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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죄(죄의 문제에 대한 이해와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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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05.04 11:55 조회수 4,5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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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과  죄

5월 9일 안식일 (일몰: 오후 7시 29분)


도입)

플라톤의 제자인 토토킬러스는 바다에 배를 띄워서 놀기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한 번은 배를 타고 바닷에 가서 놀다가 갑자기 풍랑을 만나서 배가 다 깨어져 죽을 뻔 하고 겨우 살아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의 집은 바로 바닷가에 있었는데 이 사고 이후로 바닷가로 향하는 창을 다 막아놓았다. 어떤 친구가 와서 “이 좋은 바다의 경치를 내다 볼 수 있는 이 창들을 왜 이렇게 다 막았느냐?고 묻자, 이 사람이 하는 말이 ”내가 지난번 배를 타고 나갔다가 꼭 죽을 뻔하고 살아왔는데 다시는 배타지 않기로 결심을 했지만 이 창을 그냥 두었다가 어떤 따듯한 봄날 바다가 잔잔할 때에 이 창을 내다보며 내 마음 속에 또 바다로 나갈 생각이 나서 배를 타게되면 어떻게 될지 몰라서 아예 바다가 보이는 이 창을 막은 것이다“라고 했다. 사람마다 유혹의 창이 있다. 사람마다 마음을 시험하는 창이 있다. 이 창을 내다보면 우리가 언제 시험에 빠질는지 알수가 없다. 이 약점, 시험의 창을 미리 알어서 아예 그 방면을 단단히 막아버리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동안 창문을 열지 않았더니 거미줄이 군데군데 보였다. 빗자루를 사용하여 거미줄을 거두고 청소를 하였다. 그런 후 며칠이 지나서 보니 거기에 또 거미줄이 생겼다. 이번에는 거미줄을 치울 것이 아니라 거미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이 들어 창문에 납작 엎드린 거미를 제거하니 거미줄이 생기지 않았다. 우리는 지극히 간단한 진리를 잘 모르고 지나칠 때가 많다. 근본적인 것을 치료하지 않으면 언제가 또 다른 죄가 들어올 수 있는 통로는 열려 있는 것이다.


기억절: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롬 5:18)


연구범위: 사 14:12-14, 마 23:23, 25:45, 빌 2:6-8, 히 1:1-5, 계5:9-12.


중심 사상: 죄와 그 결과는 인간의 삶에 부인할 수 없는 고통스런 현실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를 위해 피할 길을 마련해 주신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리자.


안식일 오후

세상만사가 점점 더 좋아질 것이라고 확신했던 이전 세대의 낙천주의는 더 이상 받아들여질 수 없게 되었다. 냉전 이후에 세계는 더 이상 안전한 곳이 되지 못하고 있다. 테러의 위협은 우리 모두를 불안에 떨게 하고 있으며,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 주리라고 기대했던 과학은 황폐화될 세상을 우리에게 예견해 주고 있다. 에너지원은 고갈되어 가고 있으며, 만년설은 녹아내리고 있다. 도처에서 발생하는 범죄는 삶의 슬픈 현실이 된 지 오래다. 지난 세기들 동안 인류는 도덕적 향상의 징후를 거의 보지 못했다. 빈부의 격차는 날로 심화되고 있으며, 흉악하고 퇴폐적인 소식은 매일 뉴스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누군가 말했듯이,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하다는 교리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가르침이 되고 말았다.

비록 죄가 심각하기는 하지만 그것으로 끝은 아니다. 아무리 죄가 세상에 팽배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풍성하기 때문이다.


일요일(5월 3일)

죄는 반역임(요일 3:4)


도입)

인간 죄의 기원은 인간의 자기 교만과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에 그 원인이 있다. 죄라는 말의 헬라어 '하마르티아'는 '과녁에서 벗어난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 쏜 화살이 과녁을 벗어났다면 그 원인은 원래 조준을 잘못했기 때문이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서 돈이나 쾌락이나 명예 등 다른 것을 섬기고 만족하는 삶 결국 자신을 위한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죄인이 된 것이다. 죄의 원초적인 본질은 하나님을 모르는데서 시작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법을 알지 못한다. 인간이 짓는 모든 죄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의 본질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이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의 생각과 행동을 영적 스크린으로 비추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양심을 속이는 사람이다. 인간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죄는 하나님을 벗어나려는 데서부터 시작된 반역이기 때문이다.


죄의 본질은 무엇인가? 성경은 죄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가? 요한일서 3:4은,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인간이 깨뜨린 다른 어떤 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가리킨다. 인간은 조물주를 거역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에 겸손히 굴복하고 신뢰하는 대신, 주제넘게도 스스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1. 다음 구절들은 죄의 본질에 관해 무엇을 밝혀줍니까?(창 3:1-7, 사 14:12-14, 계 12:7-9)

답: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왜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문제를 가지고 아담과 하와에게 벌을 내리셨는가?'하고 생각한다. 하지만 비록 그것이 중요해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원칙이 포함되어 있었다. “과일 그 자체에는 아무런 독소가 없었다. 죄는 식욕의 방종 때문만이 아니었다. 우리의 시조를 죄인으로 만들고 이 세상에 악에 관한 지식을 가져 온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의심, 그분의 말씀에 대한 불신, 그리고 그분의 권위에 대한 도전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 때문에 모든 종류의 거짓과 오류의 문이 열린 것이다.”(교육, 25)


2.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백성이 가지는 주요한 특징은 무엇이며, 여기서 순종의 문제는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합니까?(계 14:12)

답: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무한한 사랑으로써 행하실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셨다. 그에 대한 보답으로 우리는 그분께 사랑과 순종을 바친다. 세상은 불법으로 가득하고, 사람들은 상황과 기호에 따라 선과 악을 분별하는 상대주의적 사고가 팽배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거룩한 표준인 십계명을 담대히 옹호해야 한다.


교훈: 죄는 불법이며, 마지막 때가 가까울수록 불법이 성행할 것이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계명을 옹호하기 위해 담대히 일어서야 한다.


부가적용)

“악인이 많아지면 죄도 많아지나니 의인은 그들의 망함을 보리라”(잠 29:16) 신약성경에 죄를 표현하는 용어가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오페일레마’(opheilema)는 빚진다는 뜻이다. 둘째 ‘하마르티아’(hamartia)는 ‘과녁을 맞추지 못했다’라는 의미이며, 셋째 ‘파랍토마’(paratoma)는 ‘미끄러진다’는 뜻이고 넷째 ‘파라바시스(parabasis)는 ’선을 넘어간다‘는 뜻이다. 끝으로 ’아노미아‘(anomia)는 불법이라는 뜻이다. 결국 죄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올바른 관계를 맺지 못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악인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악인은 죄를 많이 짓는다. 죄의 열매는 죽음이다. 죄를 많이 지으면 나중에는 죄가 그 사람을 죽여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악인의 득세는 영원할 것 같아도 잠시일 뿐이고, 심판의 날에 악인들은 죽음과 멸망을 당하고 말게 될 것이다. 무신론은 단순히 어리석은 사상일 뿐 아니라 가장 큰 죄악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품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없다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선언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선언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무슨 범죄든 가능한 것이다. 죄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모두 사라지게 된다. 그래서 성경은 무신론적 죄악이라 말한다. 한 기독교 심리학자는 무신론자를 이렇게 정의했다. “무신론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기 안에 각인되어 있는 하나님 의식을 지워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다.”라고 했다. 우리 안에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지워보려고 애를 쓰는 사람, 그것이 무신론자의 정체성이라는 말이다.


월요일(5월 4일)

표적에서 빗나감(롬 8:6)


도입)

죄란 신약성경에서의 헬라어로 ‘하말티아’이다. 이는 활을 쏠 때 화살이 과녁에서 ‘빗나가다’라는 뜻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가는 행동을 함으로 자기중심이 되어 이기주의에 근본을 둔 자범죄들이 무성하게 돋아나게 하였다. 자범죄는 원죄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담에게서 한 번 빗나간 순종과 믿음의 화살은 마치 혈관을 타고 흐르면서 이곳저곳에 나쁜 세포를 증식시키는 암처럼 우리 일상생활 속에 크고 작은 죄를 심어주었다. 원죄와 자범죄는 단순한 윤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움직이는 사탄 그 자체이다. 죄가 있는 곳엔 언제나 사탄이 있고 사탄이 있는 곳엔 언제나 죄가 있다.


죄의 심각성이 간과될 때가 종종 있다. "어차피 우리는 완전할 수 없잖아?"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죄는 심각한 것이다. "죄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가 얼마나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있었는지를 이해할 때에만 분명히 깨달을 수 있다."(존 맥퀘리, 크리스천 신학의 원칙들, SCM 출판사, 1966년, 238)

죄는 단지 그릇된 행동을 저지르는 것뿐 아니라, 우리가 잘못된 것인 줄 알면서도 열망하거나 상상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마 5:28).


1. 지난 24시간 동안 무엇에 대하여 공상(空想)에 잠겼습니까? 만일 그 생각이 공개된다면 부끄럽지는 않을까요? 내가 공상했던 내용은 내 마음이 어디에 있었음을 말해 줍니까?(참조 롬 8:6)

답:

죄의 종류 가운데 '태만의 죄'로 불리는 것이 있다. 이것은 고의로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을 말하는데, 자신이 해야 할 일임을 알면서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2. 마태복음 23:23과 25:45에 예수께서도 태만의 죄에 대해 언급하셨습니다. 문맥을 고려하면서 이 구절들을 읽어 보십시오. 이 말씀 속에 내포된 의미는 무엇입니까?

답:


3.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에서 달란트를 감추어두었던 종은 어떻게 태만의 죄를 범하였습니까?

답:

우리 모두는 달란트를 받았다. 그리고 그 달란트를 최대한 지혜롭게 활용해야 할 청지기 직분을 받았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하신 일을 이행하는 데 실패한다면 우리는 답변해야 한다. 사도 베드로가 한 다음의 말을 기억하자.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벧전 4:10)


교훈: 죄는 표적에서 빗나간 것을 말한다. 죄의 결과는 참으로 심각하다. 그 중에서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한 '태만의 죄' 또한 하나님 앞에 회개하여야 한다.


부가적용)

처음사람, 아담이 범죄함으로 영은 죽었고 아담의 핏속에는 불순종의 피가 흐른다. 그 결과 그의 자손 즉 모든 인류에게 흘러내려가게 되었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시편 51:5 “내가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이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는 곧 원죄를 말하고 있다. 아담을 통하여 이 세상에 들어온 원죄는 하나님 앞에서의 ‘교만’의 죄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바벨탑을 쌓아오고 있다. 교만은 모든 죄악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다. 교만이외의 다른 모든 죄들은 바로 교만이라는 죄 때문에 파생한다고 할 수 있다. 교만은 극단적으로 자기중심의 죄악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이기심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중상하고 모략하고 비난하고 파괴하기 시작하여 구체적인 죄악의 모습을 갖기 시작한다.


화요일(5월 5일)

"원죄"(롬 5:12)


도입)

우리 교단의 전통적인 입장은 원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신학이 들어오면서 원죄를 인정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늘어났다. 교회 안에 이 두 가지 의견들이 공존한다 해서 서로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원죄(原罪 the Original Sin)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를 생각해보자. 이 원죄가 아담이 하나님이 정하신 금령을 위반했기에 과녁을 벗어났다는 성경적 의미의 죄인 것은 분명한데 왜 구태여 원죄라고 명명하는 것인가? 인류 최초로 지은 죄라서 그런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아담 때는 법과 윤리는 없이 오직 하나님과의 언약만 있었다. 물론 하나님이 동산의 다른 실과는 다 먹어도 선악과만은 먹지 말라는 금령을 분명히 제정했지만, 인간사회를 관장하는 현대적 의미의 실정법과 도덕률은 없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아담이 하나님의 금령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는 행위는 위에서 설명한 범죄나 죄의 성격과는 달리한다는 의미이다. 원죄의 출발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쉽게 말해 진짜 죄의 본질이 무엇인가? 선악과를 따 먹은 행동인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죄가 겉으로 드러난 결과에 불과하다. 그럼 그런 행동을 하기 이전에 하나님께 불순종하려고 마음먹은 것인가? 그러나 그것도 사고의 활동 즉, 몸을 쓰지 않았다 뿐이지 내면의 지정의를 움직인 행위이다. 진짜 죄의 본질, 말하자면 하나님께 불순종 혹은 배반하기로 작정하게 만든 더 근본원인은 따로 있다. 바로 하나님을 자기 마음에 두기로 싫어한 것이다. 그분을 자기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기 싫어하는 것이다. 왕이었던 그분을 폐위시키고 자기 소견(所見)대로 살겠다는 것이다. 제 멋대로 살고자하는데 하나님마저 절대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선악과란 물질계에 묶여 있는 인간으로선 영이신 하나님이 보이지는 않지만 항상 함께 하고 있으며 실제로 동산의 주인은 그분임을 절대로 잊지 말라는 가시적 형상이다. 그래서 동산 중앙에 언제 어디서든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당신의 권위의 상징이자, 아니 그분 당신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당연히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은 불순종의 행위를 넘어 그분 당신을 먹어치운 것과 같았다. 위에서 말한 범죄와 죄의 관계를 선악과 사건에 대입시키면 어떻게 되는가? 선악과를 따먹은 행위 자체는 실정법을 어긴 범죄(crime)이다. 범죄 이전에 불순종하려고 마음먹은 것은 따 먹어야 봐야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생각한 죄(sin)이다. 죄 이전에 자기 마음에서부터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지우개로 지워버린 것이 원죄(the Original Sin)의 뿌리인 것이다.


신학자들은 우리가 범하는 '죄의 행동'과 우리가 지닌 '죄의 본성'을 구분하곤 한다. 우리 모두는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부패했으며, 심지어 죄를 짓기 전에도 죄인으로 간주된다. 유아세례는 이러한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즉, 갓 태어난 아이가 세례를 받지 않고 죽으면 그 아이는 죄인이기 때문에 영원히 잃어버린바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습은 전혀 성경의 지지를 받지 못하며, 죽은 그 아이가 멸망 받는다는 개념 또한 성경과 맞지 않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지은 '최초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은 사실이다. 죄는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들어왔고, 이를 통해 "모든 사람"이 죄를 짓게 되었다.(롬 5:12)


1. 사도 바울은 우리 모두가 선천적으로 죄로 기우는 성향이 있음을 어떻게 묘사했습니까? 이러한 성향을 자신의 삶에서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롬 7:21-24, 8:7-8)

답: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완전한 상태에 도달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완전을 주장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그것이 사실이 아님을 분명히 말한다. 바울은 시편 106:6을 인용하면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진술하였다. 사도 요한도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는 것이라(요일 1:8)고 강력히 주장한다.

“성화는 한 순간이나 한 시간 혹은 하루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은혜 가운데서 계속 자라나는 과정이다. 우리는 다음 날의 투쟁이 얼마나 강할 것인지 모른다. 사단은 살아있고, 활동적으로 일한다. 우리는 그를 저항할 힘을 얻고 도움을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열렬히 부르짖을 필요가 있다. 사단이 통치하고 있는 한 우리에게는 굴복시켜야 할 자아가 있고, 극복해야 할 '빠지기 쉬운 죄'가 있을 것이며 정지할 곳은 없다. '이제 우리는 다 도달했다'고 말할 수 있는 지점은 없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7권, 947)


교훈: 우리는 죄로 기우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결코 완전함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죄를 극복해 나가야 한다.


부가적용)

원죄란 아담 개인이 범한 역사적 최초의 죄를 지적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죄의 본질을, 나아가 죄가 진행되어져 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용어가 되기도 한다. 쉽게 말해 모든 도덕적 죄든, 실정법을 위반하는 죄든 간에 그 출발은 하나님을 배제한데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이다. 죄의 뿌리가 하나님 대신에 사단을 따른 것이라는 뜻이다. 역으로 죄를 없애거나 씻으려면 인간이 스스로 노력해선 결코 가능하지 않고 반드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 된다. 한 마디로 원죄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상태로 태어나기에 스스로는 구원을 얻을 만한 믿음을 결코 가질 수 없다는 뜻이다. 또 그런 마음 상태로부터 다른 모든 죄와 범죄들이 파생된다고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원죄란 인간존재의 실상을 한 마디로 대변한 것이다.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인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이 심히 보기 좋게 창조하였는데 그분을 배역한 이후로 이 땅을 자기 것인 양 착각하고 오직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존재”라고 정의(定意)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종교나 사상들이 우연히 진화된 물질적 존재, 선하게 태어나서 환경에 따라 악해지는 존재, 악하게 태어났지만 교육으로 선하게 바뀔 수 있는 존재, 선하고 능력이 많아 스스로 유토피아를 이룰 수 있는 존재 등등으로 정의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원죄를 단순히 하나님께 불순종한 것으로 보면 죄의 본질이 행위의 죄가 된다. 또 원죄가 인간의 자기중심성이나 교만성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정의하면 자칫 도덕적 성품으로 제한된다. 나아가 단순히 죄성(sinful nature) 즉, 실정법이나 도덕률이나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자 하는 천성, 죄를 짓게 하는 성질, 죄가 많은 성질로 되어서 죄를 짓게 되는 가능성으로만 국한 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원죄로 인해 결과 된 상태이자 실제로 인간에게 적용되어 나타나는 모습일 뿐이다.


수요일(5월 6일)

집단적인 죄와 개인적인 죄(전 9:10)


도입)

죄란 한 인간이 개인으로서 자유로이 저지르는 행동이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는 한 집단이나 공동체의 행위가 아니고 언제나 개인적 행위이다. 다만 이 개인이 여러 가지 외부 환경들로부터 영향과 충동 또 제약을 강하게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또 자기가 개인적으로 처한 환경과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성향과 결점 또는 습관에 예속되어 있을 수도 있다. 가장 내밀하고 비밀스런 죄, 철저하게 개인적인 죄라 해도, 엄격히 말해서 그것을 범하는 사람 하나에게만 관계되는 죄란 사실상 있을 수 없다. 그 파괴력의 양이나 그것이 미치는 해악의 정도에 크고 작은 차이는 있겠으나, 모든 죄는 교회 공동체 전체와 전인류 가족에 반드시 영향을 끼치게 되어있다.


인류가 타락한 이래, 세상은 죄로 더럽혀졌다. 죄의 결과는 천연계에도 나타나 있으며 전쟁, 노예제도의 해악, 여러 형태의 착취, 천연 자원의 남용 등에서도 볼 수 있다. 과거와 현재의 세상은 모두 물질주의와 자아중심주의, 부정과 왜곡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우리는 개인적으로 아무 책임이 없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 만연한 죄악의 상태에 대해 떳떳한가? 다음 내용들을 숙고함으로써 이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데 도움을 얻기 바란다.

1.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집단적인 죄악은 대쟁투를 배경으로 일어나고 있음을 기억하라. "나라들의 흥망성쇠와 인간의 이권에 따른 상호작용은 하나님과 그분의 충성된 천사들이 사단과 타락한 천사들과 벌이는 보이지 않는 싸움의 직접적인 결과로서, 모든 인간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라울 데더린 편,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 신학 핸드북, 리뷰 앤드 헤럴드, 2000년, 995)

2. 죄는 철저히 파괴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음을 생각하라. 죄는 조금이라도 가치 있는 것이면 무엇이든 파괴해 버리려고 한다. 죄와 죽음은 동의어로서 어디든지 존재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개입이 없다면 이 세상에는 희망이 없다. 왜냐하면 죄와 죽음의 세력은 인간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기 때문이다.

3. 한편 우리 모두는 나름대로 세상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비록 작을지라도 이 세상의 악을 증가시키거나 감소시킬 수 있는 작은 결정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평화와 정의를 위해 일할 수 있다. 우리는 동정심을 가지고 행동할 수 있다. 우리는 환경을 보호하는 사람들과 협력하기로 결심할 수 있다.


1. 다음 구절들은 우리의 바른 선택과 작은 실천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전 9:10, 눅 16:10, 빌 4:8-9)

답:


교훈: 이 세상에는 형언할 수 없을 만큼 무서운 죄악들이 많이 일어난다. 우리 개인들은 비록 미약하지만 악을 감소시키는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부가적용)

 어떤 죄들은 그 소재 자체가 이웃, 더 복음적 언어를 써서 표현하자면 자기의 형제에 대해서 직접적인 공격이 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웃에 대해 저지르는 잘못이라는 바로 그 이유로 해서 하나님께 대한 잘못으로도 된다. 이런 죄들을 가리켜 흔히 사회적 죄라고 말한다. 교회가 죄의 상황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거나, 크고 작은 규모의 사회적 집단이나 온 나라 또는 여러 나라들의 군집 전체가 놓인 상황이나 전체적 행동양식을 사회적 죄라는 말로 단죄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때 교회는 그런 사회적 죄의 경우들이 모두 많은 개인적 죄가 쌓이고 응집된 결과임을 알고 이를 공표하는 것이다. 그것은 실상 다음과 같은 여러 종류의 인간들이 저지르는 개인적 죄의 한 예에 불과한 것이다. 그것은 먼저 악을 조성하고 유지시키거나 그것을 이용해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의 개인적 죄이다. 또 어떤 종류의 사회악을 피하거나 근절시키며 적어도 줄여나갈 수 있는 자리에 앉은 이들의 나태, 비겁, 침묵에 의한 방조, 비밀 공모, 무관심 등으로 해서, 이를 그대로 방치할 때, 그것은 그 개인의 잘못이다. 또 세상을 개선하는 일은 어차피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나서, 그걸 구실로 자기의 작은 세계에 안주하는 인간들, 제법 고상하기까지 하고 그럴듯해 보이는 이유들을 늘어놓으면서 의당한 노력이나 희생을 거부하는 인간들도 모두 개인적 잘못이다. 이렇게 볼 때 참다운 책임성은 인간 각자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목요일(5월 7일)

죄 문제에 대한 유일의 해결책(요 10:7)


도입)

모든 종교마다 나름대로 장점이 있고 또 귀담아 들을 만한 가르침은 많다. 말하자면 인격을 수양하여 수신제가(修身齊家)하는 문제에는 분명 도움이 된다. 심지어 이단이나 기괴한 사교(邪敎)라도, 비록 비정상적 방법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마음의 안정을 얻는 면이 있다. 그러나 그런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구태여 종교에 귀의하지 않더라도 도덕, 윤리, 철학의 가르침을 따르거나 명상, 마인드 컨트롤, 심리치료 등 얼마든지 방안은 많다. 그야말로 불신자들 주장대로 모든 것이 옳다. 바꿔 말해 하나님이 구태여 동원될 이유나 필요가 없다. 하나님은 분명 한 분뿐이다. 그 분께 죄 사함을 받아 천국으로 인도 되는 구원의 길도 당연히 하나뿐이어야 한다. 만약 모든 종교가 다 옳기에 아무 종교나 인간이 알아서 믿어도 된다면, 하나님 쪽에선 구원을 위해 한 일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그분이 인간 구원에 아무 관심이 없다는 것을 반증한 셈이다. 또 개나 소나 다 얻을 수 있는 그런 구원이 과연 유효하겠는가?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란 없다. 죄는 인간의 결심이나 인내심으로 이겨낼 수 없다. 죄는 우리보다 훨씬 더 거대하다. 그러므로 해결책은 우리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사람들은 구원의 문제에 관해 많은 혼란을 겪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천국에 이르는 여러 가지의 길이 있다고 주장한다. 길은 비록 다를지라도 같은 목적지에 이를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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