행하기: 빛 가운데 행함
A.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죄를 자백하고 용서를 구해야 하는가?
B. 우리로 하여금 죄의 심각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인가? 우리의 눈을 열기 위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가?
C. 어떻게 하면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가?
요점: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자는 예수님이시다. 만일 우리가 기꺼이 죄를 자백하면 그분은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또한 용서하기를 기뻐하신다.
일요일(7월 12일) 빛 (요일 1:5)
1. 요한일서 1:5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은 빛이시라"고 한 요한의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결국 빛은 하나의 물리적인 현상이며 포톤(photon)으로 된 에너지의 한 형태가 아닙니까? 요한이 말하고자 한 요점은 무엇입니까?(참조, 시 27:1, 36:9, 마 4:16, 요 3:19, 8:12, 12:46, 딤전 6:16)
요일1: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시27: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시36:9 대저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광명 중에 우리가 광명을 보리이다.
마4: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요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요8:12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12:46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로라.
딤전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답: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물리적 빛을 발하시는 분이기도 하지만,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어둠으로 표상된 사망의 세력이 주장하는 이 세상에 생명으로 임하셔서 세상에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천명하고 있다.
빛은 예수님과 성부 하나님을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다. 빛은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분을 구원의 주님으로 나타낸다. 빛은 또한 진리와 계시의 개념을 상징한다. 그리고 특히 앞뒤 문맥에서 볼 수 있듯이, 그분의 의와 거룩함과 완전을 드러내준다.(참조 요일 2:9)
2. 요한은 왜 하나님이 "빛"이시라고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아니하고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고 덧붙였습니까?
답: 요한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강조하기 위해 그분께는 죄와 불의가 전혀 없음을 말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은 사망과 전혀 관계없는 분임을 지적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도는 이 말을 덧붙임으로써 하나님의 완전하심과 죄로부터 분리되어 계심을 더욱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그분은 미덕과 악덕을 함께 지니고 있던 헬라나 로마의 신들과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참으로 거룩하시고 선하시며 의로우신 분이시다. 빛이 어두움의 반대이듯이, 그분은 어떤 의미에서 죄와 반대되는 분이시다.
한편 요한이 어두움을 언급한 것은 그 다음의 내용을 위한 하나의 새로운 요소를 소개한 것이었다. 죄로 기우는 타락한 존재인 인간은 본성적으로 빛의 영역에 있기보다는 어두움에 속해 있다. 하나님이 빛이시라면 우리는 어두움이고,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으며, 특히 거룩함과 의로움이라는 면에서 그 차이는 대단히 크다 할 수 있다.
빛이신 예수님을 닮아감
“예수님께서는 빛이시며, 그분 안에는 어두움이 전혀 없다. 그분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들이다. 그들은 그분의 형상으로 새롭게 되며, 어두움에서 나와 그분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도록 부르심을 입었다. 그분은 세상의 빛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자들도 역시 그러하다. 그들은 어둠 가운데 거할 것이 아니라 생명의 빛을 지녀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리스도를 닮기 위하여 더욱 열심히 애쓸수록 사단의 더욱 집요한 추적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므로 그리스도로부터 그들을 떼어 내고자 애쓰는 간교한 원수의 노력을 저항할 수 있는 능력을 받는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5권 1136)
<부가설명> 요한은 복음서 1:4에 빛은 생명이라고 해석하였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1:4) 하나님이 빛이요 예수님이 빛이라는 것은 그분이 생명이라는 뜻이다. 생명을 잃으면 실제적인 빛들이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한다. 죽은 사람에게는 햇빛이 빛이 아니다. 그래서 사망은 어둠인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고 예수님에게 어둠의 권세가 이길 수 없다. 즉 사망이 그분들에게 아무런 작용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 안에 있으면 우리도 빛이다. 그것은 곧 예수의 생명이 우리의 생명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 사망의 세상에 생명의 빛의 선전자들이 되는 것이다. 빛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렇게 아름다워야 한다. 빛이기 때문이다.
교훈: 하나님은 빛이시며 어두움과 구별된 분이시다. 그러나 죄로 기우는 성향을 지닌 타락한 인간은 어두움에 속해 있다. 그분과 우리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월요일(7월 13일) 죄의 문제 (요일 1:6, 8, 10)
요한일서 1:6~10은 하나의 단락을 이룬다. 요한은 하나님의 속성에 관해 진술한 다음, 신자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이설들에 대해 다루었다. 그는 이러한 이설들을 강하게 비평했다.
이 다섯 절은 "만일 우리가"라는 같은 표현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이 구절들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음을 보게 된다.
1. 요한은 6, 8, 10절에서 어떤 거짓말들에 대해 언급하였으며, 그것들 사이에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요일1:6,8,10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두운 가운데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치 아니함이거니와/ 8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10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
답: 요한일서 1:6, 8, 10에는 각각 빛 가운데 행하지 아니하고 죄를 짓는 사람들이 어떻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를 기록하고 있다.
요한은 먼저 하나님과의 사귐에 관해 언급하였다(6절). 어떤 이들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어두움 속에 행하고 있었다. 이는 그들이 참으로 하나님과 함께 하고 있지 않음을 의미했다.
이와 반대로, 빛 가운데 행하는 자는 참된 사귐을 갖는다(7절). 그렇게 하는 자들은 죄로부터 깨끗케 되었다. 그러므로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자는 죄 가운데 행하는 자이다. 따라서 요한의 말처럼, 죄 가운데 살면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8절과 10절에 나오는 나머지 두 가지 주장들도 죄와 관련이 있다. 비록 요한이 죄의 행실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그는 우리 삶에 있는 죄의 실체에 대해서도 매우 분명한 태도를 취한다. 8절에서 그는 그리스도교의 기본적인 교리와 반대되는 가르침인, 인간에게 죄의 성향이 없다고 하는 이설에 대해 다루고 있다.
2. 10절에 나오는 요한의 선언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는 말 속에는 무엇이 내포되어 있습니까?
답: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죄하였으므로 구주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 1:10) 이렇게 말하는 것은 구주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다.
이 구절들의 점층적인 강조를 주목해 보라. 6절에서 사람들은 거짓말을 했고, 8절에서 그들은 스스로를 속였으며, 10절에서 그들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들었다. 요한은 인류가 처한 죄 문제의 실체와 그 심각성을 분명히 이해하고 있었다.
"죄는 불법이라"
“죄에 대한 유일한 정의는 '죄는 불법이라'는 것이다. 율법이 없으면 범함도 있을 수 없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 의의 표준은 아주 광범위한 것이요, 모든 악한 것들을 금하는 것이다. … 단 한 계명을 범했거나 가장 작은 세목 하나를 범해도 율법을 범하는 것은 죄다. 그리고 하나님의 정부 측 입장에서는 그 죄의 형벌을 집행하지 않는 것이 죄가 될 것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7권, 951)
<부가설명> 죄는 불법이라는 정의를 유일한 정의라고 말한 예언의 신의 증언은 법이 없으면 범함이 없다는 말씀에 의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법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그분만이 입법자이시기 때문이다.(약4:12) 이런 사실에 의하여 이해하면 하나님 자신이 법이라고 할 수 있다. 불법은 곧 하나님을 반역하는 것이다. 죄가 불법이라고 정의했을 때 문자로 발표된 십계명을 범했다는 단순한 의미 이상의 사실이 있는 것이다.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는 것은 그의 생명과 존재를 상실하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이 해 놓으신 일을 완전히 망치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주께 죄요 자기 존재를 상실하는 것이다. 이렇게 상실하게 된 것을 당상 상실하도록 하지 않으시고 일정기간 동안 생존을 허락하셔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는데, 그 기간 동안 생존하는 사람을 죄인이라고 한다. 그것은 존재를 상실하게 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망의 권세 아래 있다고 가르친다. 사망의 권세 아래 있는 사망을 할 사람들은 사망의 성질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것을 성경은 썩어짐의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롬8:21). 이런 사람들은 썩어져가는 구습을 좇는 사람들이다(엡4:22). 이 썩어져가는 사실을 죄로 기울어지는 성향이라는 말로 표현하는데, 사실은 기울어지는 성향이기보다는 썩어져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사망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계시를 정시하는 안목이 필요하다.
교훈: 요한은 인간이 처해 있는 죄 문제의 심각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죄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에 대해 강한 어조로 질책하였다.
화요일(7월 14일) 죄 문제에 대한 반응들(요일 1:7, 9, 2:2)
여기서 요한은 분명히 죄의 심각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그는 죄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가? 요한일서 3:4에서 그는 죄를 불법이라고 했고, 5:17에서는 그릇된 행위 또는 불의라고 하였다. 그것은 바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죄는 또한 진리와 반대이므로 죄를 범한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며, 그 멀어짐의 결과로 영적 죽음에 이른다. 죄가 단수(單數)로 쓰일 때는 죄인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가리키며, 복수(複數)로 쓰일 때는 죄악적인 행동을 가리킨다. 어찌 되었든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죄는 실제적이며 대처하지 않으면 위험하다는 것이다.
1. 요한일서 1:7, 9에는 죄 문제의 해결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이 담겨 있습니다. 그 약속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그것이 우리 삶에 실제적인 체험으로 와 닿을 수 있을까요?
요일1:7,9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답: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할 때 주님의 피가 우리를 깨끗하게 하며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고백하면 용서를 받는다.
용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가능해졌다. 우리는 율법을 범했으므로 죽어 마땅했으나 그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영원한 정죄에서 자유케 되고 모든 죄에서 깨끗케 되었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는 죄에 대한 자백이 필요하다. 요한일서 1:9에 나오는 '자백'이라는 용어는 스스로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죄를 누구에게 자백해야 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 자백해야 할 것이 암시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그 다음 구절에서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실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죄의 자백에는 그 죄로 인해 상처 입은 사람들 앞에서 하는 공개적인 자백도 포함된다. 그렇다 하더라도 죄의 용서는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요한일서 1:9에는 명령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먼저 자신의 죄들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아야만 그분께서 용서하시고 우리를 정결케 하실 수 있다. 죄 지은 우리는 유죄이므로 용서를 받을 필요가 있으며, 죄 지은 우리는 불결하므로 정결케 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위하여 이 두 가지 길을 마련해 놓으셨다.
죄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할 때
“우리가 세상의 축복을 위하여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지체될 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구하는 것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도 있으나 우리가 죄로부터의 구원을 간구할 때에는 그렇지 않다. 우리를 죄에서 깨끗케 하셔서 그의 자녀로 삼으시고 거룩한 생애를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 그의 뜻이다.”(시대의 소망, 266)
<부가설명> 사람들은 예외 없이 태어나면서 이미 죄인이 되어 있다고 성경은 계시한다.(롬3:23)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5:12) 여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라는 말씀은 시제가 과거이다. 모든 사람이 과거에 이미 죄를 지었다. “모든 사람”은 바울 당시의 살던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아담 이후 세상 마지막에 태어날 사람까지 포함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미래에 태어날 사람도 이미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 얼마나 억울한 말인가? 이게 무슨 뜻인가? 원죄를 뜻하는 말인가? 원죄라는 말은 성경에 없고 우리교회에서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냥 죄로 기우는 성향을 타고 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표현은 참으로 애매한 표현이다. 죄로 기우는 성향을 타고 났지만 죄를 선택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죄인이 되지 않는다는 암시가 숨어 있는 표현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죄로 기우는 성향을 가진 인성을 타고 났으나 그분은 결코 죄를 선택하지 않고 죄를 행동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밑바탕이 되는 사상이다. 그래서 예수님과 똑 같이 우리도 죄로 기우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나 예수님처럼 죄를 선택하지 않고 죄를 행동하지 않으면 죄인이 아니고 완전하게 된다는 논리를 전개하도록 한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성경과 전혀 일치하지 않는 논리이다. 성경은 이미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죄를 지었다고 한다. 그것은 도덕적으로 나쁜 짓을 했다는 뜻이 아니다. 죄로 기우는 성향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도덕적으로 나쁜 짓을 하도록 하는 성향이라는 의미가 있는 표현이 아닌가. 사람이 도덕적으로 나쁜 짓을 하도록 하는 성향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만일 그런 성향이 없고 그래서 도덕적으로 결코 한 오리의 죄도 짓지 않으면 죄인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 그렇다 해도 그는 죄인이다. 도덕적 안목으로는 죄인이기는커녕 성인이요 의인일는지 모르지만 그가 죽는 존재라면 죄인인 것이다. 죄는 사망이 해결되지 않은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아담의 후손을 태어난 사람들은 다 아담 안에서 사망의 존재로 태어난다. 그래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이다. 그가 도덕적으로 아무리 선과 의를 행해도 그는 죄인이다. 사망을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를 시인하는 것은 사망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아담 안에서 죽은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고, 그래서 일상생활에 죽은 상태가 나타나는 썩은 현상을 결코 면할 수 없음을 고백하면 주께서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시고 그 생명으로 살 수 있도록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죄의 용서와 깨끗하게 하심이다. 그리고 생명으로 옮겨진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동안 세상이 우리를 죄의 상처를 입게 할 때 즉시 즉시 주님 앞에 나아가 치료받아야 하고 발을 씻겨주시도록 발을 내밀어야 한다. 어린양의 피로 날마다 그 옷을 씻어 희게 해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승리하는 삶이다. 만일 도덕적으로나 율법적으로 죄를 짓지 않고 하루를 잘 살았다고 해도 그 잘 한것도 예수님의 보혈로 씻김을 받아야 한다. 보혈을 통과하지 않은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 앞에 선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매일 상번제가 필요한 사람들이다.
교훈: 죄인은 죄를 자백하고 예수님의 대속적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든지 끝까지 죄를 품고 영원한 죽음을 맛보든지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수요일(7월 15일) 그리스도인들의 목표 (요일 2:1)
1. 요한일서 2:1에서 요한은 우리에게 죄 짓지 말라고 호소합니다. 우리는 이 권면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요일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치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답: 요한은 그 서신의 수신인들에게 완벽하게 무죄한 삶의 가능성을 제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어떤 죄든지 용납하지 말고 죄를 멀리하라고 호소하였다.
여기 주어진 죄 짓지 말라는 호소는, 하나님은 빛이시라는 진술과 함께 소개된 '빛 가운데 행하라'는 말씀의 문맥에서 이해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그분과 더불어 사귐을 갖기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빛 가운데 행해야 하며, 결국 죄를 버려야 한다.(요일 2:1)
요한은 자상하고 친절하게 신자들을 '자녀들아'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에게 그 서신을 쓴 한 가지 이유를 밝혔다. 즉 그들의 삶에 어떤 죄든지 용납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 말은 그가 완벽하게 무죄한 생활의 가능성을 제안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명백한 죄의 행위를 멀리 하도록 간곡히 호소한 것이었다.
2. 요한은 왜 죄를 짓지 말라는 권면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이라는 구절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습니까?(참조 왕상 8:46, 롬 3:10~20, 딤전 1:15)
왕상8:46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저희가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저희에게 진노하사 저희를 적국에게 붙이시매 적국이 저희를 사로잡아 원근을 물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롬3:10-20 기록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11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12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13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14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15 그 발은 피 흘리는 데 빠른지라 16 파멸과 고생이 그 길에 있어 17 평강의 길을 알지 못하였고 18 저희 눈 앞에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 20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딤전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답: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나 한편 우리는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으므로 실족하였을 때 좌절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중보자이신 예수님을 통해 다시 일어나야 한다.
여기에 나오는 죄 문제에 관한 언급을 어떤 이들은, "죄 없다고 주장하지 말라. 너는 어쨌든 죄인이다. 그러므로 죄에 빠질 것을 두려워 말고 네 마음대로 살아라."는 의미로 오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요한은 죄에 대한 그의 주장에 균형을 유지할 필요를 느끼고 요한일서 2:1을 언급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죄인임을 인정해야 하지만 한편 죄 없는 삶을 살기 위해 힘써야 한다.
동시에 요한은 죄 없는 완전을 주장하는 완전주의를 지지하기를 원치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죄를 짓지 말라는 권면과 함께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요일 2:1)라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삶 속에 있는 죄의 실체를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심지어 헌신적이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도 죄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위한 중보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신자 앞에는 그리스도와 같이 될 가능성 즉 율법의 모든 원칙에 순종할 수 있게 되는 놀라운 가능성이 제시되어 있다. 사람은 스스로는 전혀 이러한 상태에 도달할 수 없다.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기 전에 가져야 한다고 하나님의 말씀에 선언된 성결은 그가 진리의 성령의 훈련과 제어하시는 감화에 복종할 때에 일어나는 거룩한 은혜의 역사의 결과이다. 사람의 순종은 모든 순종의 행위를 하나님의 향기로 채우는 그리스도의 의의 향(香) 에 의하여서만 완전하게 될 수 있다.”(사도행적, 531)
<부가설명> 그리스도인이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긴 사람들을 뜻하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을 뜻하는 이름이다. 그들은 이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는 사람들이다.(롬6:4) 그들은 썩어야 할 필요도 없고 썩어짐의 종노릇을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새 생명이 주장하는 삶을 산다. 만일 그가 참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죄를 짓는가? 그것은 악한 세력이 우리를 쉬지 않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우리 지체가운데 있는 죄의 법은 이런 공격에 쉽게 반응한다.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란, 예수 안에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기 전에 아담 안에서 죽은 상태로 있을 때 경험한 모든 경험의 흔적들이다. 쉬운 예를 든다면 담배를 피워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을 받지 않는다. 그들에게 담배를 피우라고 강요하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러나 담배를 많이 피운 사람들은 담배 연기만 맡아도 담배를 피우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다고 한다. 담배 피운 경험 그것은 지체 가운데 있는 죄의 법이다.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극복해야 한다. 영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롬8:13) 세상이 죄로 가득하다. 사망의 썩는 것이 충일하고 악의 세력은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계속 불화살을 쏘아댄다. 믿음의 방패로 그것을 잘 막아야 하지만 만일 화살이 살에 꽃이면 속히 빼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것이 발 씻는 회개이다. 주님은 어제나 치료해주신다. 이미 목욕한 자도 발은 씻어야 한다. 만일 이런 상처를 전혀 입지 않아도 보혈로 씻어야 한다. 예수의 보혈을 통과하지 않은 선행은 하나님 앞에는 선행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더러운 옷과 같을 뿐이다.(사64:6)
교훈: 그리스도인들의 첫 번째 목표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든지 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에 또한 중보자가 필요한 것이다.
목요일(7월 16일) 그리스도인들의 위안 (요일 2:1~2)
요한일서 2:1~2에는 회개한 죄인들을 위로하고 그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놀라운 진술이 담겨 있다. 죄의 그 무서운 결과에도 불구하고 해결책은 있다. 요한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죄의 용서라는 주제로 다시 돌아와, 예수님을 통해서만 그것이 가능함을 말한다.
그 일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첫째, 그분은 우리의 대언자이시며, 우리의 중보자이시다. 이 대언자는 의로우신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일서 1:9에서 의로움은 성부 하나님의 속성으로 나타나 있고, 2:1에서는 성자 하나님의 속성으로 나타나 있는데,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의 의로우신 속성 때문이다.
둘째, 예수께서 당신의 희생적 죽음을 통해 화목 또는 속죄를 가져 오셨으므로 우리의 용서는 보장되었다. 이것은 그분께서 우리 죄의 형벌을 갚으셨음을 의미한다. 우리가 결코 갚을 수 없었던 빚을 그분께서 우리를 위해 갚아 주셨다.
그러므로 요한은 예수님을 화목제물과 중보자로 묘사한다. 신약의 증언에 따르면, 그분은 우리 가운데서 죄 없는 생애를 사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며,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시고, 승천하셔서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요한일서 2장에서 대언자로 번역된 파라클레이토스(parakletos)는 보혜사, 위로자, 조력자, 중보자, 대언자 등 여러 말로 번역되었다(참조 요 14:16, 26, 15:26, 16:7, 요일 2:1). 누군가의 곁에서 그 사람을 돕도록 부르심을 받은 파라클레이토스가 요한복음에서는 성령님을 가리키고 요한일서(2:1)에서는 예수님을 지칭한다.
예수님을 가리켜 중보자, 혹은 우리 죄의 용서를 제공하는 분으로 생각하고 큰 위안을 얻을 때에 주의할 점이 있다. 즉, 성부 하나님은 인색하고 가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과 우리 사이에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인상을 갖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이렇게 묘사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시다(요 3:16). 또한 몇 절 앞에서 그분은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사하시고 깨끗케 하시는 분으로 소개되었다(요일 1:9). 예수님을 성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시는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유일한 대언자 그리스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대언자로서 중보하실 때에 그리스도는 인간의 공로나 인간의 중보가 필요치 않으시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하신 죄의 담당자시요, 유일하신 속죄 제물이시다. 기도와 고백은 단번에 모든 사람을 위하여 성소 안으로 들어가신 그분에게만 드려져야만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라고 하셨다. 그분은 믿음으로 그분께 나아오는 모든 사람을 끝까지 구원하실 것이다. 그가 항상 살아서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신다. 이것은 로마교의 거짓 교리 중 하나인 미사를 아무 소용이 없게 한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7권, 912)
<부가설명> 성부 하나님은 인간이 사망을 집행하셔야 하는 분이시다. 법능 시행되지 않으면 조롱거리가 된다. 사단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결코 시행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만일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그 말씀은 웃음거리가 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시행하셔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말씀도 이루어져야 한다. 이 두 말씀을 동시에 이루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자신밖에 없다. 그래서 창조주이신 주님이 사람 되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아담이 죽어야 하는 그 죽음을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증명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앞에 정녕 죽으리라고 선고한 그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증명하셨다. 그리고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이 바로 이 성취된 사실을 시인하고 받아들였기 때문에 이제는 생명으로 영생할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법이 시행된 사실을 이정하시고 예수를 믿는 모든 사람들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다. 성부는 입법자와 재판자로서 그 직무를 수행하시되 예수의 희생을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삼위일체가 사랑으로 하시는 일이다. 아버지는 그렇게 되도록 하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얼마나 큰 사랑인가. 세상에도 법에 절차가 있듯이 하늘의 법에도 절차가 있는 것이며 그 절차를 시행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생을 얻었으며 그 얻은 생명으로 날마다 살아야 하고 그래도 악한자의 공격에 상할 때 주님 앞에 속히 나아가서 고백하면 주님은 그의 피를 뿌리시며 우리가 여전히 깨끗하다고 하신다.(히12:24)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는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3:30)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8:34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롬8:33,34)
교훈: 예수님은 우리를 돕는 대언자와 중보자이시다. 또한 성부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우리의 구원을 갈망하시는 분이시다.
금요일(7월 17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독서 과제: 정로의 계단, 제4장 '자복'(37~41)
“하나님께 은혜를 얻는 조건은 단순하고 합리적이다. 주께서는 용서를 받기 위하여 어떤 괴로운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하늘의 하나님께 의탁하고 우리의 범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길고 지루한 순례를 하거나 고통스러운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그리스도께서 하늘 법정에서 당신의 교회 곧 당신께서 보혈로 속전을 지불하신 이들을 위하여 탄원하고 계신다. 여러 세기나 시대가 흐를지라도 그분의 속죄 희생의 효력은 감소될 수 없다. 생명이나 사망이나 높음이나 깊음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매우 단단히 붙잡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매우 단단히 붙잡으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구원이 우리 자신들의 노력에 달려 있다면 우리는 구원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모든 약속의 배후에 계신 분에게 의존되어 있다.”(사도행적, 552-553)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어둠'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어둠의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빛 가운데서 행한다는 의미를 이해하는 데 어떤 도움을 줍니까?
* 이 죄의 세상에서 어둠은 빛의 반대 상태이다. 그것은 사망이며 썩어져가는 것을 뜻한다. 빛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새 생명으로 살아간다는 것이며 그 생명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2. 죄의 짐에 눌려서 하나님을 완전히 포기하려는 상태에 이른 이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까요? 어떤 약속과 용기를 줄 수 있을까요? 성경에서 흉악한 죄를 지었으나 용서받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용서의 복음의 뜻을 올바르게 이해하도록 가르칠 필요가 있다.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필요한 것을 깨닫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십자가의 한 강도가 그 예가 될 것이다.
3. 어떤 사람이 비그리스도인 일가족을 살해하였는데, 몇 년 후에 그 살인자가 자신의 임종의 자리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로 영접했다고 합시다. 만일 유족들이, "당신들의 교리에 따르면, 우리 유족들은 멸망당하고 저 살인자는 천국에 간다는 말입니까? 맞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 유족들이 멸망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들도 예수를 받아들이고 믿으면 영생을 얻는다. 이미 살해당한 사람에 대하여서는 우리가 어떤 보장의 말을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인도 억울하다고 호소할 수 있는 처리를 결코 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영적으로 새롭게 깨달은 내용이나 한 주일 동안 실천하고 싶은 일은 무엇입니까?
* 죄의 실상에 대하여 자세히 알게 된 것 같다. 그러나 예수 안에서 해결된 사실이 더 명백하다. 새 생명 가운데서 날마다 행하며 그것도 보혈로 날마다 씻은 경험으로 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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