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과 성령의 열매인 인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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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성령의 열매인 인내
1월 30일 안식일 (일몰: 오후 5시 53분)
도입)
오래 참음이라는 말속에는 고통스러운 것을 겪는다는 뜻도 있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것을 극복해낸다는 의지가 포함된 말이다. 인내는 마지못해 쓴 약을 먹듯이 견디어 내는 것이 아니라 기쁨이 포함된다. 인내는 견고하게 서 있는 부동(不動)의 자세를 의미하며, 정금(精金)의 산실(産室)이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도 ‘참을 인(忍)’ 자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고 말한다. 하물며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는 어떠하겠는가? 원수 갚는 것은 주님께 맡기고 오직 참고 인내할 때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도록 역사 하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오래 참음이란 영적인 은사를 보존하기 위하여 고난을 참고 견디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사물이나 사건과 관련된 인내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인내를 나타내는 것이다. 인내란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디는 것을 말한다. 오래 참음은 감정을 거스르는 일을 견뎌내는 속성이다(고후 6:6; 골 1:11; 3:12). 그것은 부당한 취급을 당했을 때에도 보복할 생각을 품지 않는 것이다. “깨끗함과 지식과 오래 참음과 자비함과 성령의 감화와 거짓이 없는 사랑과”(고후 6:6)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골 1:11)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골 3:12) 신앙생활에는 언제나 인내가 요구된다. 인내가 없이 가치 있는 것을 얻을 수는 없는 법이다.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언제나 희생과 인내를 거름으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은 모두 영적인 생명이 타인에게 드러나는 모습을 나타내 주는 성령의 열매이다. 오래 참음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복된 교제, 즉 사랑과 희락과 화평이 흐트러짐 없이 군림하고 있는 상태의 교제를 나누다가 무관심의 차가운 돌풍이나 얼음장 혹은 증오의 바람을 만나게 될 때, 우리에게 해(害)를 입히는 자들이나 적들에게 대하여 취하는 끈기 있게 참는 태도를 말한다. 이러한 평가는 우리의 내적인 믿음과 성령의 충만이 외적으로 드러나는 표지인 셈이다. 그러므로 타인에게 인정받는 정도가 결국은 나의 진면목(眞面目)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억울한 핍박을 당하고 애매한 고난을 당해도 악을 선으로 극복하고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지혜롭고 선한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오래 참음이란 상당한 영적 성숙의 증거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오래 참음이란 하나님께서 빚어 가시는 성품으로서 모든 복의 궁극적인 복이 되는 것으로, 모든 상황을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다. 이러한 인내를 통하여 우리를 온전하게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기억절: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히 10:36)
연구범위: 창 6:3, 출 34:6, 막 4:26~29, 롬 15:5, 엡 4:1~2, 약 1:2~4.
안식일 오후
성령의 또 하나의 열매인 ‘인내’의 의미를 표현하는 헬라어 단어가 둘이 있다. 첫째는 후포모네(hupomone)인데, 바꿀 수 없는 상황에서 ‘감내하는 능력’, ‘불굴의 신념’, 또는 ‘강인한 참을성’ 등을 나타낸다. 둘째는 마크로투미아(makrothumia)인데, ‘위대한’ ‘분노를 오래 참는’ 등의 의미가 있다. 즉 ‘쉽게 화를 냄’, ‘참을성이 없음’, ‘쉽게 실망함’등과 반대의 뜻이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문제에 부딪쳤을 때 포기하지 않고 그 일에 매달린다는 의미이다. 대개 이 단어는 사람들에 대해 참을성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참을성 있는 사람은 부드럽고 온화하며 모든 상황에서 흔들림이 없다. 인내에 대한 진정한 시금석은 기다림에 있지 않고 기다리는 동안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
개인의 삶에서 이러한 특성에 도달하려면 연습과 하나님의 은혜, 자아를 부인하고 성령님의 속삭임에 복종하고자 하는 자원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좋은 소식은, 만약 우리가 인내를 배운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다른 복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된다는 것이다.
일요일(1월 24일)
하나님의 속성인 오래 참음(출 34:6)
도입)
아름답고 격조 있는 옷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성도가 입어야 할 옷은, 오랜 시간 여러 경건한 성품들이 뒤섞여 직조된 오래 참음이란 인격이란 옷이다. 오래 참음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경건한 성도에게는 오래 참음이란 하나님의 성품이 있다. 말 그대로 오랜 시간, 인내하며 형성되는 성품이다. 그렇기에 직조하기 대단히 어려운 성품이지만, 그 인격을 가질 때 놀라운 광채를 내는 것이다. 가장 아름다운 성품 중의 하나가 바로 오래 참음이다. 오래 참음은 고난과 박해를 견디며 생긴다. 박해는 다른 사람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말한다. 박해나 고통을 당할 때, 즉시 분노하거나 복수하지 않고 오랫동안 견디는 능력을 말한다. 모욕, 조롱, 부당한 비난을 당할 때, 억울하게 회사에서 퇴사당할 때, 권력에 휘말려 희생양이 될 때, 성도들은 오래 참음으로 반응해야 한다. 신앙의 일로 믿지 않는 배우자나 가족에게 모욕을 당하고 억울한 대우를 받을 때, 성도에게 오래 참아야 한다.
바울은 경건한 삶에는 오래 참음이 반드시 요구된다고 강조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여호와로라, 여호와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출 34:6)
하나님의 인내를 보여주는 성경의 많은 이야기들 중 하나는 니느웨를 다루신 이야기에서 발견된다. 선지자 요나는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인식하고 있었다.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음이니이다.”(욘 4:2)
출애굽기 34:6에 인내와 결합된 다른 속성들을 주목해 보라. 하나님의 자비, 은혜, 인자, 진실은 가장 완고한 죄인에게까지도 삶을 돌이키도록 최대한의 시간과 기회를 주기 위해 기다린다. 사람들이 자주 그렇게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즉각적으로 처단하신다면 우리는 모두 멸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1. 왜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에 대해 오래 참으십니까?(벧후 3:8~9). 하나님의 이러한 속성이 나 자신에게서나 다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답:
만약 누군가가 하나님의 모습을 어떤 말로 묘사하겠느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 대답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가치관과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진노하시고 신속히 형벌을 내리시는 분으로 생각한다면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다른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겠는가?
교훈: 하나님께서는 가장 완악한 죄인까지도 오래 참고 기다리신다. 우리가 인내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 까닭 중 하나는 하나님의 인내를 닮고자 함이다.
부가적용)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본받아 부당한 대우와 억울한 처사를 오래 참으라고 하신다. 우리는 억울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복수하고 싶어 하고 항거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오래 참으셨다. 공의로 심판하실 하나님께 자신과 모든 억울하게 당한 일들을 맡기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친히 복수하지 않으셨다. 고난당할 때, 주님이 하신 행동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완전히 자신을 맡긴 것이다. 주님을 본받은 스데반도 순교를 당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고, 그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하였다. 결코 복수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성도가 박해를 당할 때, 성도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요셉이 형들에게 박해받고 팔리게 되었을 때, 얼마나 억울하고 분했겠는가? 그러나 후에 말한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여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창50;20). 스데반이 순교를 당할 때, 얼마나 억울하고 분통하였겠는가? 그러나 그가 죽음 앞에서도 오래 참았을 때, 그는 천사같이 빛나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일을 통해 하나님은 아시아로부터 유럽과 로마까지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회개시키는 기회로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받는 박해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모른다. 하나님은 자주 성도가 당하는 박해와 고난을 성도와 가해하는 자-모두에게 선한 결과로 바꾸신다. 그런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과 신실하심을 믿을 때, 우리는 박해받는 시간에, 자신과 박해하는 사람 모두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래 참을 수 있는 것이다. 그때 오래 참음이란 옷이 만들어진다. 능히 짓누를 수 있는 사람의 도전을 통해 오래 참음이 생긴다. 주님을 본받으려 할 때, 참으로 오래참기 어려운 것이 아랫사람이 나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이다. 아랫사람의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과 함부로 윗사람에게 공격하는 것을 참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얼마든지 재빨리 앙갚음할 수 있다. 가혹하게 처벌할 수 있다. 그러나 오래 참으며 용서하고 친절을 베푸는 사람은 하나님을 그대로 닮고 있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닮고 있는 사람은 자신보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건방진 도발을 능히 억누르고 분쇄할 수 있지만, 용서하며 오래 참음의 성품을 얻게 된다.
월요일(1월 25일)
인내가 요구됨(엡 4:1~2)
도입)
인내라고 하면, 사람들은 보통 괴로운 일을 참는 것쯤으로 여긴다. 그리스도인의 인내는 그런 것과는 다르다. 곧 하나님 때문에 소망을 가지고 기뻐하며 그 어떤 괴로움도 느끼지 않고 인내하는 것을 말한다. 커다란 배가 파도를 견디듯이, 큰 집이 지진을 이기듯이, 일종의 흥미를 가지고 세상의 고통을 견디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인내란 “견딘다”는 듯이지 “참는다”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리스도인의 인내를 그 의미대로 나타낸다면 ‘기쁘게 인내한다’는 뜻이 적당하다고 본다.
1. 에베소서 4:1~2을 읽으십시오. 바울이 말한,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여야 할 사람들이 지녀야 할 특성들에 대해 살펴보십시오. 그 중에 오래 참음이 있습니다. 오래 참음은 제시된 다른 특성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습니까? 즉 그 속성들은 어떻게 상호보완 작용을 합니까?
답:
교회는 여러 다른 배경과 문화에서 온 사람들의 혼합체이다. 또한 성숙의 여러 다른 단계에 속한 사람들이 함께 섞여 있다. 많은 차이점이 있는 곳에 어울리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다. 종종 성숙한 사람들은 아직 미성숙한 사람들을 참아 주기 어려워하는 경향이 있다. 사실은 자신들도 지금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수년의 세월이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종종 미숙한 사람들에게는 그 단계에 도달하도록 동일한 시간을 주기를 원치 않는다.
2.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해 바울은 어떤 조언을 주고 있습니까?(롬 14:1, 15:1)
답:
교회 안에서 인내가 그렇게 중요하다면, 가정에서는 얼마나 중요한가? 우리는 어떤 때에 가족들에게 인내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믿지 않는 가족들을 위해 얼마나 오래 기도하는가?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수년 동안 기도하여 마침내 그의 마음을 주님께 바치게 한 사람을 알고 있는가? 가족들에 대한 인내심을 계발할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으로는 무엇이 있는가? 여기서도 자아에 대한 죽음이 왜 그렇게도 중요한가?
만일 우리가 ‘항상 얼굴을 대하는’ 가족들에게 인내할 수 있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도 인내할 수 있을 것이 분명하다.
교훈: 우리는 주님의 합당한 일꾼이 되기 위해 교회에서나 가정에서 나보다 성숙하지 못한 이들에 대해 더 많은 인내심을 발휘하여야 한다.
부가적용)
고대 그리이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아내 크산티페는 흔히 악처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어떤 사람이, 소크라테스와 같이 현명한 사람이 어째서 그런 악녀를 아내로 맞이했는지를 그에게 물었단다. 그랬더니, “말을 잘 타려면 사나운 말로 배우는 것이 좋다네, 그래야 다른 말을 타기가 쉬울 테니까 말일세. 만일 내가 그 여자를 견디어 낸다면 천하에 두려울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라고 대답하더란다. 그가 다시 소크라테스에게 “부인의 그 끝없는 잔소리를 용케도 잘 견디십니다.” 라고 한 마디 더 하자, “물레방아 도는 소리도 자주 들어 익숙해지면 아무렇지도 않다네.” 라고 대답하더란다. 또 언젠가는 소크라테스의 아내가 잔소리를 한바탕 늘어놓은 다음에 그의 머리에 물을 쏟아 부었는데도, 그는 태연히 “천둥 번개 다음에는 항상 큰 소나기가 따르게 마련이지.”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하다. 이 소크라테스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인내(忍耐)’를 이야기하고, 또 ‘수양(修養)’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의 참을성은 대단했다. 그는 군에 있을 때 어느 여름날 아침 일찍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한자리에 서서 움직이지 않고 사색에 잠겨 있었다고 한다.’ ‘그는 공직이 자신의 원칙과 타협하는 것이라고 보고 정치적으로 어느 편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BC 406~405년에는 500인회(불레) 회원으로 있었으며, 아르기누사이의 승전자들을 재판할 때 처음에는 동료 회원들과 함께, 나중에는 혼자서 온갖 협박에도 불구하고 참주들의 위헌적인 유죄판결을 끝까지 거부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소크라테스가 그리스의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을 만한 충분한 이유가 이러한 기록들에서 읽혀진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크산티페와 결혼하여 그와의 사이에 세 아들을 두었던 소크라테스의 가정과 관련된 일화이지만 불같은 성격을 가졌던 부인 크산티페와 이혼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늘 평온하고 행복했을 것 같은 가정은 아니었겠지만 인격수양의 결과로, 끝까지 인내한 결과로 가정을 지켜 나간 게 아니었을까. 사람이 사람다워지기 위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끝없는 자기 수양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인내가 뒤따라야 한다. 그래야 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고 살아남을 수 있다.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딘다는 뜻의 인내(忍耐)는 우리 삶속에서 품에 꼭 끌어안고 같이 가야 할 친구이다. ‘진정 위대한 일은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내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새뮤열 존슨은 말한다. ‘인내는 힘이다. 시간과 인내를 통해 마침내 뽕나무 잎은 비단이 된다.‘ 는 중국속담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인내할 때 더 새롭고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보아 왔다,
화요일(1월 26일)
복음을 전할 때의 인내(딤후 4:2)
도입)
복음을 전할 때는 담대하게 증거도 해야 하지만 해산하는 수고가 있어야 한다. 전도는 생명을 낳는 일이기 때문에 희생과 수고가 따르지 않고서는 생명을 낳을 수도 생명을 양육해 낼 수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살전2:7에 유모가 자기의 자식을 기름과 같이 희생과 봉사를 통하여 양육해 내라고 권면을 하고 계신다. 참을성이 필요한 이유는 전도대상자로부터 오는 인격적인 모독과 회심을 낳기 위한 산고가 필요 하다는 것이다. 또한 많은 부분을 인내를 갖고 들어주어야 한다. 주님은 우물가의 여인의 사연을 다들어 주셨으며 제자들을 인내로 기다리셨다. 인내는 전도에서 절대적인 전도자의 성품이다.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은 인내심을 행사하기 가장 어려운 영역 중 하나이다. 우리 대부분은 진리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나 진리에 관심이 없어 보이는 이들에 대해 너무나도 참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거짓 교리와 진리에 대한 선입견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오래 참아야만 한다. “진리가 이렇게 단순한데 왜 저들은 이해하지 못할까?” 하면서 고개를 흔들기가 참으로 쉽다.
거짓 교리나 전통이나 가족에 의해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이 아니라면 언제나 단순하게 진리를 받아들일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을 오류와 관습의 굴레에 묶어 놓은 선입견과 거짓 가르침을 벗기고 그들의 마음을 열기 위해 반드시 인내하여야 한다.
1. 마가복음 4:26~29을 읽으십시오. 이 비유는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인내가 필요하다는 중요한 교훈을 어떻게 가르쳐 줍니까?
답:
우리는 어떤 사람이 특정한 성경 교리를 공부하고 나서 즉시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가 그 진리를 거절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항상 그렇지만은 않다. 사실상 회심이란 어떤 경우에 수년이 걸리기도 하는 길고도 까다로운 여정일 수 있다. 비록 우리는 수고의 열매를 즉시 맛보기를 원하겠지만 항상 그렇게 되는 것만은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지나친 열정이 어떤 사람에게 방해거리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는 그 사람이 마음을 닫아버릴 정도로 너무 밀어붙여서는 안 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토록 사랑하고 마음을 쏟는 진리에 대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 사람이 헌신하지 않는 것을 볼 때 그를 정죄하거나 비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수고가 오랫동안 열매를 맺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 있으나 회심의 과정에서 중요한 걸음을 떼었을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알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함으로써 모든 것을 망가뜨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훈: 우리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비록 당장의 결과를 볼 수 없다 할지라도 그를 정죄하는 대신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부가적용)
찰스 스펄젼은 “설교자들의 왕자”였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당신이 다른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는 소망을 가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구원 받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확실히 하여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구원에 대하여 냉담해서는 안된다. 크리스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그가 잃은 자를 찾고 구원 하도록 하는 자극을 주실 것이다. 죄인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우리는 버려두면 안된다. 믿지 않는 이들이 처할 마지막을 항상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한다. 많은 믿는 이들이 편안한 교회 의자에 앉아 자신 만을 생각한다. 믿는 이들은 오로지 교회 안에서만 관심을 보이며 살아가게 된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친구”가 되신 것에 반하여 우리 믿는 이들은 오로지 교회 안에서만 친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믿지 않는 이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과 친구가 되도록 노력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전하는 기별에 당장의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끊임없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전하기 위해 인내하며 전해야 할 것이다.
수요일(1월 27일)
인내에는 한계가 있음(창 6:3)
도입)
하나님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결정체는 십자가 사건이었다. 사랑은 헌신과 정비례한다. 하나님께서 죄인인 우리를 얼마나 사랑 하셨는가는 우리를 향한 그 분의 헌신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같은 헌신적 십자가 위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 사랑을 받아들이지 낳고 도리어 훼방하며 악을 행하는 인류를 향하여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는 끝이 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보여주신 것보다 인내에 대한 더 좋은 본보기는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노아 당시에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은 방주가 준비되는 동안 120년간이나 지속되었다(벧전 3:20). 그러나 사람들의 완고함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소진해 버리는 때가 도래했으며, 그분께서는 홍수로써 땅을 멸하셨다.
1. 창세기 6:3에는 어떤 중요한 원칙이 나타나 있습니까?
답:
2.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광야와 바벨론 유수 때의 이스라엘을 보면, 사람들의 어떤 태도가 그와 같은 비극적인 결과를 불러왔음을 보게 됩니까?(신 31:27, 시 95:8, 렘 17:23)
답:
하나님의 인내가 다 하였다는 것은 우리도 이와 같이 해도 된다는 허용의 의미라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의 역사를 연구해 보면, 그분의 인내는 하루나 한 주, 혹은 한 달이나 일 년에 그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종종 그분의 오래 참으심이 다 하기까지는 여러 세대가 흘러갔음을 볼 수 있는데, 물론 우리는 그렇게까지 인내하지 못한다.
어떤 사람을 상대하거나 어려운 상황을 다룰 때 우리가 참을 만큼 참았다고 말할 수 있는 한계점에 이를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은 그 한계가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물론 우리는 어떤 상황에 대해 충분한 시간을 주었다고 결론을 내리고 종결을 선언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비판하고 냉담하고 가혹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된다. 행동을 취해야 할 시점이 있겠지만 그 행동은 반드시 친절과 사랑과 보살핌의 원칙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교훈: 물론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그분께서 오래 참으심을 그만 두실 때에는 한없는 사랑과 가슴 아픈 연민의 마음으로 끝을 선언하신다.
부가적용)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인내에는 한계가 있다. 물론 아가페적인 하나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다. 하나님의 한계는 인내의 한계이다. 물론 하나님은 오래 참으신다.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참고 기다리신다. 그렇지만 분명 인내에는 한계가 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가 잘 나타나 있다.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과 인내의 한계가 교차하고 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인내의 한계도 읽으시기 바란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만을 보면 진지한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인내의 한계를 읽고 하나님의 심판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영접하는 자에게는 무한한 사랑을 베푸신다. 그러나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심판이 있다. 눅 13:35절의 말씀을 보라. "보라 너희 집이 황무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임할 심판을 예고하셨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한하지만 끝까지 거부하는 자에게는 심판이 있다.
목요일(1월 28일)
인내심을 계발하는 비결(약 1:2~4)
도입)
우리가 때때로 참지 못함은 성숙하지 못함 때문이다. 아이들은 대게 인내심이 없다. 그들은 해야 할 일을 다 마칠 때 까지 오래 동안 한 자리에 앉아 있지 못한다. 이것이 불신앙이다.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 되지 아니 하리로다“(시28:16). 당신이 어떤 일을 하는데 조급하고 신경이 날카로워 걱정하게 된다면 이는 당신이 하나님이 역사하시라는 것을 믿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히6:12). 믿음과 오래 참음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우리는 그분이 약속한 바를 이루시기를 가다릴 것이다. 우리 인내하지 못하는 것은 육체를 따라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육체는(옛 본성) 항상 인내하지 못하지만 성령의 열매는 다음과 같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심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갈5:22.23) 인내하지 못함은 항상 값 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인내하지 못했다. 그는 아들을 낳으리라 는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하여 아내의 여종하갈과 ‘결혼했다. 아들이 태어났으나 그는 말썽만 일으켰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이삭이 때어날 때까지14년을 더 기다려야 했으나 이삭은 그 가정에 기쁨과 축복을 선사했다. 사울 왕은 인내심이 부족하여 선지자 사무엘이 오는 것을 기다리지 못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앞질러 희생재물을 드렸으며 이것은 그의 왕국을 패망으로 치닫게 했다. 베드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인내하지 못하고 칼로 사람을 쳐 죽이려 했다! 베드로는 그 사람의 목을 자르는 대신 겨우 그의 귀를 베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목숨을 구하려고 그 부상당한 사람을 고쳐주셨다. 베드로는 인내하지 못함으로 해서 자기 생명을 대가로 지불할 뻔 했다. 사단은 일단 우리가 안내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면 우리로 어리석은 일을 저지르게 하여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잇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러나 오래 참음은 풍요롭게 한다. 사단은 우리에게 가장 나쁜 것을 주려고 우리를 유혹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시험하신다. 욥은 이 사실을 알았으므로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의 가는 길은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 하신 후 에는 정금같이 나오리라“(욥23;10). 당신이 안내심이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사단과 정욕이 일하고 있는 때이며 이때 당신은 잘못된 결정을 내릴 위험에 처해있음을 알라.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 1:2~4)
1. 위의 구절이 사실임을 체험했던 적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직면했던 여러 가지 시련들을 통해 무엇을 배웠습니까? 결국 예수님의 품성을 반사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까?
답:
‘시험’ 혹은 ‘유혹’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페이라조(peirazo)인데, 넓은 의미로 ‘입증’ 또는 ‘검증’을 뜻하기도 한다. 마귀는 우리를 시험하고 유혹하여 악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삶에 허락하시는 시험과 시련은 우리의 품성을 계발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인생의 고난은 우리 성품에서 불순물과 거친 것을 제거해 내는 하나님의 일꾼들이다. 이들에 의해 채석되어 깎이고, 끌로 새기어지고, 갈리고 다듬어지는 것은 고통스런 과정이다. 또 회전 연마기(硏磨機) 속으로 들어가는 것도 힘든 일이다. 그러나 그 속에 들어간 돌은 하늘 성전의 제자리를 채우는데 부족함이 없이 준비되어 나온다. 쓸모없는 물건을 위해서는 주께서 그처럼 신중하고 철저한 작업을 하지 않으신다. 오직 그분의 보석만이 궁전의 식양대로 다듬어진다.”(산상보훈, 10)
그러나 모든 시련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뜻은 아니다. 종종 우리는 불순종을 통하여 시련을 자초하는 경우도 있다. 또한 시련과 고난이 단순히 우리를 미워하는 원수(벧전 5:8)가 있는 이 타락하고 죄 많은 세상에 살기 때문에 그 결과로 겪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께 온전히 굴복함을 통해 믿음과 순종으로 그분을 굳게 붙잡고 그분께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도록 허용한다면 어떤 일을 당하든지 우리는 더 훌륭하게 정련되어 나올 수 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 1:6)는 놀라운 약속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교훈: 시련은 우리의 품성, 특히 인내심을 길러준다. 우리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복종하고 믿음으로 그분을 굳게 붙잡음으로 시련을 통과할 수 있다.
부가적용)
신양성경에서 욥의 이름이 언급된 유일한 구절은 야고보서5장11절이다.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자시니라.” 이 말씀은 사단이 목적이 욥을 인내하지 못하고 포기화게 만드는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욥은 자기 자신과 비판하는 자기 친구들을 참치 못했으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다. 비록 욥은 하나님이 무슨 일을 하교 게신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자신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었으며 하나님이 결국에는 자신을 변호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안내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인내 없이는 아무것도 알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나아갈 수도 없다. 오직 인내가 제일 필요 하다. 우리가 인내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자 하시는 많은 진리들. 곧 우리를 심오한 삶과 더 풍부한 열매 맺는 사역으로 인도할 진리들을 배울 수 없다.
금요일(1월 29일)
더 깊은 연구를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을 취급하실 때 그분은 오래 참으신다. 하나님께서 지명하신 대리자들을 쓰셔서 사람들을 부르사 충성하라 하시고 회개하면 완전히 용서해 주겠노라고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오래 참으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악용한다. ‘악한 일에 징벌이 속히 실행되지 않으므로 인생들이 악을 행하기에 마음이 담대하도다.’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복종케 해야 될 하나님의 참으심이 부주의하고 죄된 사람들에게 전혀 다른 영향을 미친다. 그분의 오래 참으심이 그들로 하여금 자제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고 반역하는 마음을 기르게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오해하여, 자기들의 탈선행위에 대해 별 관심이 없으신 것으로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즉각적으로 형벌이 주어지는 시대에 산다고 하면 하나님께 범죄하는 일이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지체될지라도 역시 형벌이 있는 것은 확실하다.
하나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는 법이다. 그분의 오래 참으심이 한계에 다다르면 필연 형벌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이처럼 완고한 죄인을 취급하실 때는 완전한 끝이 이를 때까지 그치지 않으실 것이다.”(엘렌 G. 화잇 언급, 재림교 성경주석, 3권, 1166)
핵심적인 토의를 위해
1.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죄에 대한 간과는 다릅니다. 이 둘 사이에 차이점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습니까? 이 둘을 혼동하기가 쉬운 까닭은 무엇입니까?
2. 그리스도의 생애를 살펴볼 때 그분께서는 인내가 무엇임을 어떻게 말씀하셨습니까?
3. 시험과 품성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봅시다. 분명히 시련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지만, 오히려 더 의심을 일으키기도 하나요?
4. 이번 주 교과를 통해 새롭게 깨달은 영적 교훈이나, 한 주일을 살아가면서 꼭 실천하고 싶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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