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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선지자들의 글들을 해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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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춘호메일보내기 이름으로 검색 작성일2009.03.07 10:33 조회수 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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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1과  선지자들의 글들을 해석함

3월 14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38분)


도입)

성경은 비유와 상징과 암호로 기록되어 있는 책이다. 타락과 죽음과 부활, 성령 잉태와 언약의 자녀, 예수와 그리스도의 영(성령), 심판과 종말, 이 모든 것은 문자의 직접적인 표현으로 설명되거나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속의 역사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속의 사건이 하나님의 뜻이 된다. 성경속의 하나님의 뜻은 역사와 비유와 상징의 암호로 기록된 책이다. 성경은 해석되어 있는 책이 아니요, 해석해야 할 책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성경을 바로 해석(正解) 하고 바로 깨닫지(正覺)못하면 하나님의 바른 뜻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頑固)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후 3:14] 마음은 존재의 본질을 인식할 수 있는 눈이다. 이 눈을 가리우고 있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바울은 수건이라 말한다. 우리들 역시 바울이 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들 역시 바울이 말한 대로 수건이 마음을 덮고 그 마음이 존재의 본질을 인식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수건(手巾)은 생명의 실상을 보지 못하게 가리운 막(幕)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몸은 물질이지만 마음( 정신, 의식)이 있어 생명의 하나님을 보고 인식할 수 있는 존재이다. 처음 창조된 인간은 다차원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의 눈이 있었다. 그러나 타락하므로 다차원 영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는 영의 의식이 가려져 영이신 생명의 하나님을 인식할 수 없게 된 것이 문제이다.


기억절: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눅 24:27)


연구범위: 사 65:17, 막 1:15, 롬 2:14-16, 엡 2:8-9, 약 2:14-26, 요일 5:12-13.


학습 포인트: 성경 본문을 사용함에 있어서 해석학과 설교학은 어떻게 다른가? 문맥을 고려하는 것은 왜 그렇게 중요한가? 복음을 들은 적이 없는 사람도 구원 받을 수 있는가? 은혜의 왕국과 영광의 왕국은 어떻게 구분되는가?


안식일 오후

우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엘렌 G. 화잇을 통해 예언의 은사가 주어졌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예언의 신의 증언을 어떻게 해석하느냐 하는 문제가 따르게 된다.

만약 화잇 여사가 받은 영감이 신구약의 선지자들과 동등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성경을 해석할 때 적용하는 동일한 해석 원칙을 그녀의 글을 해석할 때에도 적용해야 할 것이다. 물론 성경의 권위는 예언의 신의 권위보다 위에 있지만, 성경을 해석하는 원칙은 엘렌 G. 화잇의 글을 해석할 때에도 적용될 수 있다. 미국 사법부의 제도에서 유추하자면, 대법원의 법 해석 원칙과 판결의 원칙을 하등 법원에서도 동일하게 따르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대법원의 판결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진다.


일요일(3월 8일)

해석학(롬 2:14-16)


도입)

성경은 하나님의 메시지이므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는 한 올바른 해석이란 있을 수 없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땅으로 내려오셔서 하늘의 영의 목소리를 알리려고 하신 그 뜻을 해석한다는 것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L.Berhof(벌코프)가 지적한 것처럼, “죄가 인간의 지성을 어둡게 했고, 지금도 인간의 의식적 정신생활에 독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한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선지자가 주신 말씀을 올바로 이해하고 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을 해석하고 선지자의 글을 해석 하는 데에 여러 가지 학설로 그 가운데 있는 우리들은 어느 것이 참이냐를 주장하는 것은 우매하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학문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의도와 선지자의 의도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께서도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신 것처럼 성경을 기록한 의도를 확실히 알고자 하여야 한다.


해석학은 본문의 저자가 최초의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원래의 의미가 무엇이었느냐에 초점을 맞춘다.


1. 로마서 2:14-16의 본래의 의미 혹은 해석학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비교 겔 3:17-19, 롬 10:12-17)

답:

천국에는 복음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방인 가운데서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한 채 섬긴 자들 즉 인간의 도움을 통해 한 번도 빛을 받지 못한 자들도 잃어버린바 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기록된 하나님의 율법은 알지 못했으나 천연계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율법의 요구를 준행하였다. 그들의 행위는 성령께서 마음을 감화하신 증거이며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을 받는다.”(시대의 소망, 638)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인간 기별자들과 관계없이 이방 땅에 있는 자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들을 구원하신다. 그러나 그들이 구원받은 것은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감화하셨기 때문이며, 그들이 행위로써 반응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구원받는 것은 단순히 양심을 따라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만일 그들이 그렇게 구원을 받는다면, 그것은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되는데, 신약은 그러한 가능성을 명백히 부인하고 있다(롬 3:28, 갈 2:16).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으신다는 사실(11절)은,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롬 2:12)는 바울의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서 율법이 없는 자들이란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기록된 법을 갖지 않은 이방인을 가리킨다. 심판의 때에 유대인들은 기록된 율법으로, 이방인들은 “그 마음에 새긴 율법” 곧 양심에 따라 심판을 받을 것이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0)고 성경은 말하는데,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죄인임을 의미한다. 이들은 모두 같은 방법으로 구원을 받을 것인데,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 구원을 받는다.


교훈: 성경의 기자가 본래의 독자들에게 말하고자 했던 원래의 의미를 밝혀내는 학문을 해석학이라 하는데, 이것은 성경 해석의 기본이 되고 있다.


부가적용)

성소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막는 휘장이 있었던 것은 곧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건이 앞을 가려 제대로 인식할 수 없었던 사물처럼, 성경을 이해하는 과정에서도 우리의 인식의 과정에는 문제가 많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생들에게 인생과 그 인생의 존재의 의미와 삶과 죽음의 의미, 즉 성경의 참된 해석, 즉 성경의 가려진 베일을 벗긴 장본인이 되셨다. 예수께서 인간의 죄로 인해 죽으시고 부활하시므로 말미암아 죽은 자를 살리시는 참된 구원과 생명의 길을 여셨고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의 실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 타락한 인간의 상대적인 인식과 의식은 영생의 생명차원을 올바로 인식할 능력이 없었으나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통해 가르쳐지고 보여진 율법과 십자가, 또한 그분의 죽음과 부활은 참된 생명의 차원이 무엇인지를 인식하도록 눈을 열어주셨다. 그래서 성경 해석의 그 중심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식(믿음, 영)으로 성경을 바라보아야 한다. 참된 성경의 해석학에는 그 중심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그 중심에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월요일(3월 8일)

설교학(막 1:15)


도입)

설교의 목적은 하나님을 전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모습을 눈에 보이도록, 마음에 느껴지도록, 그리고 우리 삶 가운데 경험되도록 하나님을 전달하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다. 설교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삶 전체에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설교하기는 하나님의 현존과 역사를 유통하는 것이다. 설교하기란 하나님의 실재와 현실(Reality)이 회중의 삶 가운데 전해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속에 기록된 과거의 기록들에 관하여 말함으로써, 이제 곧 현재와 미래 가운데 드러날 하나님의 미래의 역사를 선포한다. 하나님이 보다 분명히 드러나게 만드는 것이 설교의 목적이기에, 올바로 전해진 설교는 언제나 계시의 사건이 된다. 즉, 이전까지 잘 드러나지 않았거나 희미했던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사건이 된다는 뜻이다. “설교는,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더 구체적이고 자세하게 확대시켜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설교자는 ‘성경의 확성기’라고 봐야 한다. 설교의 중요한 요소가 ‘설득’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설교자의 예술적 재능이 필요하다. 설교자는 한 편의 설교를 자신의 교향곡으로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설교학은 설교의 예술을 배우는 과목이다. 설교학 수업 시간에 학생들은 설교 준비 방법과 설교 시 성경을 사용하는 법을 배운다. 때때로 설교자는 설교의 핵심을 끌어내거나 호소를 위하여 본래의 의미에 주목하지 않고 본문의 표현만을 사용할 수도 있다.


1. 예수께서는 어떤 왕국이 가까웠다고 하셨습니까?(막 1:15)

답:

예수께서 그 당시에 선포하신 왕국은 그분께서 초림 시에 세우실 은혜의 왕국이었다. 그러나 이 본문을 오늘날 우리의 상황에도 적용할 수 있다. 안식일 아침에 설교자가, “여러분, 하나님의 왕국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라고 호소할 수 있다. 하지만 설교자가 염두에 둔 왕국은 예수님의 재림 시에 시작될 영광의 왕국을 가리킨다. 마가복음 1:15에 대한 전자의 해석은 해석학에 따른 것이고, 후자는 설교학에 따른 해석이다.

마가복음 1:17에 보면, 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거니시다가 어부인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고,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하셨다. 그러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좇았다.

오늘날의 설교자는 마가복음 1:17절을 본문으로 하여, 우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는 예수님을 따르자고 호소할 수 있다. 해석학적으로는 그 본문이 시몬과 안드레에게 적용되지만, 설교학적으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우리 모두가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마 28:19-20)

엘렌 G. 화잇도 종종 성경을 설교학적으로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교육(Education)이라는 책의 ‘생리학의 연구’라는 장에서 바른 자세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무엇보다도 첫째로 가르쳐야 할 일은, 앉고 설 때 올바른 자세를 갖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바로 서도록 지으셨다”(교육, 198). 그녀는 “하나님이 사람을 바르게 지으셨”다(전 7:29)는 성경절을 인용하였는데,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말한 것은 바른 자세가 아니라 정직성에 관한 것이었다.


교훈: 성경의 기자가 그 당시의 독자들에게 전하고자 했던 본래의 의미를 뛰어넘어 오늘날 회중에게 적용하는 해석 방법을 설교학적 해석이라고 한다. 


부가적용)

설교자가 철저한 본문 석의와 그 메시지를 부여하는 주해의 단계 끝냈을 때 다음으로 해야 거쳐야 할 단계는 말씀의 현장화를 위한 적용이다. 말씀이 현대인들에게 적용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불발탄 같은 메시지가 되기 쉽고, 이에 대한 책임은 설교자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지금껏 수고한 모든 단계가 무용지물이 되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다니엘 바우만은 “충실한 석의와 주의 깊은 주해를 하고서도 전혀 무가치한 적용을 한다는 것은 비판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실질적으로 회중에게 결단을 촉구할 수 있을 만한 적용이 없는 설교는 성공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적용이 시작될 때 설교가 시작된다”고 말할 정도로 적용의 비중은 현대 설교학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설교에서 적용이 일어나는 순간은 현대인과 메시지와 성령이 만나는 역사가 일어나는 순간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기대를 초월한 생생한 결실들이 발생한다. 베드로가 설교를 했을 때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지금 어찌할꼬”하는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적용의 모범적 사례다. 어떻게 하면 이런 역동적인 적용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많은 설교자의 공통적인 관심사이다.


화요일(3월 10일)

시간과 장소(렘 4:23-26)


도입)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생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을 깊이 읽거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고, 음성을 듣는 것은 쉽지 않다. 왜냐하면 성경은 단순한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기 때문이다. 성경이 정경으로 완성된 뒤로 많은 해석가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그것을 후세에 남겼지만, 여전히 성경은 새롭게 이해되고, 또 새로운 해석을 낳는다. 설교는 성경본문과 청중상황에 대한 해석의 산물이다. 성경본문에 대한 해석 없이 설교는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성경본문에 대한 해석만으로 설교가 완성되지 않는다. 설교가 바르게 전달되기 위해서는 청중상황에 대한 해석 또한 필요하다. 설교를 위한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두 지평의 만남이 형성된다. 하나는 성경본문의 지평이요, 다른 하나는 청중의 지평이다. 두 지평은 역사적 시간적 간격 속에서 상당히 분리되어 있다. 두 지평 사이에는 일반적으로 뛰어넘을 수 없는 거대한 간격이 설정된다. 설교는 두 지평을 하나의 과정으로 연결하는 작업을 시도하는 것이다. 그것이 두 지평의 만남이든, 아니면 제3의 지평을 창출하는 것이든, 혹은 두 지평이 하나로 겹쳐서 만나는 것이든 설교는 두 지평을 만나게 하는 해석의 과정을 지닌다. 해석에는 신학적인 문제가 걸려 있다.


성경 해석의 중요한 또 하나의 원칙은 그 본문이 누구에 의해, 그리고 어떤 시대와 상황 하에서 기록되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다.


1. 예레미야 4:23-26에서 예레미야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답:

대부분의 재림교인들은 이 구절을 읽을 때 천년기(millennium)를 떠올린다. 그러나 주전 600년경에 예레미야가 이 본문을 기록할 때에는 천년기를 염두에 둔 것이 아니다. 이 구절은 주전 586년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멸망에 관한 것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아 네가 돌아오려거든 내게로 돌아오라. 네가 나의 목전에서 가증한 것을 버리”라(렘 4:1)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를 통해 당신의 백성이 악한 길에서 돌이키기를 탄원하셨지만 그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23-26절에서 예레미야는 그들의 불순종의 결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이상을 통하여 보고, 유다 땅에 임할 임박한 파멸과 황폐를 시적인 언어로 묘사하였다.

주전 586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에 일어난 일은 미래에 있을 천년기의 표상이다. 따라서 예레미야 4:23-26은 해석학적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언급한 것이지만, 상징적으로는 천년기에 관한 언급이 된다. 엘렌 G. 화잇은 천년기 동안의 지구의 형편을 묘사하기 위해 이 구절을 인용하였다.(각 시대의 대쟁투, 659)

엘렌 G. 화잇의 글을 읽을 때에도 우리는 시간과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1897년에 화잇 여사는 “자전거와 의복과 기타 불필요한 것에 사용한 돈에 대하여 우리는 셈하여야 한다”(목사와 복음 교역자에게 보내는 증언, 398)고 기록했다. 19세기 후반에 자전거는 경제적인 교통수단이라기보다는 부자들의 노리개였다. 초기에 좋은 자전거 한 대의 가격은 150달러를 호가했는데, 오늘날로 치자면 아주 값비싼 자동차를 사는 것에 비교될 수 있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자전거가 저렴한 교통수단이 되자, 화잇 여사는 더 이상 자전거를 반대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자전거에 대한 화잇 여사의 생각은 선한 청기기에 관한 성경적 원칙에 기초하고 있었다.


교훈: 우리는 성경이나 예언의 신을 해석할 때에 그 본문이 어떤  시간과 장소, 그리고 어떤 특수한 환경 하에서 기록되었는지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부가적용)

설교는 성경본문의 지평과 청중상황의 지평이 만나는 곳에서 발생한다. 그것은 성경본문의

의미가 청중상황의 지평에서 경험되는 말씀 사건이다. 두 지평이 하나로 만나는 과정은 매

우 복잡하고 다양하겠지만, 본서는 두 지평 즉 성경 본문의 지평이 청중 상황의 지평에 오

버랩 되는 사건으로 설교를 규정한다. 이 과정에는 청중상황에 대한 적용이 요구된다. 그것이 설교의 적용이다. 설교의 적용은 해석된 성경본문의 의미가 청중상황에 적합하게 전달되어 청중으로 하여금 성경본문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삶에서 경험하게 하는 말씀 사건이기 때문이다. 성경 본문의 의미를 청중상황에 적합하도록 적용하는 설교의 과제는 현대설교방법론이 지향하는 연구방법이기도 하다. 이 방법론은 철저하게 청중 중심적이다. 설교 자체를 청중의 경험에 놓으려 한다. 청중상황에 적용되지 않는 설교는 설교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청중상황에 적합한 의미로 전달되는 설교방법만이 연구 가치가 있는 셈이다. 청중에게 들려지는 설교를 위한 방법으로서의 현대설교방법론은 청중이 본문의 상황을 경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것은 성경지평이 청중지평과 하나로 만나는 중요한 의미전달의 과정이다. 마찬가지로 예언의 신도 당시에 기록된 시간과 장소, 환경과 배경 등을 전제로 해서 오늘날 우리가 깨달아야 할 교훈을 정확히 이해하여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수요일(3월 11일)

직접적인 문맥(사 65:17)


도입)

글을 바로 읽는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 글을 쓴 사람이 전하려고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글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읽는 사람이 제 좋도록 제 생각에 맞추어 글을 읽는 것이 아니라, 일단 제 생각은 접어 두고, 쓰인 문장 하나 하나에서 드러나는 뜻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야 그 글의 내용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일이고, 그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생각을 밝힐 수 있다. 오늘 적지 않은 사람들이 - 심지어는 글을 쓰고 읽는 것을 전문으로 한다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 남이 쓴 글을 제대로 이해하지 않은 채 자기 생각대로 남의 글을 마구 비평하는 듯한 인상을 줄 때가 있다. 무엇보다 성경이 ‘본디 말하고자 하는 것’을 들으려 해야 한다. 적힌 글이 본디 뜻하는 바를 이처럼 올바로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으로 책을 읽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을 읽을 때도 중요한 것이고 예언의 신을 읽을 때도 중요한 것이다. 제 맘대로 성경과 예언의 신을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1. 이사야 65:17에서 이사야가 언급한 새 하늘과 새 땅은 어떤 것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고대하는 미래의 그 새 땅입니까?

답:

이사야는 그 다음 구절에서 이렇게 말했다. “거기는 날 수가 많지 못하여 죽는 유아와 수한이 차지 못한 노인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 곧 백 세에 죽는 자가 아이겠고 백 세에 못되어 죽는 자는 저주받은 것이리라”(사 65:20). 새 땅에서도 죽음이 있는가? 이것은 우리가 천년기 이후에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새 땅의 모습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17절에서 말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본문에서 이사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 하나님께 신실히 행하고, 이방의 빛이 되라는 거룩한 명령(사 42:6)을 성취시킬 때 곧 있게 될 ‘새로운 창조’를 묘사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 조건적인 예언은 성취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차적인 의미에서 이 구절은 천년기가 끝날 때 있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더 이상 죽음이나 슬픔이 없을 것이므로(계 21:4), 우리는 그 비유적 표현을 어디까지 적용해야 할지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엘렌 화잇은 실물교훈에서 “구주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무리 진실하게 회개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는 말을 해 주거나 그런 생각을 갖도록 가르쳐서는 안 된다.”(실물교훈, 155)고 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까?

답:

이 글의 문맥을 연구해 보면, 사람이 회심 후에 자기 확신과 유혹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화잇 여사 당시에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번 구원받으면 영원히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믿고 있었다. 우리는 결코 유혹에 대해 안전하지 못하며, 결코 타락할 수 없다고 말할 수도 없고, 이미 구원 받았으므로 유혹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말하려는 요점이다. 이것은 우리가 날마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교훈: 성경이나 예언의 신을 해석할 때에 문맥을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직접적인 문맥을 무시할 때 그 구절을 곡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성경과 예언의 신을 읽을 때 자신의 생각을 성경과 예언의 신에 집어넣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흔히 말하듯이 성경은 보통 책들하고는 달리 계시의 책이기 때문에, 기독교인들은 그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한다. 그리하여 이른바 성경의 이른바 '영적'인 뜻을 이해하려고 애쓴다. 당연히 그러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는 성경에 적힌 문장 하나하나가 본디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편견 없이 이해하는 것을 전제해야 하는 것이다. 한글 성경의 문장이 뜻하는 바조차 제대로 살피지 않고, 무조건 처음부터 영적인 뜻을 찾아보려 한다는 것은 성경을 바르게 읽는 길이라 할 수 없다. 요즈음 설교자나 또 평신도 지도자들 가운데, 성경 본문의 한글 문장도 바르게 이해하지 않고 그저 제 좋을 대로 성경 구절을 풀이하고 본문과는 아무런 관련 없는 이야기를 큐티라는 방법을 통해 은혜를 받으면서 자신이 느끼는 생각을 문맥적 정확한 이해가 없이 설교로 그런 내용들을 늘어놓으면서 말씀을 전하기도 하고 자신의 생각으로 적용하고 이해하고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하여 성경에서 말하려는 본문과 내용이 전혀 달라지거나 적용 또한 빗나가는 수가 있다. 이것은 예언의 신의 적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문맥을 깊이 살펴야 하는 것이다.


목요일(3월 12일)

폭넓은 문맥(엡 2:8-9)


도입)

성경은 글로 씌어져 있기 때문에 문맥을 따라 읽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폭넓은 문맥이란 성경을 전체로 보고 이해하여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때로는 ‘문맥’을 이보다 더 넓은 뜻으로 말할 수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읽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성경 본문이 본디 뜻하는 바를 그야말로 사심 없이 듣고자 하는 순수하고도 간절한 마음을 지녀야 한다. 그리하여, “하나님, 이 말씀을 통해서 본디 말씀하시고자 했던 뜻을 제가 바르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주소서.”라고 기도드리는 마음으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 성경이 본디 말하려는 바를 들으려면 ‘문맥을 따라’ 읽어야 한다. 또한 성경 본문이 본디 뜻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성경의 각 부분을 성경의 흐름을 따라 전체적으로 읽는다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는 우선 이른바 문맥을 따라서 글을 읽어야 글을 바르게 읽는 것이라는 일반 원칙이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폭넓은 문맥이란 특정한 주제에 관해 말한 앞뒤 문맥 외에, 같은 책의 다른 장이나 그 책 전체나 성경책 전체의 흐름을 말한다.


1. 우리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면, 행함은 필요하지 않습니까?(엡 2:8-9, 약 2:14-26). 바울과 야고보는 구원 문제에 있어서 서로 대립됩니까? 다음 구절들은 이 주제에 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롬 3:21-28, 4:3, 갈 3:6-12)

답:

이 주제에 관한 폭넓은 문맥을 살펴볼 때, 야고보는 선행을 구원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이 아니라, 두 종류의 믿음 곧 건전한 믿음과 건전하지 못한 믿음에 관해 주장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바울은 선행이 따르는 건전한 믿음에 대해 말했고, 야고보는 지적으로 동의하는 데 그쳐버린, 건전하지 못한 믿음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바울은 우리가 참되고 건전한 믿음에 기초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브라함의 예를 들었고, 야고보는 아브라함의 믿음이 선한 행실 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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