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성령의 열매인 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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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성령의 열매인 양선
2월 13일 안식일 (일몰: 오후 6시 9분)
도입)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 8~9) 성공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해선 요행심이나 공짜 심리를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원칙을 무시하고 주시지는 않으신다. 반드시 수고의 땀을 흘릴 것을 말씀하시고, 열심히 노력하고, 애쓸 때 하나님은 주신다.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이 있다. 정직, 열심, 친절이다. 친절은 우리 인간관계에서 감동을 준다. 인간관계를 이어주는 접착제 같은 역할을 한다. 마산 변두리에 작은 약국을 내어 성공한 김성오씨는 처음에는 약국에 사람이 찾아오지 않았다. 오는 사람도 약을 사지 않고 이것저것 물어만 보는 사람이 많았단다. 그러나 그는 친절하게 2~30분씩 상담해 주었다. 길을 묻는 사람에게는 말로만 알려주지 않고, 밖에 나가 5~6분씩 같이 걸어가 찾는 집을 쉽게 찾도록 도와주었다. 공중전화를 쓰고 싶은 사람에게는 전화비를 받지 않고 전화를 쓰게 하였다. 항상 밝은 표정으로 친절하게 대하는 그 모습과 행동에 수많은 사람들이 가슴에 감동을 받았다. 그는 얼마 안가서 친절한 약사로 소문이 났다. 약국은 그 후 저절로 잘 되어져 성공할 수가 있었다. 그리스도인의 양선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자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내가 하라고 하신다. 한 그리스도인이 음식점을 하다 잘 되지 않아 가게 문을 닫았다. 그런데 그 가게를 보니 비위생적으로 맛없이 해 놓고, 불친절하면서도 그는 기도를 했는데 손님이 없다고 불평만 말하였다. 기도했으면 하나님 대접하듯이 맛있게 음식을 만들고 하나님 대하듯이 친절하게 대하였으면 반드시 성공했을 것이다. 친절과 양선은 그리스도인의 유니폼이 되어야 한다. 구원 받은 자가 친절하지 못한 사람, 선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이다. 양선(αγαθωσυνη, goodness, 착함, 선함)은 ‘사랑의 성격’(love's character)이다. 양선(良善)이란 “어질고 착하다”는 의미를 지닌 말이다. 즉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자세를 가리킨다.
기억절: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연구범위: 시 51:10~11, 요 14:9, 롬 3:12~20, 7:7~12, 딛 2:14, 히 1:2~3.
안식일 오후
성경에서 ‘양선’(良善)은 선한 행동을 나타낼 뿐 아니라 악한 행동을 피하는 것도 포함한다. 양선은 거룩함을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양선은 실행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전혀 ‘양선’이 아니다.
갈라디아서 5:22에 ‘양선’으로 번역된 단어(아가토수네)는 활동적이며 심지어 적극적인 선(善)의 모습을 나타낸다. 품성의 탁월함을 넘어서 그 자체가 선한 행위로 나타나는 활동적인 성품을 말한다.
우리는 종종 어떤 사람이 ‘선량한 마음씨’를 가졌다고 말하거나 그 사람은 ‘선량한 사람’이라고 평을 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참조 렘 17:9), 실제 의미에 있어서도 맞지 않다. 왜냐하면 ‘선량한 마음씨’나 ‘선량한 사람’은 그 자체로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선량한 마음씨’는 선량한 행동, 선한 행위, 구체적으로 말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실천적인 선한 행위로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선한 의도, 선한 생각, 선한 동기도 물론 좋지만, 결국 선량하다는 것은 선한 행동으로 나타나야 한다. 만일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다.
일요일(2월 7일)
하나님은 선하시다(출 33:19)
도입)
오스월드 쳄버스(Oswald Chambers)는 말했다. “모든 죄의 뿌리는 하나님이 선하지 않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고통의 시간 한 가운데서 의심과 분노 한 가운데서, 우리가 하나님께 아뢸 말씀은 이것이다. “저는 주님의 선하심을 믿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것을 중단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더 잘아야 하겠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저를 위해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의 선하심을 믿고 주님께로 나아갈 뿐입니다.” (Larry Crabb)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향한 그의 목적과 약속에 있어 항상 신실하심으로 언제나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최악의 때를 맞이하더라도 여전히 이렇게 노래할 수 있어야 한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주의 성실이 크도소이다…무릇 기다리는 자에게…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 도다”(애 3:22-25, 시 36:5, 89:1-2, 14, 24, 33, 37, 40). 비록 하나님이 자신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방법이 때로는 한 동안에 우리가 예기치 못한 당혹스러운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들의 증거는 항상 “말씀하신 모든 선한 일이…다 너희에게 응하여 그 중에 하나도 어김이 없다”(수 23:14-15)는 것이었다. 따라서 선하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궁극적으로 비극은 있을 수 없다. 이는 그 모든 악을 최종적인 우리의 유익으로 능히 바꿀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선한 것임에 틀림없다(롬 8:28). 선하신 우리 하나님의 이 신실하심은 항상 우리의 믿음과 소망의 든든한 기초이며 영원한 감사와 찬양의 제목이다(대상 16:34, 대하 5:13, 시 106:1, 107:1).
성경에서 가장 심오하고 가장 절대적인 ‘선’의 개념은 홀로 하나님께만 속한다. 비록 이 ‘선하다’는 단어가 여러 상황에서 자유롭게 사용되고 있고, 또 ‘선인’과 악인이 있으며(마 5:45), 그리스도인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 가능하고(엡 2:10),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그분께서 친히 매우 ‘좋았다’(창 1:31)고 말씀하셨지만, 예수께서는 홀로 하나님만이 ‘선하시다’고 선언하신다(막 10:18).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이 절대적이다. 다른 모든 것들은 이 절대적인 표준에 비추어 나름대로의 선(善)한 정도를 지닐 뿐이다.
1. 다음 성경절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떻게 우리 삶에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합니까?(출 33:19, 시 25:8, 86:5, 107:21, 나 1:7, 롬 8:28)
답:
하나님은 당신의 선하심을 말씀으로 표현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선하심을 수많은 행위로 나타내 보이셨다.
우리는 창조사역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볼 수 있다. 비록 타락한 세상에서도, 질병과 자연 재해로 가득 찬 세상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은 천연계 가운데 여전히 나타나 있다.
인간관계, 사랑, 관심, 보살핌에 대해 생각해 보라. 우리가 이와 같은 놀랍고 선한 일들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와 같은 능력을 소유한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당신의 선하심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선한 것들이 사람들에 의해 무섭게 왜곡되고 말았다. 그 중의 하나가 인간의 성(性)이다. 비록 성에 대한 인간의 관심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왜곡되었지만 그럼에도 그 중심에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간을 향한 그분의 사랑이 드러나 있다.
2. 인간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선하심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은 무엇입니까?(요 14:9, 히 1:2~3)
답:
교훈: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분의 창조의 손길에서 풍성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그분의 선하심이 가장 명백히 드러난 곳은 예수님의 십자가이다.
부가적용)
성경은 하나님의 선하심(善, goodness)을 하나님의 우주적인 사랑으로 설명하고 있다. 선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성경에 친절, 관대, 인자, 자비, 긍휼, 오래 참으심 등으로 나타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선하심은 모든 피조물들을 대하시는 그 영광스러운 친절하심과 관대하심(시 145:9, 15-16)을 의미하며, 그리고 죄인들을 인도하여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시 100:5, 롬 2:4)을 말한다. 또한 그 선하심은 곤경으로부터 죄인들을 구원해 내심으로(시 107:, 136:) 절망 중에 있는 자들에게 친절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나타나며(시 106:1, 44-46, 시 145:7-9, 13-16), 그리고 죄를 고집하는 자들에게도 계속 친절을 나타내 보이시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노하기를 더디 하심(출 34:6, 시 78:38, 요 3:10-4:11, 롬 9:22, 벧후 3:9)으로 표현된다. 이러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최상의 표현은 저주를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그 놀라운 사랑과 은혜이다(롬 3:22-24, 5:5-8, 8:32-39, 엡 2:1-10, 3:14-18, 5:25-29).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하심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을 말한다(시 73:1). 그리고 갈보리산 십자가에서 나타내신 하나님의 그 사랑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분명히 확증해주신 최상최고의 증표이다. 따라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 4:8)고 말한 것은 선하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전에 죄인 된 우리들을 실제로 구원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월요일(2월 8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음(롬 3:12~20)
도입)
성경은 인간의 죄와 부패성에 대해 신중하게 가르치고 있다(롬 3:10-23).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였으며 죄 가운데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죄가 인간 생명의 모든 면을 파괴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죽음을 가져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창 3:19). 죽음은 모든 시대에 있다. 죽음은 파멸을 의미하며, 파괴와 하나님의 길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죄인이 되었을 때 그것은 인간의 모든 활동 영역에 파멸을 가져왔다. 인간은 오랜 동안 기술을 자랑스럽게 여겨왔다. 그리고 기술을 인간 진보의 증거로 제시해 왔다. 그러나 지금 그 기술이 우리를 공해 속으로 빠뜨리고 있다. 이것은 죽음의 모습이다~! 자동차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발명품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우리는 자동차가 대개오염을 포함하여, 대지 오염, 소음공해, 신경증, 운동부족, 부도덕, 이혼, 범죄 등등의 모든 문제의 주범인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자동차는 ‘실패한 마차’라고 불린다. 이것도 죽음의 모습이다. 또한 이웃과 사회에 대한 봉사를 준비하도록 가르쳐야 할 공교육은 읽기와 셈도 못하고 서로를 밟고 이겨야 하는 이기적 파괴와 피 흘리는 싸움에만 숙련된 폭도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도 죽음의 모습이다. 인간의 죄악과 부패성과 죽음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회가 어디 있는가? ‘인간의 모든 활동은 죽음의 영역 안에 있다’ 라는 말은 이러한 것을 잘 표현한 말이다. 하나님 없이는 인간이 만지는 모든 것은 파멸되고 또 파멸될 것이다. 인간의 죄와 부패성은 인간 스스로의 건강을 파멸시키고 있다.
1. 로마서 3:12~20을 읽으십시오. 우리 주변에서나 혹은 자신의 삶에서 이 구절에 기록된 현상들을 실제로 경험한 적이 있습니까?
답:
우리 삶에 있어서 한 가지 슬픈 사실은, 사람들이 항상 겉으로 보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재주 많고 매력적이며 아름답고 적극적인 개성을 가졌고 기술과 지혜가 많은 사람들도 그 내면이 부패해 있을 수 있다. 선(善)이라는 단어도 사랑이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우리 주변에서 너무나 남용되어 그 진정한 의미가 훼손되고 말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마음에 간직할 때 우리는 인간의 선함의 실체를 보다 잘 깨닫게 된다.
2. '왜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선천적으로 죄인이라고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소리를 비그리스도인들로부터 자주 듣습니다. '어쨌든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 친절하고 무아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을 나타내는 사람도 있지 않습니까?'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논리에 대해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답:
수년 전에 러시아의 작가 도스토예프스키(Feodor Dostoevsky)는 자신이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에 있을 때의 이야기를 썼는데, 그곳에는 러시아의 가장 흉악한 범죄자들도 수용되어 있었다. 그들 중에는 상상을 초월할 만큼 끔찍하고 흉악한 죄를 범한 이들도 있었는데, 도스토예프스키는 때때로 이 사람들도 가장 고상하고 친절한 행동을 보여주었다고 기록하였다.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가장 흉악한 사람들도 친절한 행동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정말로 선하게 보이는 사람들도 압박을 받으면 정말 나쁜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교훈: 성경에 기록된 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인간의 내면은 부패되어 있다. 흉악한 범죄자들도 겉으로는 친절한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
부가적용)
모든 인간의 마음은 밀가루 반죽에 뿌려져 있는 누룩처럼 그 내면이 부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늘 남아있다. 인간에겐 죄로 부패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가 구원을 받아 때때로 부드러운 마음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완벽한 것이 아니다. 언제든지 부드러운 마음이 완고함을 보일 수 있는 내부의 부패한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인간은 이런 마음의 부패성을 하나님의 은혜로 씻어내는 일이 날마다 지속되지 않으면 언제든 다시 부패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신자의 마음에 죄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죄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자유 한 것은 아니다. 죄가 유혹할 때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이 언제든지 반응하기를 즐기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로부터 우리의 죄책에서 벗어난 것은 분명하지만 오염된 인간의 마음의 죄성이 우리를 언제든지 다시 죄의 종이 될 수 있게 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죄의 이 부패성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서만 이 부패성은 어린아이와 같은 부드러움과 깨끗함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신자가 매일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의식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은 이미 죽음의 길로 들어선 증거이다. 하나님의 은혜 아래 사는 삶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지속적이어야 한다. 이런 은혜의 삶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거룩해져가는 모습을 보는 기쁨과 즐거움을 사모하는 것이 신자의 진정한 행복임을 아는 것이 구원의 복이다.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와 경건의 훈련이 우리를 가장 행복한 존재로 만들어 간다. 우리는 하나님을 수단으로 여길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의 형상의 자녀로 대하신다는 사실이 너무 감사할 뿐이다. 우리의 언제나 강팍해 질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의 실체를 알기에 우리의 마음을 은혜의 단비가 내리는 대지위에 세우는 일이 아무리 힘들고 고된 일이라 하더라도 매일 같이 포기하지 말고 그분의 은혜로 우리 자신을 씻고 정결하게 해야 하며 그분 아래 살고 있어야 할 것이다.
화요일(2월 9일)
하나님의 선한 율법(롬 7:7~12)
도입)
기독교인 자체는 선하지 않다. 예수는 하나님 한분만 선하시다고 말한다. 신자들이 가지는 선함과 의로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고후5:21; 빌3:9) 성경은 말한다. 그리스도가 없이는 사람은 부패하고 오염되었다;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시14:3). 당신은 불신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열쇠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있다. 단지 우리가 사용하지 않아서 녹이 슬었을 뿐이다. 성경은 실제로 그것을 열쇠라고 부르며 그것의 목적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것이며 구원의 문을 여는 것이다(요10:9). 사도행전28:23절에 보면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에 관하여 불신자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바울이 사용하는 두 가지 효과적인 수단을 볼 수 있다. 먼저 어떻게 선지자의 말들이 예수에 관하여 불신자들을 설득하도록 돕는지를 보자! 성취된 예언은 성경의 영감을 증명한다. 선지자들의 예언은 성경의 영감에 관한 강력한 근거를 제시한다. 이사야, 에스겔 그리고 요엘 등의 예언의 말들과 마태복음24장의 예수님의 말씀을 읽는 어떤 사람도 그것이 일반적인 책이 아니라는 도전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예수에 관하여 불신자들을 설득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던 두 번째 수단은 “모세의 율법”이었다. 성경은 우리에게 모세의 율법이 올바르게 사용된다면 좋은 것이라고 말한다(딤전1:8). 하나님의 율법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만들어졌는가? 딤전1:9-10절을 읽어보라!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율법은 일차적으로 복음전도를 위한 툴로서 만들어진 것이다.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라고 쓰고 있다. 하나님의 율법(십계명)은 분명히 예수님이 누가복음 11:52절에서 언급했던 “지식의 열쇠”이다. 예수님은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들은 죄인들로 죄를 알고 구원의 필요를 깨닫도록 하나님의 법을 가르쳐야만 했던 자들이었다. 예언은 죄인의 지성에 호소하는 반면에 율법은 양심에 호소한다.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 믿음을 양산한다. 율법은 죄인의 마음에 죄의 자각을 가져온다. 율법은 구원의 문을 열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열쇠이다.
1. 로마서 7:7~12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여기서 율법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그는 왜 율법이 선하다고 강조합니까?
답: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율법이 구원의 계획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아파서 병원에 가면 의사는 치료를 하기 전에 먼저 진찰을 한다. 그런데 진찰과 치료를 혼동하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하나님의 율법은 표준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구원의 과정에서 진찰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한다. 바울은 단순히, 율법이 없었다면 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율법은 우리 모두를 죄인이라고 진단한다. 이 진단이 없다면 사람들은 예수께 나아와 치료를 받을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구원의 계획에서 하나님의 율법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인데, 그 까닭은 율법이 없이는 죄를 인식할 수 없고 죄를 인식하지 못하면 구주에 대한 필요도 느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시편 40:8에 다윗은 기록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할까요?
답:
우리는 때때로 율법을 “~하지 말라”는 금지 조항으로 생각한다. 그 말도 어느 정도 일리가 있지만, 사실은 하지 말라는 것보다 할 수 있다는 것이 훨씬 더 많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때 주어지는 모든 실제적인 유익들을 생각해 보라. 지금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이면 틀림없이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만큼 충분히 그분을 신뢰해야 하지 않겠는가?
교훈: 하나님의 율법에는 우리를 향한 그분의 선하신 뜻이 기록되어 있다. 그분께서 금하신 것이라면 분명히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을 것임을 믿자.
부가적용)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율법의 기능 중 하나는 사람들의 입을 막고 그들이 “나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많다. 나는 실제로 나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스스로를 정당화시키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율법은 그 자신을 죄인이 아니라고 말하려는 인간의 정당화의 입을 막고 유대인뿐만 아니라 온 세상으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서게 한다. 로마서3:20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말한다. 또한 하나님의 법은 우리에게 죄가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 요일3:4에 보면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행하나니 죄는 불법이라”고 말한다. 갈3:24에서 우리는 하나님은 율법은 그의 피를 믿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예수그리스도께로 데려가는 몽학선생으로서 행동한다는 것을 배운다. 율법은 우리를 돕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를 무기력하게 만든다. 그것은 우리를 의롭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우리를 거룩한 하나님의 심판봉 앞에 죄인으로 세운다. 설교의 왕자 챨스 스펄젼목사는 말하기를 “나는 율법을 선포하지 않는 어떤 사람도 복음을 선포할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율법은 바늘이다. 그리고 당신이 복음을 위한 길을 열기 위하여 율법의 바늘을 먼저 보내지 않는다면 한 사람의 마음속으로 복음의 비단 실을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흔들기 위해서 사용하셨던 마틴루터가 고통스런 죽음의 순간을 맞이하였다. 죽음의 순간이 왔을 때 그의 입술은 성경말씀을 중얼거렸다.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루터는 요3:16과 시편68편의 다음 구절을 중얼거렸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 그는 박수를 쳤다. 그리고 아무런 일말의 괴로운 표정도 없이 하나님의 위대한 이 사람은 그의 순례의 길을 마쳤다. 율법은 구원의 문을 열기 위한 하나님이 주신 열쇠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의 행복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려는 구원의 내용이다.
수요일(2월 10일)
양선 안에서 행함(렘 13:23)
도입)
사도 바울이 사용한 양선이라는 헬라어는 특수한 성서 용어(롬 15:14; 엡 5:9; 살후 1:11)로서 일반 헬라어에서는 사용된 예가 없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롬 15:14)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엡 5:9)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살후 1:11) 이 말은 선의(善意)를 나타내는 가장 광범위한 말이다. 그리고 “모든 점에 대비되어 있는 미덕”이라고 정의되고 있다. 자비란 단지 도와주는 것이지만, 양선이란 견책하고, 교정하고, 훈련하여야 하는 것이며, 또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친절함과 동시에 강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양선이란 강직한 영혼과 부자격자에게까지 선행을 베푸는 것을 동시에 언급하는 것이다. 사랑의 은사를 남보다 더 많이 받은 사람이 있다. 그러나 양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체험한 이후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변화는 먼저 ‘남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된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웃을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영혼을 하나님 앞으로 인도해서 우리와 같은 형제자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있느뇨? 할 수 있을진대 악에 익숙한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렘 13:23)
위의 본문은 우리 인간의 본성, 특히 품성의 나쁜 면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단순하게 묘사하고 있다. (자기 배우자를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결혼한 이들을 알 것이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성경적 개념의 선(善)이 참으로 심오하고 세상에서 흔히 사용되는 것보다 얼마나 더 고차원적인지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성령의 열매인 양선(良善)은 경건한 사람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의 동기까지도 중요시하는 내면적인 성격이 있다. 우리의 행동이 ‘선하다’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의 동기가 옳아야 한다. 선량한 사람이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내면의 헌신과 사랑으로부터 바른 행동이 우러나오는 그런 사람을 가리킨다.
1.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시 119:9). 이 본문들은 우리가 어떻게 선하게 될 수 있다고 말해 줍니까?
답:
2. 위의 구절들을 바울이 로마서 7:18에서 한 말과 비교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이 구절들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습니까?
답:
로마서 7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최선의 의지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을 행할 힘이 없음을 인해 실망을 나타냈다(18~19절). 그러나 8장 1~4절에서 그는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비결을 공개하고 있다. 그 비결이란 무엇인가?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이 말의 의미를 토의해 보라. 그것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교훈: 우리가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는 비결은 성령 안에서 행하는 것인데, 성령님은 언제나 말씀의 수레를 타고 우리에게 오심을 기억하자.
부가적용)
지금의 이디오피아의 히브리 이름인 구스는 검은 얼굴, 즉 변할 수 없는 죄인의 본성을 상징하고 있다. 원한다고 해서 검은 피부가 흰 피부로 될 수 없고 표범의 얼룩점들이 바뀔 수 없는 것과 같이 유다의 죄악은 이제 변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뿌리박혀 있었다. 오늘날 우리도 검고 죄많고 본성이 악한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상태는 바뀔 수 있다. 즉 거듭나게 하는 신성한 생명은 우리의 악한 본성을 변화시키고 (이사야 1:18, 벧후 1:4) 우리를 영화롭게 한다. 구스인의 피부 색깔과 표범의 반점은 변화시킬 수 없지만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의 의해서 우리의 검은 피부인 악한 본성이 완전히 변화된다. 이것이 거듭남이며, 하나님의 생명을 체험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사람을 교정하거나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여 변화시키는 것이다. 어릴 적부터 도둑질을 해 온 한 절도범이 석방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그는 도둑질을 그만두려고 노력했지만 별 수 없었고, 어쨌든 다시 체포되어 감옥에 오게 된 것이라 생각했다.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거짓말을 안 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속상해 한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그들의 중독이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라고 말한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의 행실을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변화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변화를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죄를 짓는 행위를 습관처럼 가지고 있어도 우리는 그것에서 얼마든지 벗어날 수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죄와 무기력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우리를 도와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받아들이라. 죄의 사슬을 끊고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라. 그러면 불가능할 거라고 믿고 있던 자신의 모습이 하나님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는지 체험하게 될 것이다.
목요일(2월 11일)
선(善)한 행위를 나타냄(엡 2:10)
도입)
사람이 선하게 산다는 것은 매우 가치 있는 일이며, 가능한 최선을 다해 선을 행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의 죄 문제를 스스로의 노력으로 결코 해결할 수 없으며, 어떤 선행으로도 자신의 죄를 씻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격한 채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세상의 종교들은 인간의 선행이나 이타적인 삶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거나, 그것을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하지만 하늘과 땅과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자연의 법칙과 인간의 출생과 죽음과 그 이후의 삶을 주관하시는 주 하나님께서는 죄의 대가(代價)를 선행(善行)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선행이나 의로운 행위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불결한 것 같고, 우리의 모든 의는 더러운 걸레 같으며, 또 우리는 다 잎사귀처럼 시들며 우리의 죄악들은 바람처럼 우리를 옮겨갔나이다』(이사야 64:6). 자신의 선행을 자신의 의로 여기거나 그것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 용서받을 수 없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인간의 선행이 도대체 어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선행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행위로 구원받는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로 사신 바 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선한 행위를 나타내야 한다고 말할 수는 있다. 나무는 그 열매로 알리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삶을 통하여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내게 된다. 예수께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선한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시면서, 선행이 부족한 자들은 하늘 왕국에 들어가는 일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다.(참조 마 25:41~46)
1. 에베소서 2:10과 디도서 2:14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들에는 어떤 공통적인 기별이 담겨 있습니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공언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기별은 왜 그토록 중요한 것입니까?
답: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범하였기 때문에 죄인들이며, 그러므로 구주를 필요로 한다. 성경은 약속하기를 우리 자신을 예수님께 굴복시키고 육체 안에서 사는 대신 성령 안에서 살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반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고 하였다. 우리는 침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어(롬 6:4) “죄에 대하여는 죽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겨짐”으로(롬 6:11) 인해 바울이 말한 ‘새 생명’(롬 6:4) 가운데서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우리는 성경 말씀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선하게’ 될 수 있는데 이로써 구원받을 자격을 갖춘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과 동기와 행동이 하나님의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분명히 거기에는 자아의 죽음이 요구될 것이고, 자원하여 다른 이들을 섬기는 일도 필요될 것이며, 매일 육체와의 싸움을 싸우는 일과, 실패했을 때 통회하고 회개하는 겸손한 마음도 요구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고백하는 믿음을 따라 살아야 하며, 또한 그렇게 살 수 있다.
교훈: 아무도 행위로 구원 받을 수는 없지만,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선한 삶의 모습이 반드시 나타난다.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는 선행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부가적용)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는 것을 성경이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 구원받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물론 믿음에는 구원 받는 믿음이 있고, 기적을 일으키는 믿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원 받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구원받는 믿음이 있어야 기적을 경험하는 믿음이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대로 이루게 하시는데, 구원 받을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주시고, 기적을 경험할 믿음이 있으면 기적을 주시는 줄을 믿는다. 두 종류의 믿음을 다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먼저 필요한 것은 구원 받는 믿음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믿음에는 행위가 뒤 따른다는 것이다. 스펄젼 목사는 “예수 믿고 내 삶이 바뀌지 않았다면 그 믿음으로 내 영원한 미래를 바꿀 수 있는가? 라고 했다. 나에게 구원 받을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생활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으로 나의 영원한 미래를 바꿀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기 때문에 선한 행위와 구원 받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지만 시간상으로 보면 선한 행위는 구원 받은 이후와 관련이 된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 중의 하나는 선한 행위를 하기 위함이다. 엡 2: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지만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 믿음은 열매, 즉 행위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열매와 행위로 우리의 믿음을 다시 한 번 점검해 보길 원한다.
금요일(2월 12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우리가 하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은 다만 진리를 전하거나 문서를 보급함으로써만이 아니다. 그리스도교를 전진시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논증은 그리스도처럼 생애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값싼 품성은 이 세상에서 세속적인 사람의 품성보다 더 큰 해를 끼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교회증언, 9권, 21)
“그리스도교의 휘장(徽章)은 겉으로 보여 주는 표지가 아니며, 십자가나 면류관을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함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성품의 변화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통하여,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아들을 세상의 구속주로 보내셨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된다. 인간의 심령을 감싸 줄 수 있는 어떤 감화력도 이타적인 생애의 감화력보다 강력할 수는 없다. 복음을 위한 가장 강력한 논증은 상냥하고 친절한 그리스도인이다.”(치료봉사, 470)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개인이나 교회 단위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내 보일 수 있는 몇 가지 실제적인 방법들을 제안해 보십시오. 우리 교회는 지역사회를 위해 선을 많이 행하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 교회가 다른 곳으로 옮긴다면 지역주민들이 아주 섭섭해 할까요?
2. 성경은 하나님의 율법이 선하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율법이 나쁘게 사용될 수 있습니까? 어떤 면에서 율법이 오용될 수 있습니까?
3. 교과 반원들을 둘로 나누어 절반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토의하고, 나머지 절반은 인간이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토의해 보십시오. 반드시 성경에 근거한 내용이 아니더라도 세상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도 논증할 수 있습니다. 각 그룹의 토의가 끝난 후에 발표하면서 비교해 보십시오.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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